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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8화 (238/488)

238화

*

“저건…….”

앤디가 말을 잇다가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장 먼저 파괴되었을 물건이 왜 이 자리에……. 그러다가 그 물건을 들고 온 이가 다름 아닌 로빈임을 알아차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둘 중 하나겠지, 빼돌렸거나 빼앗았거나.

“당신이 만족하실 만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빈을 풀어 주고 한 달 정도 지났다. 그사이 이엘은 인간과 이종족 사이를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늑대를 비롯한 몇몇 종족은 오드의 주도하에 대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사실상 이미 정무를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그녀의 지지기반이 튼튼해져 가고 있던 참이었다.

잠을 자는 시간까지 쪼개 가며 지내던 그녀의 앞에 뱀이 돌아왔다. 호언장담하며 떠난 로빈을 잊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정말 그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리게일리어(regalia)를 들고.

“제국의 리게일리어입니다.”

“이걸 어떻게 갖고 있었나요?”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로빈. 내가 누군지 잊었나요?”

살벌한 이엘의 목소리에 응접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쟁이 있던 그 밤, 황궁의 온갖 보석과 유물은 도적들에게 약탈당했다. 그곳에서 이엘은 건진 게 제 목숨과 귀중품 몇이 전부였다.

그런데 줄곧 보관하고 있었다고? 도적들의 눈에 띄었다면 저것을 제일 먼저 가져갔을 텐데? 그게 아니어도 불탄 황궁에 남아 있을 리 없다. 로빈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전부 거짓은 아닙니다. 다른 이가 갖고 있던 것을 가져와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신뢰를 떨어뜨리는 말씀을 하셨군요.”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인간을 사랑하시니 그들에게서 빼앗았다고 하면 노하실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냥 빼앗은 건 아닐 테고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이엘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붙잡았다. 결국 세잔티노에서 인간들을 먹어 치웠던 것처럼, 저 리게일리어를 가져오기 위해 비슷한 일을 벌였겠지. 아무리 도적 떼였다고 해도……. 짧은 탄식 끝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번쩍번쩍 빛이 나는 황금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주인을 찾아 돌려드리는 것이니 부디 언짢게만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원래 황족의 것이니 돌려받는 것일 뿐이라며 로빈이 혀를 굴렸다. 그의 말을 반쯤 무시하던 이엘은 상자 위로 손을 뻗으려다 주저하며 손을 거뒀다.

빈민가에서 도망쳐 제도로 향한 도적들은 황궁을 습격했고, 황녀궁에 갇혀 있던 이엘도 그들에게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날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 탓이었다. 루시우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피하지 못했을 참변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다가온 노아가 걱정을 담은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괜찮다고 나직이 중얼거린 이엘은 커다란 상자 안에 담긴 것들을 눈으로 헤아렸다.

제국의 대관식에서 쓰는 황제의 관, 홀, 로드, 그리고 예복과 같은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온전한 황가의 리게일리어였다.

뱀이 이것들을 그녀에게 바쳤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로빈이 그녀를 황제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제국에서 사용했던 것을 보관했다가 바치다니.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들이었지만 제국의 것을 사용한다면 그녀의 정통성은 더 공고하게 세워질 테니까. 결국 로빈은 이 행위 자체를 이엘에게 선물로 준 셈이었다.

그녀의 만족을 위해.

“뱀이 따른다고 하면 일대가 술렁이겠군요.”

“굴종했다고밖에 볼 수 없을 테니.”

앤디의 말에 안드로가 수긍했다. 서로 대립하던 양 산맥 중 하나가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 뱀이 무너져 세력이 흡수됐다면 이제 다른 이종족도 더는 눈치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갈등을 빚던 뱀이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손에 피를 묻힌 건 아닙니다.”

모순된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로빈이 공손히 말했다.

“설령 손에 피를 묻혔다고 한들 뭐 어떻습니까. 그것은 본래 당신의 것이고, 빼앗겼던 쪽도 당신이거늘.”

“로빈.”

“나타니엘. 제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저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부상 정도지요. 그러나 당신은 어떠했습니까?”

“…….”

“눈앞에서 유모가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손에 죽어 가는 걸, 그대로 보고 계셨다고.”

로빈은 지난날 그녀가 뱀의 영지에서 제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해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침내 수긍한 이엘을 향해 그가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뒤에 있던 우논에게서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가져와 그녀의 앞에 공손히 바쳤다.

“제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확인하십시오.”

금색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엘이 두루마리를 받았다. 맞닿았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마른침을 삼킨 이엘은 돌돌 말린 종이를 천천히 펼쳤다.

「……짐의 후계를 제 1황녀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로 정하는 바, 이를 위하여 준비할 것을…….」

황제의 친필로 적힌 완벽한 칙서였으나 이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로빈을 쳐다봤다.

“……이것을 왜 당신이 갖고 있던 건가요?”

“선황의 시종장이었던 자가 품에 품고 있던 것이지요. 전쟁터에서 그자를 직접 죽였던 제가 발견한 것입니다.”

최종 수신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시종장이었던 한스가 갖고 있던 것이라면 황제의 칙서가 확실할 것이다. 필체만 보아도 제 아비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거짓이다.

“이렇든 저렇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개국공신, 그것은 제게 일도 아니라고요. 완전무결한 자리를 보장해 드리겠다고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던 곳은 원래 공란이었을 터였다. 선황은 이온을 황태자로 삼을 계획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빠르게 양위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칙서는 이름이 적히지 않은 채 시종장에게 전달된 듯했다.

“제가 가져다드린 것들이 가시적인 선물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종이를 천천히 훑어 내려가던 이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로빈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소모라를 반환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곧 보도록 해요, 공작.”

“영광입니다.”

로빈은 악수를 청했던 그녀의 손을 천천히 돌려 손가락에 걸린 반지 위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곧 뵙겠습니다, 폐하.”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

모리아는 가장 동쪽에 위치한 땅으로 척박하고 황폐한 땅이었다. 개간이 어려운 땅이라 처음부터 버려진 땅이었다.

그런 땅에도 사람은 살았고, 그들은 당연히도 모두 하층민이었다. 때때로 이종족보다 낮은 계층으로 취급될 정도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모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겐 전쟁 전이나 후나 똑같은 삶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빌어먹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리아에 축복의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심이 깊을수록 나무의 생명력이 오래갈 테니, 부디 지금과 같은 마음을 버리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거대한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드는 사람들을 향해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주며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나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이엘은 쓰고 있던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며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이 구휼이 당신의 허락하에 되었음을 알리는 편이 나을 듯한데.”

늑대의 모습을 한 노아가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오드의 말이 맞아요. 저 사람들은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신을 향한 신실함도 잊지 않았어요. 나무의 생명력을 틔운 건 내 선택이 아니라 저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이에요.”

“…….”

“적어도 빈민가의 구휼만큼은 정치적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어릴 때 황궁의 스승 중에 신분을 숨겼다가 들켜 처형당한 자가 있었다. 그는 모리아 출신이었으나 명석한 머리로 학자가 되기 위해 출신 지역을 숨긴 채 이엘의 스승이 되었다. 이엘은 그에게서 모리아 특유의 억양과 은어를 몇 가지 배웠다. 스승은 그녀의 자질을 인정해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스승은 출신 지역을 숨겼던 것이 탄로 나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때 어찌나 울었던지.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해서 이엘은 저도 모르게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늦게 왔어요. 여기를 제일 먼저 왔어야 했는데.”

“나타니엘.”

“스승님은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이온과 내가 다르지 않다고요.”

“…….”

“어쩌면 스승님은 모리아 사람들과 일반 백성들이 다르지 않다는 걸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버려졌고 잊힌 땅이라 그곳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원하는 만큼 세금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결국 대가 없는 노예처럼 굴려질 뿐이었다.

“꺄악!”

별안간 들려온 비명 소리에 이엘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나무를 향해 달려가던 소년이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그대로 돌진해 노아와 부딪혀 버린 것이다. 뒤로 나동그라진 소년은 비명을 질렀던 제 입을 틀어막으며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사,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쳐다보며 노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주었다. 여전히 겁을 먹은 소년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움찔거렸다.

“다친 데는 없니?”

이엘이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아이는 그녀를 보지도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결국 아이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워 주고 나서야 소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나무 곁으로 가렴.”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소년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몸을 틀어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멈칫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황녀님……?”

이쪽 땅 끝까지 소식이 퍼진 모양이군. 노아가 혀를 차며 한 소리 하자 소년이 다시 움찔했다. 그러더니 주먹을 꾹 쥐며 후드에 가려진 이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황녀님…… 마, 맞으세요?”

“그래, 비밀로 해 줄래?”

후드를 살짝 들었다가 내리며 눈인사를 해 주었다. 아이는 눈에 띌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정말 황녀님이세요?! 정말 저희를 구해 주실 건가요?!”

“구하는 건 내 몫이 아니야. 그건 신께 구해야 하는 거란다.”

“하지만…….”

“하지만 잊지 않을게. 네가 여기 산다는 걸 기억하마.”

“네!”

순수한 아이의 눈빛을 보니 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아이에게 무언가라도 주고 싶어서 품을 뒤적거렸으나 마땅히 줄 게 없었다. 이엘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대신 다른 것을 약속했다.

“갖고 싶은 게 있니?”

“대, 대관식에 가고 싶어요…….”

“대관식?”

“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 같은 사람은 갈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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