243화
공기마저 가라앉은 알현실엔 정적만 감돌았다. 그 옛날 수많은 선대들이 그러하였듯, 지금의 뱀의 수장도 인간의 발에 입을 맞추며 경애를 표했다. 누군가 그 핏줄 어디 가냐는 뉘앙스로 비꼬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작 로빈은 아무렇지 않았다.
닿았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제국이 재건되고 그녀가 황제에 오른 지도 어언 3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어떠했는가. 수많은 수컷들이 그녀의 곁을 맴돌며 구애를 펼쳐도 자신은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곳은 제게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유클리드마저 그녀의 옆에서 알랑거리는데도, 심지어 버려졌다는 늑대의 수장까지 이엘의 곁을 떠나지 않는데도. 자신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저에게만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의 옥좌는 그렇게 높은 계단 위에 있었다.
검지에 걸린 반지 위에 입을 맞추는 건 대관식에서의 맹세의 키스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나는,
“폐하. 보시는 모든 것이 저의 의도이고 마음입니다.”
“…….”
“발을 핥으라 하셔도.”
“…….”
“저는 그리할 것입니다.”
그래? 그녀가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언제나 저 웃음은 내 것이 아니었는데. 로빈은 정말로 그녀의 발을 핥을 생각인 양, 다시 고개를 숙여 발치에 가까이 갔으나 이엘이 발을 뒤로 뺐다.
“그리할 것 없네. 이건 공의 몫이 아니야.”
“그러합니까?”
“공작. 오랜만에 즐거움을 안겨 주었으니 짐 또한 공작에게 보답을 하나 하겠다. 무엇을 원하는가?”
“제가 원하는 것을 정녕 주실 것입니까?”
“들어 보고.”
“…….”
“공은 욕심이 너무 많으니, 아무거나 허락할 순 없지.”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젓자, 소매 끝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꼭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제 영지에서 사뿐사뿐 걸어 다녔던 그때처럼. 로빈은 넋이 나가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빙긋 웃으며 조용히 아뢰었다.
“언제 한번 폐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
“제 영지에 친림하신다면, 가문의 영광일 듯합니다.”
“…….”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영지에 친림하신 폐하께 만찬을 대접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특한 욕심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제게 닿았다. 이엘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마주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욕심이 없군그래.”
“저는 제 분수를 알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재미있는 남자였다.
*
“폐하. 그건 안 됩니다!”
“…….”
“폐하!”
“경. 너무 시끄럽구나.”
올해도 무사히 폈다가 깊은 잠에 빠진 시클라멘 꽃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꽃은 잠결에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좋다는 듯 몸을 비비기까지 했다.
“아니, 뱀의 영지를 가신다는 게 말이 되십니까? 예?! 폐하!”
“앤디 경. 무엄하군. 감히 폐하께 목소리를 높이다니.”
“각하께서도 말씀해 보세요, 좀!”
“저는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허, 참. 저 독수리 좀 봐……. 앤디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르네를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엘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외면하고 꽃을 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앤디는 이마를 짚으며 결연히 답했다.
“그럼 1기사단도 함께 가겠습니다.”
“너무 번거롭구나, 그건. 근위대만으로 충분하다.”
“폐하!”
“이미 1기사단의 단장과 말을 마쳤으니 그만해라. 경은 이곳에서 할 일이 따로 있어.”
“단장님이요?! 노아 님이 그러겠다고 했습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시끄러운 앤디의 목소리에 눈가를 살풋 찌푸린 이엘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 후로도 앤디의 충언을 가장한 잔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는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녀를 제 동생 보듯 감싸고돌았다. 혹여 다칠까, 혹여 아플까.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해진 듯했다. 아마 대외적으로는 황실과 늑대가 갈라선 터라 티 내지 못하니까 뒤에서 더 이러는 거겠지.
그게 썩 싫지는 않아서, 이엘도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시선을 꽃에게 집중했다. 꽃을 되찾아 왔더니 그의 습관까지 물든 건지, 이엘도 깊은 고민에 빠지거나 그리움에 잠식될 때면 쓸데없이 꽃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폐하! 제 말씀, 듣고 계십니까?!”
“경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라.”
“물론 그렇겠죠. 설마 공작이 미쳤다고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폐하께 해를 입히겠습니까? 그건 아는데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추후에 오드와 2기사단도 합류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걱정이 되나?”
“그러면 됐습니다. 오드 님이 함께 가신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네요.”
누가 보면 근위대장이 경인 줄 알겠네. 그녀의 핀잔에도 앤디는 득의양양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근위대장인 하트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유치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여전히 하트가 근위대장인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게 유난을 떨던 앤디는 귀가 시간에 맞춰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시끄럽던 집무실에도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도 그럴 게 남은 자가 하트와 르네뿐이라.
온도를 맞춰 주는 유리관으로 다시 꽃을 덮어 주며 돌아선 이엘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도 두 사람은 별 동요가 없었다. 입가를 꾹 눌러 웃음을 참은 이엘이 르네를 향해 손짓했다.
“공도 그만 돌아가게. 짐이 자리를 비운 터라 공작이 고생 많았네.”
“그게 제가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아무튼 고마워. 공이 있어 준 덕에 충분히 쉬었으니까.”
“더 쉬고 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일은 밀리지 않았습니다. 내일 있을 오찬 모임은 미루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한 듯해서.”
“다시 악몽을 꾸십니까?”
“…….”
“폐하.”
르네의 조용한 채근에 이엘은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문을 지키고 선 하트를 향해 눈짓했다.
“오늘은 내가 폐하를 지킬 테니, 경은 돌아가 쉬게.”
“저는 폐하의 명령만 듣습니다.”
“그래, 하트. 공작 말대로 해. 그동안 쉬지도 못했으니 돌아가 눈 좀 붙여.”
“……알겠습니다, 폐하.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말은 아침이라고 했지만 새벽에 돌아오겠지. 별관에 머무는 며칠간 그녀의 호위를 고집하는 탓에 그 역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마침 하트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던 이엘은 르네의 청을 흔쾌히 허락했다.
“폐하. 차라리 성전에 들러 오드 님의 성력을 받는 것은 어떠십니까.”
“겨우 악몽 따위로?”
“그게 폐하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면 겨우 악몽 따위가 아닙니다.”
아마 단순한 꿈은 아닐 것이다. 별것 아니었다면 제게 털어놓았을 텐데도, 그녀는 끝내 침묵을 선택했다. 그것으로 인한 서운함보다는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괴로움이 르네에겐 더 컸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이엘은 빙긋 웃으며 공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르네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어 에스코트하며 그녀와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냥 피로가 쌓여 꾼 꿈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게.”
“또 제가 죽었습니까?”
“…….”
“저는 여기 살아 있습니다.”
“공.”
“언제까지나 폐하의 곁에 살아 있을 겁니다.”
당신을 놓고 먼저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의 고백처럼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달랬다.
때마침 침실 문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춰 섰다. 이엘은 저를 바라보는 르네와 시선을 마주하며 잡은 그의 팔을 토닥거리듯 여러 번 두드렸다.
“그건 짐의 명령이야.”
“…….”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 공작은 절대 눈을 감지 말라.”
“대관식에서의 맹세를 충실히 이행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야.”
“…….”
“나의 활이 되어 내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막다가 먼저 가지 말라고.”
자신은 노아처럼 그녀의 온전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처럼 이엘을 채근하여 알아낼 마음 또한 없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으라고 해도 그는 그래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물며 살아 달라니. 응당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우논의 입장에선 꽤 잔인한 명령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은 그녀보다 오래 살 테니까. 수명조차 포기할 수 없게 된 명령에 르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는 침실 문을 열고 이엘을 안으로 안내했다.
딸깍. 문을 굳게 닫고 안으로 들어선 그가 침대 앞에 선 이엘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당신의 궁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후, 그래. 이엘은 르네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던 건지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탈의를 준비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공작은 익숙하지만 조심스럽게 그녀의 탈의를 도왔다.
처음 즉위하고 붙은 시종들에게서 시중을 받다가 구역질할 뻔했던 기억이 여전해서, 이엘은 대부분 홀로 하거나 가까운 자에게서만 시중을 받았다.
강압적이었던 어릴 때의 트라우마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특히 시중받는 건 더더욱. 그 때문인지 황실의 측근은 그녀의 시중 유무로 정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르네는 언제나 예외였다.
오늘도 그의 손은 겉옷 벗는 것을 돕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명백히 ‘그녀의 측근’이란 범위에 들어가면서도, 그는 끝내 시중을 들 수 없었다. 주먹 쥐듯 손을 말아 쥔 르네가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의 손을 이엘이 덥석 잡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