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그 얘기는……,”
“네. 소모라를 완전히 점령했다고요.”
한 종족, 그것도 최상위 포식 계층인 뱀의 영지 일부를 빼앗는 데 겨우 한 달 반이 걸렸다. 물론 상대가 전쟁에 미친 유클리드이긴 하나, 그렇다고 뱀이 전쟁에 소극적인 종족도 아닌데 이토록 빠른 시간에 영지를 빼앗았다는 건 상당한 의의가 있었다.
지금의 뱀이 극도로 예민하고 약해졌다는 방증이다.
“직접 다녀올 겁니까?”
“네. 그러려고 남았으니까요.”
“같이 가겠습니다. 지금은 곁에 하이에나도 없으니까요. 우리가 함께 가겠습니다.”
“오랜만이네요.”
품에서 고개를 뗀 이엘이 노아를 향해 선선한 미소를 지었다.
“늑대와 함께 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주인의 부름을 기다렸을 뿐.”
“있잖아요, 노아. 할 말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지금은 조금 바쁘지만, 뱀의 영지에 다녀오면요.”
무슨 말을 하려고 주저하는지 모르겠다.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모호한 표정을 짓던 이엘이 통통하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며 조금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이 많으니까.”
“…….”
“……당분간 하이에나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서.”
“아.”
“네……. 겨울은 지났지만요…….”
이미 늑대의 번식기가 끝난 계절이었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노아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우논은 상관없어요.”
“그러니까요…….”
부끄러워하며 제 품으로 고개를 파묻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노아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그녀를 둘러업을 뻔했다. 그 대신 숨기지 못할 만큼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더욱더 깊게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웃지 마세요.”
“좋아서 웃는 겁니다.”
제 생애, 이렇게 크게 웃었던 적이 있던가. 노아는 품에 찾아든 소동물 같은 작은 생명에게, 무엇이든 안겨 주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
― 수복에 성공했지만 이대로 멈추면 안 돼요.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높지 않은 단 위에 올라선 금발의 청년은 손으로 열심히 주장하고 있었고 그의 말은 다른 이를 통해 선포됐다.
―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신의 권능에 도전하면 그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전쟁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것을 앗아 갔고,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종족도, 같은 인간도 아니에요.
그의 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 우리 자신, 스스로와 싸워야 합니다. 이 땅은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지켜야 할 곳이에요. 더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나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곳은 사유하는 곳이 아닙니다.
더는 땅을 파괴하지 않기를. 더는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지 않기를. 전쟁의 아픔을 다시 겪지 않도록.
― 그리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종족의 존재를, 그들의 필요성을, 더불어 살아야 함을. 완벽한 균형을 깨뜨린 건 우리 인간이 먼저였으니까요.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우리뿐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가장 어려운 첫 단추였다.
방관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때로는 당연하게 자행했다. 불리할 땐 집단을 방패로 삼아 유리한 위치를 만들었지만, 부끄러운 죄의 값은 집단이라는 존재에게 떠넘겼다.
함께 저지른 죄는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 손에 피만 묻지 않으면 그건 살인이 아니었으며, 내가 든 펜은 검이 아니므로 살상 도구가 될 수 없다. 핑계를 찾으려면 무수히 많았고, 인간이라는 위치는 핑계를 만들어 꾸며 낼 수도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일라이저는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먼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 돌아간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던 제국으로 가자는 게 아닙니다. 처음, 신께서 우리를 만드셨던 그 처음의 모습으로,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어차피 인간은 이종족과 달라서 수명이란 게 존재하고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발전했기를 바라는 욕망. 그러한 것들은 인간에게만 있는 순수한 이기심이었다.
―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종족을 위해, 이 땅을 위해.
“…….”
―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분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황자인 줄 알았던 사람은 황자가 아니라 황녀였다. 그들에게 황녀는 황자의 쌍생아 정도로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존재감도 희미했고 황실 행사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냥 흔한 황녀.
황자가 제국을 재건할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쩌면 자신들을 이 불쌍한 위치에서 건져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할 즈음, 소년은 황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어떠했는가. 제국 역사상 여자가 황제가 된 적은 없었다며 몇 안 되는 원로들조차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고, 차라리 다른 강력한 귀족을 황제로 세우자고 작은 폭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 갈등을 불식시킨 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황녀였다.
‘내가 황실의 적통을 갖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역사상 여자가 황위에 오른 적은……,’
‘어려서 제왕학을 황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헌데 무엇이 문제이지?’
‘…….’
‘또한 내가 황위에 오르는 데, 어찌 그대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가? 대관절 너희가 무엇이기에?’
잃어버렸던 마을을 탈환하는 것에 황녀의 도움이 컸다. 물자를, 지략을, 보호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도에 새로운 물길을 열었고, 죽어 가던 땅에 축복의 나무를 심었다.
제국을 경험하지 않았던 어린 소년, 청년들은 그녀의 존재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에겐 확실한 군주가 필요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 적합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훈계를 늘어놓는 귀족 남자보다, 몇 번이나 전쟁을 경험한 황녀가 더 군주다웠다.
그녀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제국에서 권위를 누렸던 중년 이상의 남자들뿐이었다.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할 힘도 없으면서 무작정 고개를 젓는 것부터 시작했다.
‘너희가 말하는 고리타분한 법에 따르자면 나는 황자의 반지를 갖고 있으니 마땅히 황위에 오를 수 있다. 또한 제국 역사상 여자가 황위에 오른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면, 너희가 살던 그 제국은 이미 망해 사라졌다는 것을 기억하라.’
‘…….’
‘그런데도 원치 않는다고 하면, 글쎄…….’
입가에 가벼운 조소가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나는 이종족의 왕이 되겠지.’
‘…….’
‘나는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것에, 너희가 원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지?’
일라이저는 그녀가 협박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았지만, 원로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협박이 됐다. 그들은 그제야 자세를 고쳐 앉아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이익을 셈했다. 어떤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를 계산하고 결론을 내렸다.
‘르뷔아 황실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씨앗의 뜻을 어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감히 발치에 엎드립니다.’
하이에나가 뿌려 놓은 덫은 효과가 컸다. 입을 타고 퍼지는 말은 뿌리보다 더 과장되고 자극적으로 번져 가는 법이었다. 대륙 끝에서 대륙 끝까지, 황녀를 바라지 않는 자들은 없었다. 유일한 나자르인 오드마저 그녀의 편을 들었으니 더는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그녀는 작은 희망의 불씨였고, 신께서 남겨 놓은 소망이었다.
일라이저는 그날을 떠올렸다.
이곳 역시 모든 준비를 마쳤다.
*
검을 휘두르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뒤따르던 앤디는 새삼 놀랐다. 이엘은 늑대의 영지를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검을 쥘 때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 중심 잡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솔직히 이엘이 제대로 검을 쓰는 모습을 본 건, 지난 영지 습격 때 슈프를 구하고 뒤에서 노아를 공격하려던 밀렵꾼을 베었을 때뿐이었다. 그때도 놀랐다. 어찌나 빠른지, 심지어 노아조차 그녀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검도 총도 제대로 잡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 때문인 건지, 주드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선지. 복합적인 사정으로 다시는 이전의 모습처럼 검을 쥘 수 없을 거라고 단정했는데.
“주저함이 없으시네요, 나타니엘 님.”
“주저하면 그대들이 죽을 테니까.”
추풍낙엽처럼 속절없이 쓰러지는 뱀들을 힐끗 쳐다보며 앤디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완벽한 자세는 황실 검술의 정석이었다. 과연 루시우스 러셀의 수제자답다고 생각했다. 뒤처리까지 깔끔한 것에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레이디. 아, 이게 아니지요. 아름다운 왕이시여, 기한만 넉넉했더라면 뱀의 땅을 통째로 드렸을 텐데. 조금 아쉽군요.”
“땅덩어리를 바란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향한 저의 애정의 크기를 바라셨습니까?”
또 헛소리한다. 앤디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다수의 늑대가 경악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유클리드를 비웃었다. 이 정도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