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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9화 (239/488)
  • 239화

    약식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던 터라 딱히 누군가를 초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복잡한 절차를 그대로 따른다고 해도 모리아인들이 참석하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르는 게 더 행복할 터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오렴. 기다리고 있으마.”

    “네!”

    아이는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나무가 있는 곳으로 잽싸게 달려갔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노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던 차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에서 저희끼리 노닥거리던 늑대들이 일제히 코를 찡긋거리며 털을 곤두세웠다. 노아 역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관식이라고? 늦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엘도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다가 말고 멈칫했다. 그러곤 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보다 빨리 달려온 누군가가 품 안에 끌어안는 탓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나타니엘.”

    “이카르……?”

    “보고 싶었다.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이카르!”

    “나도 모르는 새에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가 피실 웃으며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묻었다. 대관식이라는 걸 보면, 결국…….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카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이엘을 품에서 떼어 냈다. 그러곤 한쪽 무릎을 꿇고 팔을 올려 격식을 차렸다.

    “종족을 되찾아 무사 귀환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이카르의 뒤에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의 동족이 확실한 재규어들이 함께 있었다.

    *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 빠졌던 노아가 눈을 떴다. 품 안에 가득 차 있던 온기는 어느 틈에 빠져나간 건지, 드러난 맨가슴엔 한기가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엘?”

    그녀가 돌아온 뒤로 숙면을 되찾게 된 자신과는 달리, 이엘은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함에 잠을 못 이루었다. 그래서 때때로 한밤중이면 발코니로 나가 바람을 쐬느라 감기를 달고 살았다. 오늘도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발코니 창이 조금 열린 걸 보고.

    “엘. 감기가 여전한데 이렇게 나가면……. 엘?”

    그러나 발코니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바닥엔 노아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원인 모를 불안함에 그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엘. 안에 있습니까?”

    보통 때였으면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겠지만 인내심을 잃은 노아는 무례인 줄 알면서도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역시 그 안에도 없었다.

    노아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램프를 들고 그녀가 갈 만한 곳을 전부 뒤졌지만 어느 곳에도 이엘이 없었다. 사색이 된 그는 왕성을 밝히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안드로!”

    한밤중에 비상 소집령이 떨어졌다. 안드로와 앤디를 필두로 한 기사단이 소집돼 영지 곳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엘이 이렇게 뜬금없이 한밤중에 갈 곳은 없을 터였다. 심지어 성지엔 오드도 남아 있었다. 오드 없이 혼자 어딘가로 갈 리가 없다.

    그렇다고 믿었다.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달리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요. 하지만 모든 게 끝나면, 그땐 다시 따뜻하게 안아 주러 올게요. 노아. 내 마음이 어떤지, 당신은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이 편지는 보는 대로 태워 주세요. ― 사랑을 담아, 당신의 엘.」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별일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몇 번이고 편지만 바라보던 노아는 공허한 눈동자를 들어 열린 발코니를 응시했다.

    “폐하. 재규어들과 나타니엘 님이 성문을 나갔다는 위병의 진술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고…….”

    급하게 들어왔던 앤디는 왕이 화로에 무언가를 넣고 태우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공기가 따뜻한 침실인데도 오히려 차가운 밤바람이 부는 밖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폐하. 나타니엘 님은 떠나신 겁니까?”

    “함구해라.”

    “……예.”

    “전에 그녀가 귀족회의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나?”

    그녀의 나라엔 무결한 존재가 필요했고, 이엘은 늑대들이 그 역할을 해 주길 원했다.

    “그녀가 우리를 버렸다.”

    “폐하!”

    “……그렇게 소문이 날 거야. 너무 큰 동요는 삼가도록 기사단과 종족을 잘 타일러라.”

    “어째서…….”

    “나타니엘이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

    “그녀는 우리의 절개와 위상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또 반은 틀렸다. 자신들은 그 절개와 위상을 종족과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게 아니니까. 잘라 낸 가지에선 이전보다 더 굳건한 가지가 자라는 법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니면 저희의 충성심을 낮게 평가하신 것일 수도 있죠.”

    “앤디.”

    “알아요. 저도 제 나름대로 그분을 아끼니까요. 하지만 속상하긴 하네요.”

    “…….”

    “나타니엘 님이 늑대를 가장 신뢰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온전히 신뢰하진 않으시잖아요.”

    그건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태어났다. 그러니 의지할 줄 모르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폐하의 말씀과 달리, 큰 동요는 없을 겁니다. 저희의 믿음과 충성은 이미 단단해졌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뭐……. 원하신다면 연기 정도는 해야겠죠.”

    앤디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는 젬병인데……. 앤디의 중얼거림을 들은 노아가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 끔찍한 연기를 또 해야 하다니. 그 생각을 하며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쳐다봤다.

    구겨진 시트만이 그녀가 이곳에 머물렀던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었다.

    *

    “귀환을 기다렸습니다. 폐하, 어서 오십시오.”

    쉴 틈 없이 며칠을 달려 하이에나의 영지로 돌아왔다. 새벽녘에 도착했으나 소식을 접한 우논의 상당수가 일찍부터 성벽 앞에 나와 있었다. 왕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던 하이에나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그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엘의 입가에도 동일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데다가 가벼운 감기까지 앓고 있던 터라, 이카르의 등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빠져 허물어지듯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에 그녀의 몸이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이엘의 상태를 주시하던 하트가 빠르게 능력을 쓴 덕분에 넘어지는 일은 면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재빨리 다가와 이엘을 부축한 패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 조금 지쳐서 그러니 걱정 마.”

    “자세한 건 휴식을 취하신 후에 보고하겠습니다. 침실까지 모실 것이니 쉬십시오.”

    패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트가 성큼성큼 다가와 이엘을 품에 안아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왕의 얼굴은 언뜻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나빠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로 평온한 낯이었지만 잔병으로 몸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트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구기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대가 한숨을 쉬고 그래.”

    지친 목소리였으나 웃음기를 담은 놀리는 투로 말하자, 하트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가 돌아온 게 못마땅한가?”

    “아닙니다.”

    “싫어도 내가 그대의 왕이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오랜만에 돌아온 것이니 제 두 발로 걸어서 왕성으로 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엘은 컨디션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였다. 온갖 피로가 겹친 탓에 솔직히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괴롭기만 했다.

    “싫지 않습니다.”

    “그래? 별일이군. 나는 그대가 나를 못마땅해 한다고 생각했는걸.”

    “……그랬다면 공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와 이렇게 긴 대화를 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이엘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트는 자세를 고쳐 제대로 안아 올린 채,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왕성까지 향했다.

    하트가 이엘을 안고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급하게 층계를 내려오던 피시와 마주쳤다. 그의 동생은 제 품에 안긴 여자를 발견하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에, 엘…….”

    “잠이 드신 것뿐이니 걱정 마라.”

    “내가 안을…… 아니, 깨지 않게 잘 부탁해.”

    피시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대신 앞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트는 묵묵히 동생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피시가 그녀의 침실 문을 열었다. 주인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도록 침실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넓은 침대 위에 내려놓아진 이엘은 작은 뒤척임 하나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열이 남아 있었다. 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던 피시가 찬물을 적신 타월을 가져와 그녀의 이마 위에 올려 주었다.

    “엘이 쉴 수 있도록 나가 주자.”

    계속 곁에 남아 간호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먼저 침실을 나간 건 피시 쪽이었다. 하트는 이엘의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군주님은 괜찮으셔?”

    함께 온 재규어들을 정리하는 대로 곧장 달려온 건지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패티스가 이엘의 안부부터 물었다. 하트는 그를 향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다행이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신 걸 보면 정말 쉬지도 않고 오신 모양이야.”

    “재규어를 타고 왔다고?”

    피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카르. 그 남자는 종족을 찾아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엘은 그런 이카르만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재규어 전체를 끌고 왔다. 현재 재규어는 살 수 있는 영지가 따로 없으니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 해 달라는 뜻이겠지. 내키지는 않지만 별수 없었다.

    “됐어. 그깟 재규어 몇 마리나 된다고. 어차피 대관식 이후로는 군주님께서 따로 영지를 하사하실 테니 조금만 참으면 돼.”

    “…….”

    “그보다 희소식이야.”

    패티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수려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기쁠 때나 나오는 본심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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