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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9화 (229/488)
  • 229화

    “…….”

    “……농담이에요. 저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누가 봐도 이엘의 얼굴엔 씁쓸함이 물들어 있었다. 사실은 아이를 갖고 싶은 거구나. 노아는 안쓰러운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붙였다. 도톰했던 입술 문이 열리자마자 그가 안으로 침입했다.

    “아이를 갖고 싶었습니까?”

    노아의 물음에 그녀가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죄책감 때문일까? 이엘의 눈꼬리에 달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는 반대쪽 눈꼬리에 입술을 묻고 맺힌 눈물방울을 핥아 먹었다.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주저하던 이엘의 손이 노아의 옷깃에 닿았다.

    그의 크라바트를 풀었다. 동시에 노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나도 완전한 진심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입 안 곳곳을 헤집어 놓는 사이, 이엘은 제 몸이 소파 뒤로 넘어가는 걸 느꼈다. 소파 위에 깔린 모포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기도 전에 성마른 입술이 다시 찾아들었다. 숨을 쉬는 것마저 벅찰 정도로 전에 없이 거센 키스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를 원치 않겠습니까.”

    “아……!”

    그건 이종족의 첫 번째 본능이자 욕구였다. 그저 그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목 끝까지 채워 뒀던 단추가 하나둘 풀리며 그 위에 잇자국이 천천히 아로새겨졌다. 잘근잘근 짓씹히는 피부에 이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두꺼운 모포들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맞붙은 열기에 침실 안은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린 살에 입술을 지분거리던 노아는 힐끗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까 마신 와인 때문인지 발갛게 상기된 채 눈을 질끈 감고 가쁜 숨을 터뜨리는 게 벅찰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제 아래가 불룩 솟아오른 것을 느끼며 조금 더 그녀에게 밀착했을 때였다.

    “……다만 네가 아픈 건 싫으니까.”

    쇄골 언저리 깊은 곳에 입술을 묻었다가 뗀 노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몸을 내려보았다. 이전에도 보았던 길고 깊은 검 자국이 가슴 위에 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풀었던 단추를 채워 주고 그저 그녀의 턱 끝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위로했다.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네?”

    “피임약 외에도 제가 복용해야 하는 약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이종족과 인간의 관계는 한쪽의 일방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쪽으로 끝이 날 수 있다. 힘으로나 생체적으로나 월등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이 함께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한쪽에겐 무차별적인 폭력과도 같은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힘을 억누르고 생체 조건을 낮추는 약을 복용해야 했다. 그것 말고도 한번 시작하면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터라, 사전에 상당한 준비를 요했다. 또 아무리 그녀의 상황이 이렇다 해도…… 노아는 자신이 피임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정염을 억누르며 이엘의 뺨부터 입술까지 자잘한 입맞춤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요……. 놀라지 않았어요.”

    그렇다기엔 들썩이는 숨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지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엘이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노아도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입을 맞췄다가 뗐다.

    “이건 지난밤 끝내지 못했던 마무리입니다.”

    “네…….”

    함께 춤을 췄던 그 밤에 입술을 막으며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엘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노아가 피식 웃으며 단번에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려 욕실로 향했다.

    “우선 씻으십시오. 여독이 덜 풀렸을 테니.”

    “네에…….”

    이엘은 작은 목소리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노아는 얕은 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아 주고 나갔다. 이엘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진 채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 사이에 얼굴을 숨겼다.

    그가 이종족이었음을 잠시 잊고 있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나. 차라리 우리 영지에 남아 있는 편이 나았을까. 그런 씁쓸한 생각을 하며 피시가 눈을 느릿느릿 깜빡였다.

    세 쌍둥이 모두 이엘과 함께 늑대의 영지에 왔지만, 회의와 연회에 참석한 건 패티스뿐이었다. 회의는 타의였지만 연회는 피시 본인의 의지로 참석하지 않았다.

    창밖 너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연회장을 멀거니 쳐다보던 피시의 곁으로 하트가 다가왔다. 그는 연회장에서 가져온 도수가 낮은 와인을 그의 형제에게 건넸다. 그러나 피시는 창틀에 기댄 채 잔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기만 할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안 마실 거야?”

    “응. 취하면 곧장 달려갈지도 모르니까…….”

    목적어를 빼먹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으로 잘 견디고 있었다. 하트는 피시의 몫까지 가져가 들이켜며 조용히 소식을 전해 주었다.

    “파티는 거의 끝나 간다.”

    “응.”

    “왕은 침실로 돌아간 모양이고.”

    “피곤하겠다―”

    말꼬리를 늘리며 피시가 맥없이 웃었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늑대의 영지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들이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늑대들에겐 이방인이 맞겠지만, 이엘에게조차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아서 피시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하이에나가 기운이 없었다.

    성장을 했고,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언젠가는 노아처럼, 아니. 그보다 더 괜찮은 남자로 성장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피시는 여전히 그의 앞에 서면 기가 죽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돼서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그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벌어진 거리를 단번에 좁혀 온다.

    “하트. 어떻게 하면 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 말고…….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무능 그 자체라서 방법을 모르겠어.”

    씁쓸하게 미소 짓는 동생을 바라보며 하트는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

    제게 수련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이엘이 총을 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피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통제가 안 되는 제 능력을 두려워했고, 억누르며 방치해 왔다. 급변하는 성장기를 맞으면서도 능력 한 번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과한 보호가 필요한 성장을 막아 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꼭 필요한 때에 반드시 성공했어야 할 능력은, 종족의 멸망을 가져오는 불씨가 됐다. 그로 인한 죄책감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처로 남은 것은 당연했다.

    “모든 사람이 쓸모 있지 않고, 쓸모없다고 해서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트는 어려운 말만 해. 그렇게 대꾸하며 피시가 엷은 웃음을 터뜨리곤 창틀에 팔을 올려 얼굴을 포갰다. 초대받았음에도 그는 저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왜 패티스가 영지에서 그토록 자신을 닦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넓은 세계로 나오면 자신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니까. 레온의 말처럼 이엘의 곁엔 같은 곳을 바라볼 파트너가 차고 넘쳤다.

    “나는……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거야.”

    아득한 한숨을 쉬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 일찍 예배를 위해 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노아와 마주쳤다. 그는 부러 이곳에서 저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웃으며 다가온 걸 보면.

    “피로는 풀리셨습니까?”

    “네. 살펴 주신 덕분에…….”

    “다행이군요.”

    얼굴이 홧홧해져 괜히 고개를 돌리는데 다정한 음성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타니엘. 잠깐 저를 봐 주시겠습니까?”

    “네?”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뺨을 간지럽히듯 긁고 지나갔지만 그의 너른 등이 금세 바람을 막아 주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간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혹시나 당신이 저를 피할까 염려가 돼서요.”

    “…….”

    “봐 달라고 부탁드린 겁니다.”

    노아도 속이 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어젯밤이 생각나지 않을 리 없다. 극한의 상황에서 엄청난 인내심으로 억눌렀던 스스로의 모습에 자신도 놀랐다.

    그러나 그녀의 몸 위에 선명한 흉터 자국을 보는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은 건 당연했다. 몸은 잔뜩 달아올랐으나 이종족으로서 갖고 있던 적은 양의 이성이 그를 뜯어말렸다. 자국을 새긴 건 르네의 검이었지만 자국을 만든 건 자신이었다. 성마른 제 욕망 때문에 그녀를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상처 입혔다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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