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폐하께서 늑대를 잘라 내셨다.”
“……그 남자를?”
“그래. 진짜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그래. 곧 소문이 퍼질 거야.”
늑대를 잘라 내고 돌아간 곳이 하이에나였다. 소문은 그렇게 퍼질 테고 이종족의 눈치 싸움은 다른 의미로 전환될 것이다.
늑대가 그녀를 버린 것과 나타니엘이 늑대를 버린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미 이엘이 황위에 오르는 게 확실시된 상황에서, 이종족들은 늑대가 차지했던 자리를 노리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을 테지.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하이에나에게 접선해 올 가능성이 컸다. 생각보다 그녀와 하이에나의 관계가 견고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
‘빛은 늑대와 함께. 그림자는 하이에나가.’
그 말은 이렇게 완성된 것이다.
“피시.”
“응.”
“표정이 왜 그래? 군주님이 돌아오기를 누구보다 기다렸잖아.”
“응, 기뻐.”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다. 패티스의 한쪽 눈썹이 위로 틀어졌다가 금세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는 무기력한 형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하트. 너도 돌아가서 쉬어.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게.”
“밖에서?”
“응. 어차피 잠도 다 깼어. 시간마다 타월을 갈아 줘야 하니까 내가 여기 있을게.”
왜 침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지키겠다는 건지 묻는 말이었으나 피시는 대답을 애매하게 피해 갔다. 답하기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하트도 더는 묻지 않고 먼저 성을 빠져나갔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피시는 그녀의 침실 문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하트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에겐 늑대의 냄새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노아의 냄새가.
그건 단순히 늑대의 영지에 머물렀기 때문에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아마 패티스도, 하트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으리라.
그 순간 그녀를 품에 안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선택은 그 남자였구나, 하는 자격지심이 생겨서. 하지만 그 감정 또한 자신의 것이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양보라는 허울 좋은 단어를 핑계 삼아.
그때 안쪽에서 미약한 신음과 함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겨 있던 생각에서 벗어난 피시가 화들짝 놀라며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침대 헤드에 기대고 앉아 목을 붙잡고 있던 이엘의 눈과 마주쳤다.
“피시…….”
잠긴 목소리에 자신이 더 놀란 이엘이 기침을 하며 억지로 목을 긁었다. 피시는 말없이 다가와 탁자 위에 있는 컵에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마셔. 따뜻한 물이라 괜찮을 거야.”
“고마워.”
컵을 들고 물을 마시며 피시를 빤히 쳐다봤다. 역시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것 같았다. 그의 변화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피시. 잘 지냈니? 편지에 답이 없어서 걱정했어.”
“편지는 일부러 안 봤어.”
“…….”
“읽으면 네가 보고 싶어서 울지도 모르니까.”
이엘이 보냈던 서신들은 전부 하얀 상자 안에 소복하게 쌓여 있다. 편지에 묻어 있는 그녀의 향기를 맡을 때면 그리움과 외로움에 마음이 허전해졌지만, 피시는 견디고 버텨서 이겨 냈다.
“아직도 미숙해.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라 가벼운 방어밖에 하지 못해.”
“피시.”
“하지만 노력했어.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노력할 거야.”
견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엘이 악몽에서 깨어나 제 품에 안겨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던 그 밤. 그 밤의 충격이 피시에겐 여전했다. 그녀는 혼자 살아가기도 버거운 사람이었다. 그 이상 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냥 받아 주기만 하던 조이나와는 상황 자체가 달랐다.
이엘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잡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길은, 무기로 온몸을 무장하고 걸어가도 목숨을 위협받는 길이었으니까.
“봐. 네가 없는 동안에도 패악을 부리지 않았어. 조금씩 나아질 거야, 정말로. 그러니까 엘.”
“응.”
“네 곁에 조금만 틈을 허락해 줄래?”
순수한 소년의 고백처럼 담백하고 티 없는 물음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자격이 되면……. 내게도 자리를 조금만 허락해 주지 않을래?”
억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건, 떼를 쓴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 감정은 동정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평생을 바쳐도 얻을 수가 없다. 그 사실을 피시는 깨달았다.
청년이 된 소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이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사랑해. 너는 내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존재야.”
“피시.”
“그러니까 노력할게. 더 많이 노력할게.”
“…….”
“나는 노아, 그 사람처럼 될 수 없어. 나는 그 남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감정은 같아. 그 남자가 널 사랑하듯, 나도 그렇게 너를 사랑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이지만, 피시는 제 사랑에 대한 보답이 없어도 기꺼이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냥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엘은 그렇게만 알아주면 돼. 네 뒤엔 나 같은 놈도 있다는 거……. 나는 이제 그걸로도 족해.”
노력하겠지만 동일한 크기의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너를 사랑해. 그게 너를 사랑하는 내 방식이야.
“피시. 정말…… 정말 벗어났구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피시의 트라우마가 마치 자신을 닮아서 늘 신경이 쓰였는데……. 그가 이겨 냈다.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과거에서, 그는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도 내 아버지의 그늘에서 너처럼 도망칠 수 있을까? 그녀의 눈빛에 피시가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로 마주 응해 주었다.
“응, 엘,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나도 해냈으니까.”
그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여러 번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설령 견디지 못해도 괜찮아. 말했잖아, 나는 약한 너도 사랑해. 어떤 모습의 너라도 나는 사랑하고 말 테니까.”
그의 사랑은 순수하고 깨끗했다. 그 사랑에 그녀는 큰 위로를 받았다. 큰일을 앞두고 요동치던 이엘의 마음이 그의 사랑으로 고요함을 되찾았다. 이엘과 피시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달랬다.
하이에나의 영지로 돌아와도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제도에서의 업무는 늑대의 영지에서 모두 마친 상태였다. 남은 건 변두리뿐이었다. 사실상 선포만 안 했을 뿐이지, 이 땅은 이미 제국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여 있었고 그녀는 이 제국의 황제로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러나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대관식 날이 드디어 밝았다.
*
“남쪽 호위는 조르단 백작이 맡아 주기로 하였다지.”
“예, 폐하.”
초로에 접어든 남자가 이엘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황궁 예법을 취했다. 응접실에는 조르단 백작 외에도 귀족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르뷔 제국이 있던 시절에 작위를 갖고 있던 구세력이었다.
전쟁 이후 황족을 포함한 귀족의 씨가 말랐으나 드물게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다. 조르단 백작 역시 그에 속했다. 그와는 어린 시절에 한 번 만났던 터라 안면이 있었다. 조르단 백작은 장성한 황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선황후께서 보셨더라면 기뻐하셨을 겁니다.”
조르단 백작을 필두로 구귀족들이 하나둘 이엘의 앞으로 나서며 제 소개를 했다. 물론 몇 번의 만남에서 구귀족의 복위를 허락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위치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갖가지 보화를 갖다 바치느라 바빴다.
전쟁 통에 다 잃거나 사라졌을 텐데 저 많은 보석을 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이엘은 가늘게 뜨던 눈을 접으며 태연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폐하, 실로 영광입니다. 건국식과 대관식을 함께 보는 날이 오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윌터 백. 짐 또한 그대의 가문을 다시 보는 날이 오니 기쁘군.”
“기억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귀족이라고 해 봤자 살아 있는 자는 양손에 꼽힐 정도였고, 승계를 할 만한 후계자들 역시 많지 않았다. 르뷔 제국에 헌신했던 자들에 대한 예우로 그들을 모두 복위시켜 주었고, 새로이 작위를 하사할 자들 역시 추려 놓았다. 구귀족과 신귀족은 적당한 견제를 위해 서로에게 필요했다.
“그럼 후에 보도록 하지.”
“예, 폐하.”
귀족들은 저마다의 속셈을 감춘 채 그녀를 향해 공손히 예법을 취한 뒤 먼저 성전으로 향했다. 이엘은 물끄러미 대형 거울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밖은 함성 소리와 악기 소리가 뒤섞여 시장을 방불케 했다. 조금 전에 봤던 귀족들처럼 저곳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왔으리라. 누군가는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황족을 향한 충심 때문에. 또 누군가는 불만을 억눌러 숨기고.
인간과 이종족은 하나의 통치자를 필요로 했다. 그게 ‘신’이라면 좋았겠지만 불신에 가까워진 인간이나,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종족 모두 다른 대상을 선택했다.
“폐하.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금색과 은색이 섞인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딱딱한 어조로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