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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7화 (237/488)
  • 237화

    *

    기절한 듯 잠만 자던 이엘이 정신을 차린 건 저녁이 넘어서였다. 그것도 노아의 심부름을 받은 앤디가 깨워 준 덕에 겨우 눈꺼풀만 들어 올린 수준이었다.

    “나타니엘 님. 식사는 하고 주무세요.”

    “안 먹을래……. 별로 생각 없어.”

    “안 드시면 노아 님께 제가 혼난다고요.”

    한참이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앤디 때문에 이엘은 귀가 따가웠다. 결국 무겁다 못해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세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눈을 비볐다. 앤디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스푼을 들고 대신 먹여 주기까지 했다.

    “노아는?”

    “업무가 밀려서요. 아마 오늘은 못 오실 것 같은데요.”

    “알겠어.”

    다행이란 소리가 나올 뻔했네. 고개를 주억거리며 앤디가 주는 대로 받아먹던 이엘은 몇 입 먹다가 말고 손을 내저었다.

    “그만 먹을래.”

    “더 드셔야 합니다.”

    “생각 없어.”

    “저 죽어요, 노아 님한테!”

    “다 먹었다고 거짓말하면 되잖아.”

    “그건 안 됩니다.”

    갑자기 들린 음성에 이엘과 앤디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정갈한 옷차림을 하고 문 앞에 서 있는 노아를 쳐다보며 앤디가 이맛살을 구겼다. 쯧쯧, 번개처럼 일을 처리하셨네.

    “앤디. 두고 돌아가라. 내가 할 테니까.”

    그는 겉옷을 전부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두고 셔츠 소매를 접어 걷어 올렸다. 얼쯤얼쯤 일어선 앤디는 들고 있던 트레이를 노아에게 건네주고 조용히 문을 닫고 별저를 나갔다.

    “다 드셔야 합니다.”

    “괜찮은데……. 오늘은 조금…… 쉬면 안 될까요?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잠깐 얼굴 보려고 온 겁니다. 금방 돌아갈 거예요. 오늘은 혼자 자도 되니까 식사는 다 해요.”

    괜히 민망해진 이엘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그가 건네는 식사를 해야만 했다. 조금 남은 것은 치우고 노아는 이엘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려 열을 쟀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열은 없는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온몸이 욱신거려 숨 쉬는 것도 조금 버거웠다. 이엘의 표정을 살핀 노아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효용이 좋은 약이라 해도 역시 무리였나. 조절할 수 있는 만큼 조절했는데도 상대는 인간이었으니까.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며칠만 쉬면 될 거예요.”

    그의 걱정을 눈치챈 이엘이 재빨리 노아의 손을 잡아 변명했다. 좋았던 기억을 괜히 나쁜 기분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제 걱정을 하고 자신에게 맞춰 줬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건 어쩔 수 없이 남은 약간의 후유증 정도였다.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저는 성으로 돌아갈 테니까.”

    “일이 많아요?”

    “조금. 큰일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자요.”

    “로빈은 정신을 차렸나요?”

    그녀의 물음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로빈을 찾아갔지만 역시나 노아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노아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꺼낸 말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첫아이는 늑대 새끼인가.’

    ‘뭐?’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내게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유달리 아이에게 집착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였고 뱀은 번식에 미쳐 버린 종족이었으니까.

    ‘저번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왜 첫아이에 집착하지?’

    ‘그녀의 첫아이는 내 거다.’

    ‘미쳤나?’

    ‘그게 둔이든 인간이든 괘념치 않아. 그건 온전히 내 소유니까.’

    ‘헛소리하는군.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나타니엘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래를 받아들였겠지만, 난 달라.’

    ‘…….’

    ‘그것만큼은 반드시 받아 낼 테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에 소유권을 운운하는 게 몹시 짜증이 났다. 게다가 이엘의 첫아이라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이가 대가예요.’

    ‘예?’

    ‘첫아이를…… 바쳐야만 해요.’

    잘 짜인 각본처럼 조건들이 계속해서 맞물려 가는 게……. 노아는 의문을 달고 자신을 보는 이엘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만일 그녀가 그날 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계속해서 혼자만 떠안고 있었겠지.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네겐 이렇게 힘든 일만 찾아오는 걸까. 너는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인데. 왜 신께선 네게 시련과 시험만 주시는 걸까. 이 시련과 시험을 견디면 네게도 행복이 찾아올까? 그러면 좋을 텐데…….

    내가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이 행복마저 네게 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줄 텐데.

    “로빈이 무슨 말 했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엘.”

    “네. 말씀하세요.”

    “사랑해요.”

    갑작스러운 고백과 함께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제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하고 싶은 말이 고백이었나? 별것 아닌 말인데도 이엘은 얼굴이 새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며칠이 생각난 탓도 있었고.

    “사랑해.”

    “노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저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걸요.”

    “아이도 지킬 겁니다.”

    “…….”

    “시간을 갖고 천천히 준비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으니까.”

    그는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했다. 이엘은 그의 다정한 입맞춤을 받으며 시선을 내려뜨려 제 배를 보았다. 그가 했던 말처럼 언젠가 나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부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이런 곳에 태어난 내 아이는, 과연 행복할까.

    “다시 누워요. 자는 거 보고 나가겠습니다.”

    “아니에요. 먼저 왕성으로 가세요. 배웅하고 싶어요.”

    말을 마친 이엘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온몸은 얼얼하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노아를 배웅해 주고 싶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럽게 보더니 결국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해 세워 주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네에…….”

    삐걱거리는 몸짓에 목소리가 절로 작게 말려 들어갔다. 그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드로가 적절한 타이밍에 불렀군요.”

    “네?”

    “아니에요. 배웅은 침실까지만 받겠습니다. 이제 그만 푹 쉬어요.”

    “노아.”

    “네, 말씀하십시오.”

    “저도요.”

    이엘이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노아가 자신의 이런 웃음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밤마다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

    “저도 사랑해요.”

    거의 반강제로 답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를 안심시켜 주고자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소중하고 보고 싶고 고맙고 그리워요.”

    “…….”

    “떨어지기 싫고 자꾸 생각나는 거 보면 확실하니까.”

    물론 사랑이란 감정을 정확하게 명명하기는 어렵고,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확신할 수는 있다.

    “당신이 내 웃음을 보고 안도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의 눈동자 속에 내가 담기면 안심이 되니까.”

    “…….”

    “사랑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나도 노아를 많이 사랑해요.”

    손을 뻗어 노아의 목 뒤로 제 팔을 걸었다. 끌려오듯 내려온 그의 윗입술을 물었다. 화답하듯 열린 틈 안으로 서로의 것이 뒤엉켰다. 노아에게 그 순간이 얼마나 벅차고 행복했는지, 아마 그녀는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

    이엘이 로빈을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난 후였다. 열기에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더니 감기에 걸려 회복이 더뎠다. 훌쩍이던 콧물이 멎고 나서야 이엘은 별저를 나와 왕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얼굴 보기가 쉽지 않군요.”

    로빈은 정중하게 인사하며 이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다가온 그녀의 손등에 깔끔하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산책하실 수는 있으십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데.”

    “괜찮아요. 좀 걸어요, 그럼.”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완연한 봄이었다. 그녀의 정원엔 꽃이 만개했고, 그녀의 마음엔 행복이 찾아왔다. 비록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행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소소한 행복에 이엘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답게 빛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요? 별일이군요. 또 아이 이야기나 하지 않으면……,”

    “제 작위 이야기입니다.”

    “작위?”

    “새로이 건국하실 곳에 제 작위를 승격해 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 소모라의 반환도 함께.”

    뱀은 제국에서 후작 위에 있었다. 결국 그가 원하는 건 공작이라는 소린데.

    “명예를 원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단순히 소모라 땅 때문인가?”

    “공작의 영지는 황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니까요. 소모라도 황궁과 가깝지요.”

    “…….”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이종족은 작위에 큰 욕심이 없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뱀은 다르다. 그들은 갖은 수단을 사용해 어떻게든 인간의 비위를 맞춰 후작 위까지 올라왔다. 그러니 공작 위에 관심을 두는 건가.

    “공작 위를 약속하신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하겠습니다.”

    “개국공신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게 그 정도는 일도 아닌걸요.”

    제 혀는 언제든 유려하게 꾸려 낼 테니.

    “그저 당신의 발치에 가까이 닿기를.”

    “좋아요. 대신 가시적인 결과물을 가져와야 할 거예요.”

    “물론입니다. 제가 영지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만족하실 만한 결과물을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여자의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언제든 부스러기가 떨어질지 모르니 그걸 받아먹기 위해서라도 떨어져선 안 된다.

    ‘그녀의 명령이면 발을 핥으래도 그렇게 할 것처럼. 먹을 것이 떨어지기만을 갈구하는 모습이, 내게는 아주 잘 보이는구나.’

    ‘그’의 말처럼 되어 버린 제 신세가 딱히 불쌍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끝내 승리는 내 것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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