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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4화 (234/488)
  • 234화

    “당신의 충성을 시험한 것에 불과한데요.”

    “하하, 정말 당신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재치 있으니, 제가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

    “당신은 총을 쥐는 것도 아름답지만, 검을 휘두르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반짝이는군요, 나타니엘.”

    “거래는 성립된 걸로 하죠. 소모라 땅의 값은 동맹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기쁩니다, 나타니엘!”

    더는 헛소리하지 못하게 노아가 유클리드와 이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꺼져. 네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벌써부터 영역표시 중이야?”

    “그녀 앞에서 저급한 표현 쓰지 마라.”

    “상냥한 강아지네.”

    왕의 미친 소리에 스라소니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늑대의 눈치를 봤다. 개체 수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늑대의 전력이 훨씬 뛰어나다. 다만 유클리드 개인의 능력은 저쪽 기사단이 단체로 달려들어도 애먹을 정도니 그나마 인상을 찌푸리는 걸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늑대들을 더 건드렸다가는 유클리드를 제외한 나머지 스라소니들이 대신 몰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입이 말랐다.

    “아무리 상냥한 개라도 깔짝거리는 고양이한테까지 아량을 베풀진 않는다.”

    “오, 그래? 이제 동맹인데 사이좋게 지내자, 좀.”

    “…….”

    유클리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노아는 이엘을 태우기 위해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타십시오. 찾는 것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잠깐. 나타니엘, 찾는 게 있었습니까? 뭔지 말씀하셨으면 제가 찾았을 텐데요.”

    “괜찮아요. 그건 제가 직접 찾아야 의미가 있거든요.”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입가에 덧그려진 미소를 보니 제법 재미있는 일인 듯했다. 유클리드는 만사 다 제쳐 두고 늑대들과 함께 그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이엘이 손을 뻗으며 딱 잘라 거절했다.

    “호의는 소모라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은 제 염치가 허락하지 않아, 받을 수가 없군요.”

    “그저 동행하는 것만으로는……?”

    “늑대들이면 충분합니다. 제겐 무척 상냥하니까요.”

    “아아, 그렇군요.”

    떫은 입맛을 느끼며 유클리드가 순순히 물러났다. 스라소니들은 이때다 싶어 제 왕을 설득하며 무리에서 이탈했다.

    노아의 등 위에 올라탄 이엘은 황량한 땅을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의대로 불필요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이 정도에서 그쳤다. 유클리드는 한번 피를 보면 정신을 놓고 무차별 학살을 가하기로 유명하니까.

    그러니 뱀들은 안팎으로 몰아치는 공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도망친 듯했다. 영지 자체가 좁은 편이 아닌 데다가 은신으로는 충분히 숨을 수 있을 테니 치명적인 전쟁은 아니었을 터였다.

    다만 그 대단한 자존심에 금은 갔으려나.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좀 더 안쪽으로 가도록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아는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그 뒤로 한 무리의 늑대들이 엄청난 속도로 쫓아왔다.

    “살려 두면 후환이 되지 않겠습니까?”

    노아의 말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좋으니까요. 오히려 이대로 두는 게 더 곤란해집니다. 타협이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서 잡아 두는 편이 좋아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노아. 저기 보이는 계곡을 넘어서면 멈춰 주세요.”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광야였다. 소모라로부터 만 하루를 달려 도착한 드넓은 광야에서 늑대들은 행렬을 멈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폐한 땅은 비단 전쟁 때문에 황량해진 게 아닌 듯했다. 애초에 이쪽은 개발도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누군가의 손을 탄 흔적이 전무했다.

    마치 세잔티노 같았다. 버려지고 잊혀서 존재조차 사라진 그 땅을 닮았다.

    “나타니엘 님. 정말 여기 있을까요?”

    앤디가 손바닥을 가로로 세워 눈썹에 대며 땅을 이리저리 살폈다. 작은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과연 찾을 수 있을는지. 의아함을 담은 늑대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이엘은 품에서 작은 조각을 꺼내 들었다.

    “어? 그건…….”

    앤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늑대들이 움찔하며 뒤로 주춤했다. 이엘은 붉은 알갱이 한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눌러 깨뜨렸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알갱이가 깨지더니 모래알처럼 흩어져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파스스― 은신이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수의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엘은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신의 바로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던 리플의 목 위에 검을 갖다 댔다.

    “네 주군을 데려와.”

    “…….”

    “아니면 내가 찾을까?”

    그녀의 조롱에 뱀들의 눈이 모두 희번덕거렸으나 저항하지 못했다. 공습에 부상을 입고 급하게 도망치느라 몸이 성한 개체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게다가 이엘이 깨뜨린 보호석과 비슷한 알갱이 덕에 은신이 벗겨져 공격력까지 떨어졌다. 뱀에겐 상황이 계속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리플은 쓰지 못하는 한쪽 팔을 포기하고 검을 쥔 손으로 무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엘은 가볍게 그의 검을 밀어 내고 다시금 목 위에 검을 댔다. 붉은 피가 새어 나와 그녀의 검을 적셨다.

    “내가 여기서 네 주군을 찾는다면 그것만큼 초라한 일도 없을 텐데.”

    “오헬……!”

    “어때. 기분이 더럽나?”

    “…….”

    “네 눈앞에서 네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내가 빼앗는 게, 서글픈가?”

    네가 내 앞에서 나의 주드를 빼앗아 갔을 때 내가 그러했듯이.

    그렇게 하면 너도 서글플까?

    “네가 그런 감정을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마는.”

    이엘은 그 말을 마치며 잔뜩 굳은 리플을 가볍게 밀어 넘어뜨리고 중앙을 향해 걸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리플에게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활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어깨를 부여잡은 채 앉아 있었다. 초라하게도.

    “다시 만날 거라고 했던 말, 지키려고 왔어.”

    “……대단하군.”

    “네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암컷으로서’ 훌륭한 존재가 아니라서.”

    “…….”

    “로빈. 네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왔어.”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게, 어쩌면 가장 치졸하고 악랄한 복수가 아닐까 싶었다. 이엘은 소리를 지르는 리플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검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 홱―! 소리와 함께 내려온 검은 로빈의 목숨을 거둬 가지 못했다.

    “이런 당신에게도 충성하는 아이들이 있다니.”

    그녀의 검을 온몸으로 가로막은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제 왕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같이 성치 않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쯧, 짧게 혀를 찬 이엘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으며 허리를 숙이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게 왕이란 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인 동시에 부채겠지만.”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로빈이 기침을 하자 피가 터져 나왔다. 뱀들은 그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앓는 소리를 내기 바빴다. 이엘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저를 가로막는 뱀들을 일일이 치워 가며 로빈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 주었다.

    “도미닉은?”

    “죽었다.”

    “아깝게 됐네. 좀 더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네가 충동질했나?”

    “충동질이란 단어는 너무 거창하고. 그냥 내면의 욕구를 끌어냈다고 치자.”

    그녀의 말에도 로빈은 무심한 낯으로 일관했다. 여전히 표정을 잘 감추는 남자였다. 이엘은 다정한 손길로 정성스럽게 피를 닦아 주고는 예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때는 저 미소를 보겠다고 하루 종일 그녀의 비위만 맞춰 주던 때도 있었다. 그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한데, 너는 기어이 날 추락시키는 것에 성공했군. 로빈은 한심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피식 웃더니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스라소니까지 끌어들였나?”

    “그쪽은 끌어들인 게 아니라 알아서 들어왔어.”

    반쯤은 뱀 덕분이기도 하다. 애당초 스라소니는 계획에 없던 종족이었는데 이렇게나 접점을 만들어 준 것은 전적으로 뱀의 영지에서 벌어진 전쟁 탓이니.

    “네가 황위에 오른다는 소문이 돌던데.”

    로빈은 다시 기침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일관된 만큼 그녀도 변함없었다.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엘은 대답 없이 다시 손수건을 들어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렇게 모두에게 선포하기 위해 나를 이용했나?”

    “…….”

    “우리가 너의 적이라는 사실을 공표해, 나의 동맹군까지 와해시키려고?”

    “…….”

    “우리를 몰살하려고? 그 늑대 새끼를 죽였기 때문에?”

    언뜻 그가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주드의 이름은 제 심장을 갈가리 찢어 놓을 만한 화제였으나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이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될 테니까. 과거에 갇힌다는 건 이다지도 안쓰러운 일이었구나.

    이엘은 말없이 그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마.”

    무너졌다. 그간 쌓아 올렸던 모든 게 무너져 버렸다. 로빈은 지금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세 치 혀로 먹이사슬을 깨부순 동맹까지 이뤄 냈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전쟁으로 인간을 학살해 위치까지 역전시켰던 게 자신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바뀐다고? 내가…… 내가 다 잃는다고? 고작 12년인데? 12년밖에 안 지났는데?

    안 돼. 그럴 순 없어.

    “……내게 원하는 걸 말해라, 나타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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