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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2화 (232/488)
  • 232화

    “…….”

    “당신을 따르겠다고.”

    다시 한 번 믿어 보겠다고. 인간을, 다시 한 번 사랑해 보겠노라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

    “이미 이 안의 절반 정도가 당신의 손을 기다립니다.”

    이 작은 손이 저희들을 구원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당신의 날개가 될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타니엘 님.”

    이엘은 그 말에 모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

    늑대들의 영지는 제법 추운 편이었고, 이따금 초봄인데도 눈이 내릴 때가 있었다. 작년엔 겨울을 이곳에서 오롯이 보냈음에도 그다지 춥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누군가 날씨를 조절해 기온을 높여 주었던 모양이다.

    이엘은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을 바라보며 밀로를 떠올리는 동시에, 그와 티격태격 싸우던 작은 소년도 함께 추억했다. 눈을 참 좋아했는데.

    “나와요, 폐하!”

    “맞아! 나와서 같이 놀자……요!”

    아직도 늑대들은 그녀를 하이에나의 왕으로 공대하는 것이 적응되지 않는 듯했지만 지난 한 달이 가져다준 변화도 있었다.

    “하논, 뭐 해?! 빨리 나와!”

    “나는 눈이 싫단 말이야.”

    “겁쟁이 하이에나들.”

    “우리 겁쟁이 아니야!”

    자존심에 금이 간 하논을 비롯한 하이에나들 몇 마리가 성큼성큼 눈 덮인 뜰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늑대들은 바닥에 쌓인 눈을 발로 파헤쳐 공격을 퍼부었다. 하이에나들도 질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능력을 사용해 눈덩이를 불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이엘의 입가에 웃음꽃이 폈다.

    “내일이면 모두 돌아가겠네.”

    “응.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잘 끝나서 다행이야.”

    이엘은 오드의 말에 대꾸해 주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말처럼 이렇게 길었던 종족회의는 2차 전쟁 직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이에나는 어떻게 하기로 했니?”

    “먼저 돌아가기로 했어.”

    “셋째 왕자님도?”

    “응. 오히려 패티스를 설득하더라고.”

    이엘은 늑대의 영지에 남기로 했다. 당연히 하이에나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의외로 피시는 그들을 제지하며 알겠다고 답했다. 피시의 속을 모르는 건 패티스와 하트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크게 치뜨고 피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단념했다.

    이곳에 온 뒤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시와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하이에나의 영지에선 제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곳에선 뭘 하는 건지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웠다.

    피시가 이전과 다르게 자신을 광적으로 따르지 않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이엘은 여전히 그에게서 미미하게 느껴지는 슬픔이 마음에 걸렸다. 억지로 꾸며 낸 듯한 밝음이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잘 끝났다니 다행이야. 긴 시간 동안 고생했어, 나의 엘.”

    “너도. 늘 나 때문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해. 자리가 잡히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야. 그때까지만 참아 줘, 오드.”

    “기분이 묘하네.”

    “뭐가?”

    “네가 참 든든해 보여.”

    “…….”

    “마치 죽을 뻔했던 어린 시절, 너와 이온이 나를 숨겨 줬던 그때가 떠올라.”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린 걸로도 모자라 질투에 눈이 멀어 일족을 전부 죽였다.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니 마땅한 대우를 했어야 하는데도, 인간들은 오드의 종족을 인간과 이종족 사이쯤으로 치부해 죽이는 것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오드의 종족은 그저 죽어도 되는, 쓸모를 다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안심해, 오드. 누구도 널 박대하지 못해.”

    새벽이면 영지를 나가 인간 마을로 향했다. 곳곳에서 벌어진 잦은 전투에 폐허가 된 곳이라도 오드의 손길이 닿으면 축복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인간들은 모였고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인간들은 조금씩 조금씩 신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드의 성력을 경험하며 잃어버렸던 신앙심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절망에서 만난 오드와 이엘을, 맹목적으로 기다리며 소망했다. 그들에게 오드는 신의 음성을 전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더 이상 오드를 천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일은, 자신의 생애 결단코 없으리라. 이엘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엘. 나보단 네가 우선이야.”

    “난 어느 때보다 행복해.”

    “…….”

    “바라는 것을 이루었는걸.”

    “…….”

    “이제 날 때리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

    그 자리는 그런 자리.

    “사랑받지 못해서 전전긍긍할 이유도 없지.”

    외롭고 쓸쓸한데도 혼자서 버텨야 하는 자리.

    “모두가 내 말을 듣게 됐잖아.”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자리.

    “난 괜찮아, 오드. 정말로.”

    “…….”

    “행복해.”

    행복이 조금 멀어진 자리. 그 자리가 머지않았다.

    *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종족회의는 몇 차례나 이어졌고 그때마다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나 결국 마지막 회의는 만장일치로 끝이 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존재감은 더 뚜렷해졌고, 오랜 시간 암컷 없이 살았던 이종족에게 그 체향은 모든 사고를 멎게 만들 정도로 독했을 테니. 체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나마 갖고 있던 이성마저 마비돼, 종내에는 반대를 돌이켜 본능에 순응했다.

    황족을 향한 혐오가 호기심으로, 호기심이 관심으로, 관심이 호감으로, 호감이 애욕으로.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이엘은 이런 상황을 두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저 씁쓸했다. 오드에게 말했듯 모든 게 제 뜻대로 되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나타니엘.”

    펑펑 내리는 눈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의 곁으로 노아가 다가왔다.

    “추운데 들어가십시오. 감기 걸립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하이에나와 함께 떠나고 싶었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회의가 끝이 났으니 모든 종족이 제 터전으로 돌아갔고,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그녀의 즉위를, 제국의 재건을 모두가 받아들였으나 각각의 이유는 다 달랐다. 누구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또 누군가는 책임을 내려놓기 위해, 또 누군가는 본능에 순종하여. 이유는 달랐으나 선택은 동일했다.

    마지막으로 하이에나까지 떠나보낸 뒤에야 늑대의 영지가 고요해졌다. 그저 눈이 소복이 쌓이는 소리만 들렸다.

    “마음이 헛헛하시군요.”

    “그냥 좀…… 네, 맞아요. 싱숭생숭한 기분이에요.”

    “혼자 짊어질 필요 없습니다.”

    노아는 차갑게 언 그녀의 손을 가져가 제 손으로 감싸 주었다. 평소엔 이엘보다 노아의 체온이 더 낮았는데, 미리 데우고 나온 모양인지 뜨끈한 온도가 느껴졌다.

    “그러기 위해 저희가 있는 겁니다.”

    “…….”

    “당신의 근위대가 되겠다는 건, 허울뿐인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제 근위대는 말고요.”

    “…….”

    “황실을 위해, 제국을 위해 검을 들어 주세요.”

    결국 그 황실도, 제국도 네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것 기억하시죠? 지켜 주세요.”

    “나타니엘.”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미래를 위해. 종족의 안위를 위해서,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다면 그건 내 종족에게 맡기겠습니다.”

    “…….”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을 끌어내려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게 네 어깨를 그렇게나 짓누르고 있구나.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는 책임감이 부담으로 전이돼, 스스로의 행복마저 억누르는 건 아닐까. 내가 네 세계를 빼앗아 땅속으로 몸을 숨겨야 했던 그때처럼, 너는 계속해서 혼자서 고독하게 해결하려는 건 아닐까.

    “나도 당신과 함께 끌려 내려가겠습니다.”

    “노아!”

    “엘. 내 말을 들어 주세요. 내가 당신의 말을 들어 주는 것처럼.”

    “하지만…….”

    “당신은 내 주군이기 전에, 나의 반려입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한기에 얼어붙은 이엘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늑대는 단 하나의 반려만을 품는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

    “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잃고 목숨을 끊었듯이, 나 역시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건 안 돼요. 노아는 검을 들고……,”

    “검을 들고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약속해요.”

    그의 고집을 더는 꺾을 수 없었다. 이엘은 아랫입술을 당겨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제 뺨을 감싼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언제나…… 언제나 고마웠어요. 땅 위로 올라와 만난 게 늑대라서 다행이에요. 노아를 만난 것에 정말 감사해요. 신께 감사하고, 주드에게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노아.”

    “나야말로. 당신이 살아 줘서 감사합니다.”

    노아는 자신의 두꺼운 망토를 풀어 이엘의 어깨 위에 둘렀고 그 상태로 잡아당겨 그녀를 제 품에 그러안았다. 달달 떨고 있던 이엘의 몸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다.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있게, 당신의 일을 도울 수 있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의 다정한 입맞춤이 쉴 새 없이 얼굴 곳곳에 쏟아졌다. 어느새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장난을 머금은 입술에 웃음이 터졌다. 본체화를 한 것도 아닌데 커다란 늑대가 혀로 핥아 대며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제 기분을 맞춰 주고 있었다.

    노아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은 선황과 달라요.”

    “…….”

    “노력하지 않아도, 있는 그 자체로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인걸요.”

    “신께서 사랑하신 인간이 처음부터 추악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

    “당신이 더는 선황의 그림자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이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아버지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 지독한 사람은 생전 자신에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건만, 죽어서는 왜 저를 이토록 놔주지 않는 건지. 도망치고 싶어도 번번이 잡히는 악몽에 숨이 막혔다.

    짧게 한숨을 쉬는 그 작은 입술을 노아가 이로 살짝 물어 당겨 시선을 빼앗았다.

    “당신은 그냥 당신입니다, 엘.”

    “…….”

    “나는 그 모습을 사랑하니까요.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한기가 맴도는데도 맞닿은 체온에 열기가 홧홧했다. 짧게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입술이, 이번엔 조금 길게 맞물렸다. 노아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목 뒤를 받쳐 밀리지 않게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붙었던 입술이 조금만 떨어져도 사랑한다는 다정한 고백을 쏟아 냈다. 그러다가도 곧장 들러붙어 혼을 쏙 빼놓듯 입 안을 헤집어 놓았다. 그의 높은 콧대가 이엘의 뺨 위에 뭉그러질 정도로 진득하게 사랑을 표현했다. 노아는 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고백의 표현을 한 셈이었다.

    가쁜 숨에 벅찬 이엘이 조금 밀어 내고 나서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도 막을 내렸다. 노아는 아쉬운 듯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졌다. 자신을 바짝 끌어안은 단단한 팔에 기대며 이엘은 밭은 숨을 숨기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유클리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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