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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30화 (230/488)

230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자상이 남았던 목덜미까지 잘근거렸으니……. 커다란 손으로 상처를 가린 그녀의 목을 쓸었다. 노아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엘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피하지 않을게요. 피할 이유도 없고요.”

“엘.”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같은 마음이었는걸요. 오히려 저보다 더 염려해 주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할 정도예요.”

볼에 그려진 발그스름한 홍조가 더욱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노아는 당장 입술을 찍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그녀와 함께 성전으로 향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종족회의 중이라 할지라도 왕의 허가 없이 성지에 침입하는 것은 금기였다. 다만 오랜만에 오드가 돌아왔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고자 동맹족 몇몇은 노아의 허락하에 들어와 있던 터였다.

“폐하. 평안한 밤 되셨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다가온 패티스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이엘이 하이에나의 왕으로 왔기 때문에 패티스와 하트도 아침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이엘은 패티스와 하트의 뒤를 힐끔거리며 피시를 찾았다.

“피시는 오지 않은 건가?”

“형님은 아침잠이 많으니까요. 아직 침대에 누워 있나 봅니다.”

“어제 연회에도 오지 않았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조금 우울한 게 아닐까요?”

“우울하다니?”

“폐하를 빼앗겼단 생각에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요.”

저희처럼. 덧붙여진 그의 말을 들으며 이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하이에나들이 멀찍이 서서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 못한 채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신경 써 주지 못한 게 떠올라, 이엘은 테르 중 하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의 앞으로 성큼성큼 뛰어온 테르가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를 치댔다.

“하논. 잠은 잘 잤니?”

“네, 폐하. 잘 잤어요!”

하논은 그 이후로 기다렸다는 듯이 하고 싶었던 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목소리를 들으니 하논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별저에서 피터와 함께 빨래를 널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하이에나 때문에 곤란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잔뜩 경계했던 테르가 이렇게 온순할 줄 전혀 몰랐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피터 생각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피터는 일라이저와 함께 인간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다행이에요.’

‘지키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요. 노아 잘못이 아닌걸요. 다 제가 부주의했던 탓이고, 모자란 탓이에요.’

‘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 탓도 아닙니다.’

노아의 위로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피터가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로빈에게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들키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피터가 인질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소년이 손발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말도 못 하는 아이에게 또다시 상실의 아픔을 갖게 만들었다.

주드를 잃고, 모두를 잃는 악몽을 꾼 이후로 이엘은 누군가를 더 잃기 싫어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신이 모두에게 정을 떼면 좋았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저버리자니 자신 때문에 죽어 간 이온을 뒤로할 수도 없었다.

모두를 지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시작했지만, 역시 마음이 아픈 것마저 무뎌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논. 가서 예배드리고 나중에 보자.”

“폐하. 오후엔 저희랑 같이 나가면 안 돼요? 패티스 님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서 너무 심심하단 말이에요.”

“그래, 그러자. 이 근방에 절경이 있거든. 그곳에 같이……,”

“오헬! 그럼 우리는?!”

그녀의 말을 끊은 로날드와 새끼 늑대들이 잔뜩 성이 난 채 다가왔다. 안 그래도 새끼들은 그녀가 귀환했음에도 자신들을 찾지 않은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볼을 가득 부풀린 늑대들의 등장에 이엘은 중간에 껴서 난처함을 느꼈다. 유순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날을 세운 하논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구는 탓에 늑대들도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거린 것이다.

“감히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 버릇이 없군.”

“냄새나는 하이에나 따위가 근처에 있는 것보다 낫지.”

“그러는 개 냄새는 좋은 줄 아나?”

“네 썩은 내보다는 나을걸.”

유치하기 짝이 없는 두 새끼들의 신경전에 이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한참 설전을 벌이던 하이에나와 늑대들이 이제 답을 달라는 듯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맑은 눈동자들을 바라보던 이엘이 마지못해 입술을 떼려던 차였다.

“미안하지만 그녀는 오후에 나와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다.”

뒤에서 다가온 르네가 짧게 일갈하며 그녀를 향해 동의를 구했다. 난감했던 이엘은 테르들을 향해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생각해 보니 선약이 있었네. 산책은 나중에 나가자, 하논. 그리고 로니. 너희도 나중에 같이 가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돼. 알았지?”

“싫어! 내가 왜 하이에나랑……!”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싸우지 않을게요.”

투정을 부리려던 로날드와 상반되게 하논은 어른인 체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덕분에 늑대들은 자존심까지 상해서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툴툴거렸다. 이엘은 허리를 숙이고 내려와 로날드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로니. 미안해, 정말.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어. 서운했지?”

“우린 오헬만 기다렸는데……. 너는 우리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

“그럴 리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영지에 왔는데도 우릴 안 찾아왔어? 우리는…… 우리는 이제 네 허락이 없으면 네게 가까이 가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토록 기다렸는데 하이에나의 왕이 되어서 돌아왔다. 분명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하이에나를 택했다는 것에 속상하고 서운했다. 그런 새끼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엘은 미안함에 테르들을 하나하나 끌어안아 주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나도 너희가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그럼. 너희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데.”

그 한마디에 서운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사실 테르들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아비들의 경고에 이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쁘기 때문에 칭얼대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꾹 눌러 참았는데 하이에나에게 다정한 그녀의 모습을 목격하니 억눌렀던 서운함이 폭발했던 것이다.

결국 로날드를 비롯한 새끼 늑대들은 이엘에게 약속을 확실히 받아 내고 나서야 물러났다.

“아이들은 감정에 솔직하니까.”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준 그가 한참 만에 운을 뗐다.

“그게 부러운 날도 오는군.”

오랜만에 마주한 독수리의 왕은 변함없이 단정하고 우직한 모습이었다. 그는 계속 잡고 있던 그녀의 손등 위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나타니엘. 이렇게 무탈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요.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조금 전에 말한 티타임은 진심입니다. 저와 함께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르네 님의 영지에서 즐겼던 다과회가 그리웠거든요.”

“저를 불편해하시기에 좋지 않은 추억으로 기억될 줄 알았습니다.”

그의 말에 이엘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르네 님과 함께 한 기억 중에 좋지 않은 추억은 없어요.”

“…….”

“매번 소중하고 감사했던걸요.”

그녀가 소리를 내어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 주위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르네는 그 온기가 다른 이에게 퍼지는 게 싫어, 잡고 있던 이엘의 손에 약한 힘을 줘 시선을 제게 고정시켰다.

“제겐 당신의 존재가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

“살아 줘서 고맙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당신의 손에 죽어 갔던 내가 다시 살아났음에 감사한 걸까.

아니면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무의식중에 발현된 당신의 본능이 내게 경고하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이엘은 르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벅찼고, 벅찬 만큼 아팠다.

*

“내 후원을 망가뜨릴 생각인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피시는 개의치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땅을 향해 능력을 썼다.

빠드드득― 지반이 억지로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폭탄이 폭발할 때와 같은 굉음이 들리며 토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나 순식간에 밀려들어 온 엄청난 얼음이 끝도 없이 솟아오르는 토사를 얼려 재난을 막았다.

“미쳤나? 후원으로도 모자라 내 성까지 박살 내려고? 아무리 네가 미쳤다지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작작하고 네 방으로 꺼져.”

“…….”

“왕자.”

“당신은 좋겠네요.”

“뭐?”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었는데.”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하이에나가 늑대처럼 되길 바란다니. 조이나가 들으면 경을 칠 일이다. 그 생각에 실소하던 피시가 고개를 돌려 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도 내가 미친 것 같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제정신 같아 보이진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바라보던 피시의 시선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과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푸념을 늘어놓는 셋째 왕자를 무정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에 봤을 때보다 확실히 성장했지만 자신의 세계에 갇혀 현실 감각 없이 사는 건 여전했다.

“엘을 처음 만난 게 당신이 아니라 나였다면 어땠을까.”

“뭐?”

“내가 당신만큼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

“내게…….”

내게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차마 나오지 못한 마지막 말은 입 안에서 증발했다. 스스로의 약함을 이 남자 앞에서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종족 중에 그 정도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이토록 나약한 자신이 싫었다. 이런 파괴적인 힘을 가졌으면서 통제할 줄 몰라서 쓰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피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지가 비관적이라 숨이 막혔다.

꽃밭.

그래, 언젠가 패티스가 내 머릿속을 꽃밭이라고 비꼬기도 했지. 그 말이 맞다. 자신의 머릿속은 온통 꽃밭이라 그저 영지 안에서 그녀와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온실 속에 피어난 화초였음을 그녀를 만난 후에야 깨달았다.

“설령 나타니엘이 너를 먼저 만났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

“그녀가 너를 먼저 만났다고 해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노아는 셋째 왕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 파괴적인 행동은 결국 스스로를 절벽으로 몰아갈 뿐이다. 이전부터 피시가 이엘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아픈 소년의 자멸을 바라는 건 아니다.

“네 동기는 뭐지?”

“…….”

“네가 숨 쉬고 살아가는 동기. 그리고 네가 능력을 쓰고 싶은 동기가 뭐냐고.”

노아는 솟아올랐던 토사를 다시 땅 아래로 집어넣어 복구시킨 뒤, 자신의 앞에 빠른 속도로 얼음 장벽을 두텁게 세우기 시작했다.

“공격해라.”

“무슨…….”

“나를 나타니엘을 죽인 원수라고 생각하고.”

“…….”

“공격해.”

무엇보다 피시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이엘은 영원히 저 소년에게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녀를 위해서 소년은 더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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