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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1화 (231/488)
  • 231화

    *

    “설마 제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걸까요?”

    “눈치는 있으셔서 다행이에요.”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이 정도쯤이야.”

    “네. 그렇다면 칭찬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당신이 하는 말은 제겐 모두 칭찬입니다, 나타니엘.”

    단란한 티타임을 기다렸는데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 모든 걸 망쳤다. 이엘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며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그녀와 유클리드가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맞은편에 앉은 르네는 여전히 우아한 태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독수리의 왕께선 아무 말씀도 없는 걸 보니 지루하신가 봅니다. 하실 말씀이 더 없다면 먼저 들어가세요.”

    웃기지도 않는다. 끼어든 게 누군데, 누굴 쫓아내? 이엘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유클리드를 노려보다가 재빨리 르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물론 대외적으로 유클리드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 좋아서 그를 이용하고 있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에서까지 그와 둘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르네는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럼 편히 쉬고 싶으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무렴요. 편히 쉬십시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라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만 돌아갈까요, 나타니엘.”

    “네?”

    “끝까지 당신을 에스코트하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정중하고 부드러운 재촉에 이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 유클리드를 쳐다보고 예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유클리드 님.”

    “이런.”

    “저희는 화친을 맺은 동맹이다 보니, 할 얘기가 조금 남아서요. 그럼.”

    그러기에 내가 먼저 동맹 제안을 했을 때 수긍했다면 얼마나 좋아. 뭐,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앞으로 당신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리는 없을 테고. 이엘은 유클리드의 콧대를 한껏 비웃으며 르네와 함께 등을 돌렸다.

    “어떻게 하면 제 제안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드륵, 의자가 풀밭에 긁히는 소리와 함께 유클리드가 이엘을 불러 세웠다. 르네는 무시하고 가자는 듯 고개를 흔들었으나 이엘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그렸다.

    “소모라를 제게 주시겠어요?”

    “…….”

    “정확히는 소모라 동쪽, 북동부.”

    “…….”

    “그렇다면 고려를 해 볼게요.”

    귀에 익은 지명에 르네와 유클리드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물론 혼인 동맹은 아닙니다. 단순한 동맹이라도 괜찮으시다면요.”

    “…….”

    “제가 유클리드 님께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선택권은 제게 없다는 말씀 말인가요?”

    “네, 기억하시는군요.”

    유클리드가 그때를 떠올리며 짧게 혀를 찼다. 그러나 곧 이채를 띤 종족 특유의 눈빛으로 야살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소모라를 바치면, 제가 당신의 선택에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 마음에 든다면, 뭐. 나쁘진 않겠네요.”

    “…….”

    “유클리드 님 말씀대로, 당신이 정말 능력이 출중하다면 그쯤은 가볍게 주실 거라고 믿어요.”

    소모라. 지금은 사라진 과거 소모라 공작가의 영지를 이르는 지명이었다. 전쟁 이후 주인을 잃은 그 땅은 지금 두 종족이 찢어 가진 상태였다.

    “르네. 북동부를 가려면 작전상 내가 네 영지 일부를 통과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그녀가 원한다면, 기꺼이.”

    한쪽은 독수리의 것이 되었고.

    “좋습니다. 저번처럼 당신의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충분히 잡아다 바치지요.”

    “아, 불필요한 살생은 원치 않아요. 그냥 소모라 땅만 주세요.”

    “아쉽네요. 그렇지 않아도 보복할 기회만을 기다렸는데.”

    “…….”

    “뭐, 알겠습니다. 그럼 땅만 고이 갖다 바치겠습니다, 나의 레이디.”

    북동부 쪽은 뱀의 것이 되었다.

    “승전을 위해 가벼운 키스를.”

    지척으로 다가온 그가 시원스레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와 그녀의 손에서 장갑을 벗겼다. 이엘이 딱히 거절하지 않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꾹 찍고 떨어졌다.

    “승전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이 장갑은 손수건 대신으로 받겠습니다.”

    “…….”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실 듯하니.”

    호쾌하게 웃은 유클리드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바로. 이엘은 유클리드의 추진력에 감탄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몰라, 텅 빈 티 테이블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엔 무슨 말입니까?”

    낮게 깔린 르네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서둘러 그를 바라본 이엘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의도 없이 죄송해요. 소모라는 르네 님의 땅이기도 한데……. 아무리 북동부가 로빈의 땅이라고는 해도 르네 님의 영지가 맞닿았으니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아니, 그것 말고요.”

    “네?”

    “혼인 동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그녀의 짤막한 신음 소리에 르네의 미간이 조금씩 구겨져 갔다. 스라소니에게 정보를 전하고, 유클리드와 함께 노아의 영지로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르네는 그녀가 단순히 그를 이용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저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까?”

    “제가 먼저 동맹을 제안했고, 유클리드는 거절했어요. 후에 찾아와서는 혼인 동맹을 맺자고 다시 제안을 했지만 지금까지 거절하는 중이고요. 당연히 앞으로도 그럴 마음 없어요.”

    “놈은 위험합니다. 정상적인 사고나 가치관이 통하지 않는 놈입니다.”

    “알고 있어요.”

    “알맹이가 없어 보여도 지금껏 굳건하게 무리를 이끌고 있는 노련한 자입니다. 놈이 진심이라면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충고 감사해요. 그럴게요.”

    혼인 동맹이라니. 단순히 가볍게 던진 제안처럼 보이나 상대는 유클리드다. 오랜 시간 백작 위와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암컷을 곁에 둔 적이 없다. 그저 단순히 그녀가 유일한 여자이기에 추근거리는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역시 진심으로 그를 대하는 게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소모라에 관한 부분은 다시 한 번 사과할게요.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

    “그 땅도 당신의 땅이니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유클리드가 장갑을 가져간 덕분에 맨손이 된 이엘의 손을 르네가 조심스레 잡고 정원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입구 쪽을 향할수록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져, 이엘은 힐끔 그들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로빈은 습격과 내전으로 피해가 클 테니 유클리드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어렵겠죠. 물론 뱀들은 식량과 물자가 넘쳐 나기 때문에 꽤 길게 버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스라소니의 승리로 끝날 거예요.”

    “소모라 땅이 필요하셨던 겁니까?”

    “아니요. 유클리드를 보낼 핑계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지금 다른 종족들은 유클리드와 저의 관계가 궁금하고 의아스러울 겁니다. 제 동맹은 늑대인데 스라소니는 늑대와 동맹을 맺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유클리드가 지금처럼 제게 붙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의심만 품고 다가오지는 못할 겁니다.”

    “유클리드를 떠나보내고 다른 자들과 접선하시려는 뜻이었습니까?”

    “맞아요. 안쪽 사정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 유클리드는 제 말에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 남자라면 여기를 떠나면서도 나와 관련한 이야기, 혹은 소모라 땅과 뱀의 이야기를 떠벌릴지 모르죠. 그의 가볍고 오만한 입술은 이런 데에 도움이 돼요.”

    아마 유클리드는 그녀의 속내를 반은 알고, 반은 몰랐을 것이다. 반쯤은 알면서 이엘에게 휘둘려 주었고, 또 반쯤은 모르는 채 휘둘린 거겠지.

    르네는 걸음을 멈추곤 이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등을 따뜻한 제 손바닥으로 감쌌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작고 마른 손이 자신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렸다.

    “나타니엘.”

    “네?”

    “나의 종족이 결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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