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2화 (242/488)

242화

“개들은 참 자존심도 없지.”

“…….”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알랑거리는 꼴이라니.”

교활하게 휘어진 남자의 녹안이 시커먼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습성이 어디 가겠는가. 버려진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뒤만 졸졸 쫓고 있으니, 쯧. 로빈이 혀를 한 번 차며 곁을 지나쳤지만 끝내 노아는 로빈의 말에 반박조차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똑똑. 문을 두드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 집무실 안에서는 어떤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로빈은 손으로 제 옷을 툭툭 털어 단정히 정리하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자신의 황제께서 최근 들어 무척 예민해지셨으니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폐하는 안 계시오, 공작.”

때마침 복도를 지나오던 르네가 로빈을 불러 세웠다. 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비틀어 그를 쳐다봤다.

“아직 침실에 계시는가?”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을 듯한데.”

“내가 직접 찾아뵙지.”

“로빈. 별관은 출입이 금지됐다는 걸 잊지 않았겠지?”

뚜벅뚜벅, 구두 소리와 함께 들려온 노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아침부터 역겨운 두 놈의 면상을 보고 있으니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미려한 웃음을 지으며 노아와 르네를 쳐다봤다.

“폐하께서 별관에 계신 줄은 몰랐군.”

“…….”

“그럼 오후에 다시 입궁하도록 하겠네.”

빌어먹을. 아무래도 제가 밀어 넣었던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번 별관에 거하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잘 나오지 않는 그녀의 습관을 떠올리며 로빈은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별관은 수컷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곳이었으나, 시시때때로 황제에게 손목이 잡힌 채 들어가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뱀에겐, 자신에겐 철저히 금지된 곳이 그녀의 별관이었다.

로빈은 보이지 않는 별관 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망토를 휘날리며 황궁을 빠져나갔다.

*

“헉……!”

벌떡 일어나 밭은 숨을 토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사위가 어두웠다. 요즘 통 잠을 못 자는 그녀를 위해, 별관에 마련된 침실 창을 커튼으로 죄 가려 버린 탓이었다.

협탁 위에 올려놓은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몇 잔을 비웠는데도 목이 타는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엘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닦고 바닥에 떨어진 숄을 주워 걸쳤다. 그러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뻗어 설렁줄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경. 거기 있나?”

“예, 폐하. 시중이 필요하십니까?”

“그래, 좀 도와주게.”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빛과 함께 들어선 남자의 인영이 울렁거리듯 비쳤다. 갑자기 밀려오는 부대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와 그녀를 부축했다.

“폐하,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냐. 또 헛소문만 퍼질 텐데, 뭘. 그냥 둬.”

“벌써 며칠째 식사도 거르고 계십니다. 아니면 오드 님께라도 연락드리겠습니다.”

“…….”

“폐하.”

“경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여태 몰랐는걸.”

이엘이 작게 웃자 하트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어지러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동안, 하트는 서랍장을 열어 약을 꺼내 왔다. 그는 곧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약과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파리한 얼굴로 약을 꿀꺽 삼킨 이엘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하트를 바라봤다. 3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트는 완전한 성장을 마쳤다. 흡사할 정도로 닮았던 하이에나 세쌍둥이는 성장을 거치며 조금씩 달라졌다. 특히 하트는 체격이 다른 둘보다 커진 탓에 쌍둥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과묵했고, 감정에 동요가 없는 편이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생각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하트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이엘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그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대화를 건넸다.

“경, 그렇게 쳐다보다가 내 얼굴 뚫리겠어.”

“…….”

“통 웃질 않는 건 여전하고.”

결국 제 농담만 민망하게 허공에 흩날리고 말았다. 이엘이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익숙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 걷고 싶은데. 도와주겠나?”

“알겠습니다.”

별관은 무성한 소문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건국 직후엔 남아 있는 게 고작 황녀궁이라 이곳에서 업무를 처리했지만, 번듯한 황궁을 짓고 난 뒤엔 또다시 버려질 처지에 처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곳을 별관으로 지정하여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고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홀로 찾았다.

항간엔 그녀의 애첩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란 소문도 돌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침실은 그녀의 호위를 맡은 하트를 제외하곤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피시조차 이곳은 들어오지 못했다.

“정원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그게 좋겠어.”

별관의 정원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조경의 지휘를 맡았던 레온의 종족이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었다. 너저분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다며 소란을 피웠던 레온이 떠올라 이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제 마음만 아니라면 비교적 평온한 날들이었다. 의심과 불신으로 점철됐던 인간들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여전히 불안을 떠안은 이종족들조차 조금씩 삶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니까. 이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동거에도 안락함은 존재했다.

이엘을 제외하고는.

“경. 짐이 최근에 웃긴 소문을 들었는데. 경도 알고 있나?”

이엘이 쭈그리고 앉아 화려한 꽃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 대신 제 정복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아 주었다. 이엘은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웃으며 망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마 이 모습을 보면 패티스가 찬 바닥에 앉지 말라며 기겁할지도 모르겠다.

“이 별관이 짐의 애첩들의 성이라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도 웃기긴 했는데.”

“…….”

“최근에 도는 소문은 더 웃겼어. 짐이 경의 아이를 가졌다지 뭐야.”

그 말에 하트가 미간을 좁혔다. 힐끗 그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린 이엘이 한참을 폭소하다가 이내 그의 바지 끝을 잡아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봐. 얼마나 예쁜지 경도 좀 보게.”

“보고 있습니다.”

“무뚝뚝하긴.”

다시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꾹 누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식사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몸이 많이 허약해지긴 했다. 업무에 치여 훈련도 미룬 지 꽤 됐고. 게다가 최근에 꾸는 꿈들이 모조리 지독하고 악랄해서…….

그러니 저런 헛소문이 도는 게 아닌가. 아이를 임신했다나 뭐라나.

헛웃음이 터졌다. 내겐 어렵기만 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너무 쉽게 재단될 수 있다는 게……. 여전히 달라진 게 없어서 그저 웃음만 터졌다. 정말 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평화롭나 보구나. 그 생각에 속이 쓰렸다.

“폐하.”

“응, 괜찮아. 괜찮네, 이 정도면.”

“헛소문을 퍼뜨린 자를 잡아 처형하겠습니다.”

“폭군이란 소문까지 퍼뜨릴 생각인가?”

누가 패티스랑 쌍둥이 아니랄까 봐, 어쩜 하는 짓이 저렇게 똑같을까. 이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자, 하트는 여전히 무감한 낯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만 들어가지. 더 쉬었다가는 공작이 이곳까지 쳐들어올 것 같거든.”

“로빈이 또 방문 요청을 했습니까?”

“어째 경이 짐보다 더 지겹다는 얼굴이야.”

“…….”

“놔둬. 그것도 퍽 재밌긴 하거든.”

공작이 머리를 쓰는 걸 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아. 이엘은 흔흔히 웃으며 그의 시중을 받아 별관으로 돌아갔다.

*

“폐하, 공작이 배알을 청하였습니다.”

“들라 해라.”

옥좌에 반쯤 기댄 채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그녀를 보며 시립해 있던 자들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오늘 낮까지 별관에 머물다가 며칠 만에 집무실로 복귀한 황제는 로빈의 배알 요청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알현실로 자리를 옮겼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앤디는 괜히 저가 조마조마했다.

“제국의 가장 높은 분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래. 짐이 자리를 비운 사이, 꽤 빈번히 입궁하였다고?”

“자리를 비우신 줄 몰랐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와 공손히 절한 로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뱀 특유의 사람 홀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엘은 팔걸이에 걸친 팔 위에 턱을 괴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것들을 발견하곤 실소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로빈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손수 그것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폐하. 이번엔 폐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들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런. 공이 자꾸 이렇듯 쓸데없는 것을 진상하니, 짐이 괴소문에 휩싸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이엘은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나 비로드 융단을 밟고 내려왔다. 얕은 계단 몇 개를 내려와 로빈의 바로 앞에 선 그녀는 고개를 슬쩍 비틀어 제 앞에 선 것들을 응시했다.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무엇을 염두에 두고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죽은 도미닉이 생각나는데.”

그녀가 손을 뻗어 제일 앞에 서 있던 우논의 턱을 쓸자, 우논은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이건 공이 떠오르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로빈을 닮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미묘한 미소로 웃었다. 체격이나 생김새뿐 아니라, 하는 짓도 그를 닮았다. 이엘은 그 우논을 지나쳐 다음 우논과 마주했다.

“이건 르네 공을 닮았고.”

훤칠한 키까지 르네를 쏙 빼닮은 남자는 작은 몸짓까지 그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 건지, 옆으로 시립해 있던 르네의 미간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이엘은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이어 선 것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 봐도 뻔하지. 하트, 피시, 이카르, 레온. 하나같이 그들과 닮은 것들이지 않겠나. 저런 사소한 습관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그 생각에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다시 옥좌에 앉아 공손하게 선 로빈을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로빈은 기다렸다는 듯 거리를 좁혀 와 무릎을 꿇고 이엘의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린 에메랄드 반지 위에 로빈이 입술을 깊게 묻었다가 뗐다. 경애가 담긴 입맞춤에 손의 주인이 웃음을 흘렸다. 로빈은 축축한 녹안을 깊게 뜨며 그녀를 올려보았다.

“어찌 웃으십니까?”

“공작의 의도가 너무 투명하여.”

그녀가 비뚜름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숙여 로빈의 턱을 검지로 치켜세웠다. 싸해진 주변과 달리 그녀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눈동자에 장난이 잔뜩 묻은 채 손으로 로빈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마치 내 발에 입을 맞추라 하여도 맞출 것처럼 굴기에.”

“…….”

“그 꼴을 보는 것도 퍽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웃었네.”

그 어느 날의 깨끗한 발은 사라지고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녀의 발이 로빈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옥좌에 기대고 앉아 그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으나 로빈은 나가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발 위에 입을 맞추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

“제 의도는 너무도 투명하니까요.”

야살스레 웃으며 제 목적을 낱낱이 보여 주는 게, 영락없는 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