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5화 (235/488)
  • 235화

    그의 목소리에 이엘은 뱀에게서 완전히 등을 졌다. 그녀의 눈앞에 대열을 이룬 늑대들 사이로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플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없이 쏟아붓는 왕의 말이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네 말 한마디로 이렇게 되었다는 걸…… 이제 잘 알겠다.”

    겨우 말 한마디였다. 그녀의 말처럼 충동질이란 단어는 너무 거창했고, 그저 도미닉의 역심을 건드린 정도였을 뿐인데도. 그게 불씨가 되어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단지 말 한마디였는데, 공들여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내가 완벽히 졌다.”

    그의 성에서 그녀는 자랑스러운 인형에 불과했다. 유일한 암컷이 된 여자는 그의 성공적인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과시용으로도 적합했고, 수집용으로도 적합했다. 알면 알수록 그의 입맛에 잘 짜인 인형이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손발을 잘라 가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 소유할 수 있는 인형 따위가 아니라 사고할 수 있고 의지를 가진 완벽한 인간상. 정말로 손발을 자른다고 해도, 제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인간은 이길 수가 없다.

    “이제 만족할 만한 승리가 되었나?”

    로빈의 물음에 대답하듯 이엘이 드디어 뒤돌았다. 다시금 허리를 접어 내려온 그녀는 차가운 손을 로빈의 이마 위에 얹었다. 뜨거운 열이 감도는 이마 위에 한기가 찾아와 더디지만 점차 식기 시작했다.

    로빈은 제 몸이 불타는 듯한 열감에 사로잡힌 게 부상 탓인지, 그게 아니면 이엘의 손이 닿아서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손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이 미미한 체향이 사고조차 못 하게 마비시켜도, 그녀의 체온이 간절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어?”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로빈은 피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그저 작지만 차가운 그녀의 손바닥에 제 얼굴을 맡기고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이내 그는 무겁게 늘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바닥에 엎드린 자세를 만들었다.

    여전히 이엘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아 있던 터라, 마치 왕의 손끝에 닿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종복의 모습처럼 보였다.

    “당신의 뜻대로.”

    술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알갱이의 효과가 닿지 않아, 은신이 벗겨지지 않았던 뱀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는 뱀들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어 로빈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늑대들 틈에 가로막혀 있던 리플 역시 허망한 눈동자를 한 채 천천히 몸을 굽혔다.

    비단 왕이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뱀들은 그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고 있다. 엄청난 보안을 자랑하는 자신들의 성을 한순간에 박살 내고, 의심 많은 왕의 눈을 가렸다. 저 웃는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간 여자가 솔직히 두려웠다.

    그녀는 황족, 그것도 악랄했던 선황의 딸이다. 왕이 선황의 딸에게 굴복했다는 것은 생각보다 비통하고 참혹한 기분이었다. 로빈은 뱀들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였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무결한 핏줄. 태생이 고귀하고 꼿꼿하여 직계가 아니었어도 모두 그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일이라고 뱀들은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면 됩니까?”

    “내가 물어볼게요.”

    “…….”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엘의 가까이에 있는 로빈만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네 종족의 안위가 달렸다고.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그녀의 몸에 황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출혈 부위가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스라소니 놈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놈의 앞에선 독기나 은신 같은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괜히 전쟁광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유클리드는 전쟁에 특화된 놈이었다. 처음 스라소니 영지를 습격할 땐 반격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그건 내전으로 다 써 버렸다.

    결국 이렇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꼴을 면치 못했다. 그 미친놈이 어깨에 검을 찔러 넣고 후벼 판 덕에 손에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리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 헛웃음이 터졌다.

    로빈은 계속해서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더니 순순한 목소리로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일전에 당신에게 한 말이 있었는데, 기억할지 모르겠군요.”

    “글쎄요.”

    “내가 가진 모든 비열하고 더러운 능력으로 당신의 아이를 지켜 주겠다고 했던 말.”

    “…….”

    “지금도 유효합니다.”

    “…….”

    “첫아이는 내게도 소중할 테니까요.”

    결국 맞교환을 하자는 거군. 어차피 뱀들에게 충성심이나 호의 따위를 바란 건 아니었다. 궁지에 몰아넣어 받아 낸 동맹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불투명했고. 차라리 잘된 편이었다. 로빈은 이엘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혹은 낳아서까지 아이에 집착할 테니. 적당히 수지에 맞는 관계를 유지하는 쪽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이에 관한 화제는 늘 여러 마음을 품게 만들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이엘은 이미 여러 번 죄를 짓고 있었기에. 짧은 침묵 끝에 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날드.”

    “예!”

    “와서 로빈을 등에 태워. 여기 두면 곧 죽을지 모르니.”

    로날드가 무리에서 빠르게 뛰쳐나와 바닥에 허물어지다시피 쓰러져 있던 로빈을 등에 태웠다. 투정 부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든든히 제 몫을 하는 로날드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렇게 늑대가 왕을 태워 가자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불안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마찬가지로 늑대 사이를 헤치고 튀어나온 리플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왜. 내가 네 왕을 인질로 잡아 둘까 봐?”

    “…….”

    “염려 놓아라. 내 행보를 짚어 보면 네 왕을 해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호위 하나 없이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와도 좋아. 다만 너희의 영지는 어찌할는지.”

    소모라는 좋은 땅이었다. 소모라가 주인을 잃었을 때, 그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로빈이 노력했던 것만 봐도. 그러니 그 땅을 수복해야 할 텐데…….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하면 되찾는 건 둘째 치고 이 병력으로는 스라소니에게 속절없이 먹힐 것이다. 그 미친 왕은 앞뒤 재지 않고 피만 보면 눈을 까뒤집으니까. 소모라의 주인이 유클리드일 것이라고 생각한 뱀들은 주춤거리며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됐다. 리플, 남아서 애들을 챙겨.”

    멀리서 들려온 로빈의 냉랭한 목소리에 리플은 주먹을 바르쥐더니 짧게 침음했다. 그는 곧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명령에 응하겠다는 표시를 보였다.

    “걱정 마라. 내겐 네 왕이 필요하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흔흔히 웃는 여자의 얼굴이 제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리플은 반박하지 못한 채 되레 더 공손히 절할 수밖에 없었다. 치욕스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왕을 보내야 했다.

    *

    “감기 걸리십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엘의 어깨 위에 모포를 둘러 준 노아는 들고 있던 따뜻한 찻잔을 건네주었다. 이엘은 그에게서 찻잔을 받아 들고 다시 시선을 돌려 하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늘에선 끊임없이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떨어졌다간 별저 안에 고립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한 양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음에도 날씨는 여전히 궂기만 했다. 마치 누군가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밀로를 떠올리고 계십니까?”

    “……그 생각만 한 건 아니에요.”

    “날이 찹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창문을 닫았다. 노아는 장작을 옮겨 불씨를 키운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엘의 곁으로 다가왔다. 따닥따닥. 장작 타는 소리를 음악 삼아 이엘은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려 모으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물었다.

    “로빈은 괜찮나요?”

    “예. 며칠 쉬면 회복할 거라고 오드가 말하더군요.”

    “제가 너무 잔인했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사감을 없애지 못했거든요.”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노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짙고 아름다운 흑색 눈동자엔 자신의 얼굴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엘은 그 사실에 늘 위안을 얻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뱀을 설득할 방법은 많았고, 다른 형태로 협박해도 충분했으니까.”

    “…….”

    “처음이었거든요. 내 스스로 얻은 존재는, 주드가 처음이었어요.”

    뭐든 처음은 소중한 법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처음 친구가 된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존재라서.

    “나도 모르게 복수를 하고 싶었나 봐요.”

    “엘.”

    “부끄러워요. 너무…… 부끄러웠어요.”

    뱀의 자존심을 깎고 갉아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고 결국 끝끝내 이뤄 냈다. 하지만 찾아온 기분은 생각보다 통쾌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아닙니다. 당신은 그와 다르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

    “알아요. 그냥 제 기분이…… 그랬다고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이, 모순 그 자체라.”

    “필요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놈들은 다른 이종족과 같지 않으니까요. 멸족이 아닌 공존을 원한다면 필요한 단계였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주니 위로가 돼요.”

    그 말을 하면서도 괜히 씁쓸해졌다. 노아의 말처럼 뱀들에겐 온순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꼭 필요한 단계였음을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순간에 든 가장 큰 감정이 복수였다는 게…….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보복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해 놓고, 정작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게 조금 답답했어요. 하소연해서 미안해요, 노아.”

    “언제든 하세요. 당신의 마음이 편할 때까지.”

    그가 너른 품 안에 이엘을 끌어당겼다.

    “완벽한 인간은 없어요, 엘.”

    “…….”

    “완벽한 군주도 없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다정한 입맞춤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니 완벽해질 필요 없습니다.”

    “…….”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십시오. 더 할 필요도 없고요.”

    그러려고 우리가 있는 거니까. 당신의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채우고 싶어서. 노아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이엘은 후련해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이마에 닿아 있던 노아의 뺨을 감싸곤 조금 떨어졌다.

    “추운 것 같아요.”

    “…….”

    “오늘은 별저에 머물러 주세요.”

    종알거리던 작은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조심스럽게 맞물렸다.

    “신께 맹세합니다.”

    입술이 떨어졌지만 그가 말할 때마다 스치듯이 닿아, 어느 순간 함께 뻐끔거리는 꼴이 되었다.

    “당신만을 평생 나의 반려로 맞을 것이며.”

    “…….”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마음은 저렇게 조급한데도 신 앞에 서약을 잊지 않는 걸 지켜보며 이엘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는 땀에 젖은 손을 쥐었다 펴며 갈급함을 억누르고 마지막 말을 이었다.

    “신 앞에 엄숙하고 경건히 맹세합니다.”

    사실 서약은 오드를 증인으로 삼아 진작 치렀다. 그럼에도 그는 불안한 저를 위해 이렇게나 배려하는 것이다. 노아의 뜨거운 입술이 이엘의 동그란 이마 위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우리의 사랑의 크기가 서로 같지 않더라도.”

    “…….”

    “나머지는 제가 채우면 되니까요. 당신은 지금 이대로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입술 위에 성마르게 달려들었다. 허공에 뜬 채 버둥거리는 이엘의 손과는 달리 남자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단번에 겉옷을 뜯어 버릴 듯이 끌러 집어 던졌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 위에 입술을 붙여 한참이나 지분거렸다. 얇은 네글리제 위로 보드라운 살결이 서로에게 느껴졌다.

    “노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습니다.”

    “…….”

    “당신 목소리도 안 들릴지 모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