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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41화 (241/488)
  • 241화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예. 마차가 대기 중입니다.”

    말들이 모는 마차까지 왔다고 하니 정말 제국이 있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엘은 자조적으로 웃고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렇게 서 있으니 경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군.”

    “…….”

    몇 달 전에 정식으로 기사 서임식을 치르고 기사가 된 일라이저가 그녀의 칭찬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대신 답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저렇게 제복까지 차려입으니 그 시절의 루시우스가 바로 떠오를 정도로, 그는 루스를 참 많이 닮았다.

    “늑대는…… 아니, 됐다.”

    “제 1기사단은 이미 성전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황제와 늑대가 완전히 갈라섰다는 소문이 제국 내에 파다했다. 일각에선 버림받은 늑대가 여전히 그녀의 뒤를 졸졸 따른다고 했고, 또 다른 쪽에선 배신당한 것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설령 늑대가 제게 두 마음을 모두 품는다고 해도 이엘은 그들을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먹은 것도 없는데 괜히 입맛이 떫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늑대의 영지를 나온 뒤로 노아와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자신이 두고 온 편지를 본 건 확실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일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폐하.”

    “그래, 가지.”

    패티스의 바람과는 달리 제도는 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정했다. 제국의 이름 또한 고치지 않았다. 선대의 과오와 죄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였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 입장이 섞인 탓이 컸다. 황성 역시 불에 탔던 제국의 황성을 보수하기로 했다.

    대부분 전소한 탓에 그나마 사용할 만한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은폐되었던 황녀궁뿐이었다. 가장 볼품없고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던 제 궁으로 돌아오던 날. 이엘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궁이 황제의 집무실과 침실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시절 그녀의 자존심과 자아를 깎아 먹던 선황이 지금의 사태를 보았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그토록 무시하고 괄시하던 제 딸이 아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니. 땅을 치고 통곡했을까?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폐하를 뵙습니다.”

    배운 대로 공손히 인사한 소년들이 이엘의 뒤로 쪼르르 다가와 길게 늘어뜨린 적록색 망토를 각각 붙잡고 들었다. 남몰래 심호흡을 한 이엘이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열린 황녀궁 문을 통과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들렸다. 귀를 찢을 것 같은 환호성에 눈앞이 잠시 아찔했다. 그야말로 장관인 모습에 이엘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직전까지 전쟁을 겪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모두가 바라 왔구나.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삶에 이런 작은 축제를, 모두가 똑같이 바라 왔구나.

    “폐하!”

    꽃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가진 게 없는 인간들은 들에서, 산에서 가져온 꽃을 하늘 위로 흩뿌려 그녀의 앞을 축하했다. 어쩌면 그들은 이엘의 모습에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 걸지도 모른다. 같은 종족이니까, 같은 사람이니까, 같이 살아가는 존재니까.

    부디 앞날이 아름답기를. 부디 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왜 일라이저가 그토록 인간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왜 오드가 인간을 버리지 못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폐하를 뵙습니다.”

    그녀를 깨운 건 궁수대와 함께 등장한 르네였다. 서쪽엔 궁수대가, 동쪽엔 기마대가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탄 기사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일라이저 역시 말 위에 올라탔다.

    “오르십시오.”

    르네의 안내를 받으며 커다란 마차 안에 올라탄 이엘은 뚫린 창 너머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리아처럼 아주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대관식을 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걸려 왔을 텐데.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그들을 향해 흔들어 주었다.

    단순히 계위만 하는 게 아니라 제국 자체를 건국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하루빨리 건국을 선언하고 엉망이 된 정사를 보는 게 옳았다.

    이것도 모두가 사정사정해서 열린 대관식이었다. 이엘은 이런 행사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고, 당장 정무부터 보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몇 달 전부터 이미 국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환대를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발하겠습니다.”

    기악대의 연주 소리가 점차 웅장해졌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움직였고 수많은 사람들은 춤을 추거나 행렬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려 도착한 곳은 성전이었다. 제도 내에 있는 거대한 성전은 전쟁 통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성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종족들이 2차 전쟁 때 그곳을 다른 곳처럼 들쑤시지 않은 덕이었다.

    가장 화려한 제도에서 가장 초라한 취급을 받던 성전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제도에서 가장 온전하고 완벽한 성전으로 우뚝 섰다.

    마차가 멈춰 서고 일라이저의 손을 잡고 내린 이엘의 뒤로 어린 소년들이 다시 따라붙었다. 망토를 든 아이들의 보폭을 고려하며 천천히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등장에 미리 착석해 있던 귀족들이 기립하며 예법을 따랐다.

    황제가 의자에 앉자, 오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 2르뷔 제국은 신성 국가로 통치 이념은 신의 뜻을 따르며, 신 앞에 모두가 자유롭고 정의롭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께서 만드신 존재로, 누구도 우위를 점할 수 없으며 누구도 신의 권능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예.”

    “주권은 신께 있으나 그것의 일부를 이양받아 통치할 때에, 폐하께서는 정결하고 적법하게 통치하실 것을 맹세하십니까?”

    “예.”

    약식으로 치러지는 터라 필요한 것들만 진행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게다가 성직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오드뿐이라 진행이 더뎠다. 그럼에도 성문 안팎은 문전성시였다. 그쪽에 시선을 두지는 않았지만 이엘은 제 귀에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몸을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쓰고 왔던 관을 벗고 망토를 풀었다. 갖고 왔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어린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겸허히 내려앉은 그녀의 앞에 비로드 쿠션을 든 사람들이 다가왔다. 오드는 그 위에 있는 보석들을 하나씩 들어 그녀에게 수여했다.

    가장 먼저는 통치 권능을 뜻하는 황자의 반지였다. 녹색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그녀의 검지에 끼워졌다. 뒤이어 끼워진 것은 붉은 루비 반지였다.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황녀의 반지도 그녀의 손가락에 걸렸다.

    “신실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오드는 보검을 그녀에게 쥐여 주었고, 이엘은 보검을 받아 맹세한 후 다시 쿠션 위에 올려 두었다. 다음으로 홀과 로드를 각각 쥐여 주었다. 양손에 상징적인 리게일리어를 쥔 그녀를 향해 오드가 축사했다.

    “현명하고 깨끗한 군주가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황제의 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렸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무거웠다. 머리에 올린 관처럼 마음의 짐도 몇 배는 더 무거워졌다. 무언가 심장을 콱 억누르는 것처럼 갑갑하고 숨이 조였다.

    오드가 신께 기도를 마치며 뒤이어 귀족들이 황실에 대한 맹세를 위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옥좌에 앉은 이엘의 앞으로 가장 먼저 다가온 이는 당연하게도 노아였다.

    “공작은 폐하께 인사하십시오.”

    오드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앉았다. 그는 제 앞에 다가온 이엘의 반지 위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가 떼며 낮고 단단한 어조로 맹세했다.

    “제국의 제 1검이 폐하의 앞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오늘부로 폐하의 검이 되기를 신 앞에 엄숙히 맹세합니다.”

    “공작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

    “폐하의 검이 그것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는 전자를 택한 모양이었다. 버림받은 늑대가 되어 주인을 되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쪽을.

    “공작은 일어나십시오.”

    오드의 말을 끝으로 그가 일어섰다. 칠흑처럼 어두운 노아의 눈동자엔 부드러운 위로가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언제든 돌아오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눈은 변함없는 다정함으로 번져, 이엘의 세상을 온통 적시고 물들였다.

    “공작은 폐하께 인사하십시오.”

    그러나 이엘의 시선이 다른 곳에 쏠릴 틈이 없었다. 뜨겁게 내려앉은 붉은 눈동자가 올곧게 자신을 향하더니 반지 위에 눈동자 색만큼이나 정열적인 입맞춤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제국의 제 1궁이 폐하의 앞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오늘부로 폐하의 활이 되기를 신 앞에 경건히 맹세합니다.”

    “…….”

    “폐하의 앞을 수호하여 그 어떤 것도 폐하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당신의 궁이 그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예식을 마친 르네는 일어서 가볍게 묵례하며 옆으로 길을 비켜섰다. 마른침을 삼키는 이엘의 앞에 또다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2차 전쟁으로 공작 위를 가졌던 인간 가문은 모조리 몰살당했기 때문에 현재 남은 공작은 단 셋뿐이었다.

    노아, 르네. 그리고…….

    “공작은 폐하께 인사하십시오.”

    “제국의 은신처가 폐하의 앞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오늘부로 폐하의 은신이 되어 어떠한 위험과 고난이 올지라도 폐하를 숨겨 드릴 것을 신 앞에 거룩히 맹세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황자의 반지 위에 입술을 붙였다. 금세 떨어진 로빈은 옥좌에 앉은 그녀를 올려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가져온 관을 쓰고, 홀과 로드를 쥐고, 예복을 차려입었다. 그가 그토록 꿈꾸고 바라던 미래를 가져올, 그런 완벽한 황제의 모습이었다.

    로빈은 황홀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굴복하여 따른들 어떠하고, 굴복시켜 옹립한들 어떠한가. 그녀가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로써 제 2르뷔 제국을 건국하고, 신의 종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가 제국의 1대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뒤이은 오드의 축복 기도로 대관식이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문을 나서는 그녀의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리고 이엘이 마차에 오르기 위해 노아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우와…….”

    “이런 날씨에 눈이……!”

    여름을 거쳐 가을의 초입에 섰는데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엘이 시선을 돌려 오드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 위엔 미르와 같은 용의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있으니 정말로 신께서 축복이라도 내리신 것 같았다.

    “신의 가호를 받는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시원하게 쏟아지는 새하얀 눈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피날레를 장식했다.

    2부 마침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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