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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8화 (228/488)
  • 228화

    *

    “그랬군요. 예상보다 빠르네요.”

    “예상했습니까?”

    “네, 어느 정도는요. 종족회의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종족회의가 변수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도미닉이 반역을 준비하는 데 충분한 시간과 투자를 들였을 텐데. 그때에도 로빈의 낙승이 예상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리라.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언제까지 로빈 이야기만 할 겁니까?”

    “네?”

    “모처럼 둘만 있게 됐는데. 기분 나쁜 뱀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노아의 말에 이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가까워진 간격에 숨을 확 죽이자 머리 위에 남자의 웃음이 떨어져 내렸다. 춤에 신경 쓰랴, 상황을 파악하랴, 그게 아니어도 바빴는데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차마 다른 것엔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엘은 노아의 발을 밟고 말았다.

    “죄송해요.”

    “그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밤. 악몽을 처음 꾸었던 그 밤, 별저에 찾아온 노아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춤을 췄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 소중한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 건데.

    “노아.”

    “예. 말씀하세요.”

    “싫지 않아요?”

    “무엇이요.”

    “다시 제국을 세우는 거요. 기껏 무너뜨려 놨는데, 내가 다시 황위에 오르는 게 싫지 않냐구요.”

    “무너져야 할 곳이라 무너뜨렸고, 올라야 할 사람이라 지지하는 겁니다.”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다시 노아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겼다. 조금 부끄러워진 이엘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리며 부러 제 발만 집중하자, 그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였다.

    “우리 계속 이런 이야기만 할 겁니까?”

    “네? 아…….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지냈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이곳을 그리워하긴 했는지.”

    “당연히요. 언제나 이곳을 생각했어요.”

    “내 생각도 조금은 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이엘과 노아의 시선이 한데 얽혔다. 왠지 발끝이 저릿해서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했어요. 레니가 올 때 노아의 편지도 함께 왔으면 했는데, 오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했고.”

    드물게 감정 표현을 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노아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마 위에 거리낌 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보내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보내지 못했습니다.”

    “아…….”

    “그리고 미안한 마음도 여전해서.”

    그의 말뜻을 이해한 이엘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황자의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요. 괜찮아요, 나는.”

    “미리 말하지 못한 것도 미안하니까.”

    “나도 노아에게 말 못 했잖아요. 내 상황.”

    “…….”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내가 싫어할까 봐 눈치 보는 것도 외면했고요.”

    어젯밤, 노아와 이엘은 가벼운 산책을 함께 했다. 그의 말처럼 그녀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엘은 입구에 마련된 주드의 무덤 앞에 손을 모으고 신께 기도를 했다. 그렇게 짧은 산책을 마칠 때까지도 노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응해 주는 것 외에는, 묻고 싶은 것도 묻지 않았다.

    “잠깐 나갈까요?”

    마침 끝난 음악과 함께 이엘이 마무리 인사를 하곤 몰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빈손을 쳐다보던 노아는 대충 제 일을 안드로에게 떠넘기고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여기예요.”

    뒤섞인 향수 속에서 그녀의 향을 찾아낸 노아를 향해 이엘이 웃으며 손짓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녀의 침실 앞이었다. 노아가 들어오자 이엘은 문을 닫아 잠갔다.

    “조금만 시간 내 주세요. 다 이야기할 테니까.”

    “…….”

    “잠깐만요. 추우니까 화로를……,”

    “대가가 있습니까?”

    “네?”

    “르네에게서 들었습니다. 신을 버렸다고.”

    화로를 만지려는 그녀를 물러서게 하고 노아가 대신 익숙하게 불을 피웠다. 어느새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의 침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완공될 때까지 이곳에 지내야 할 테니 초봄의 추위를 대비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그것도 말씀드릴게요.”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시간은 많으니까.”

    노아는 이제 그녀의 말이 무엇이든 들어줄 의향이었다. 대가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이라면 자신이 대신해서라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녀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다른 건 필요치 않다.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어요.”

    “엘.”

    “아무리 불러도 신께서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신을 믿지 못했나 봐요.”

    “…….”

    “그 균열을 비집고 들어온 ‘그’와 만났어요.”

    이엘은 모포를 가져와 그에게 하나 건네고, 하나는 제 어깨에 덮었다. 그러나 노아는 제게 들린 모포마저 그녀의 어깨 위로 덮어 단단히 여며 주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살고 싶었어요.”

    “…….”

    “달리 방법이 없었거든요.”

    “…….”

    “뱀에게 말한 것처럼 거래를 한 게 아니에요.”

    “…….”

    “내겐 선택권이 없었어요.”

    오드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천천히 내려놓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괴로움과 억울함이 밀려왔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삼켜 낸 그녀가 안쓰러워, 노아는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길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살기 위해,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기 때문에…….”

    “…….”

    “다른 이종족과 인간들은 아무래도 좋단 생각으로, 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합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당신들을 모두 죽이려 했는데도요?”

    “우리 역시 당신을 죽였으니까.”

    “…….”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노아의 위로에 이엘은 눈을 살짝 감았다.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평정을 잃어 가자, 노아는 다시금 가볍게 입술을 붙여 온기를 전했다.

    “설령 당신이 그걸로 우리를 이용하려 했다고 해도.”

    “…….”

    “그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엘.”

    “하지만…….”

    “결국 당신 역시 스스로를 이용하려고 했으니까.”

    인간 남자는 종족 번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의지에 따른 피임이란 건, 결국 이종족에게만 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다시 전쟁을 발발시켜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용도로밖에는.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멸망하겠지. 그녀가 손을 잡았다던 ‘그’는 이엘을 이용해 세상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건가.

    하지만 노아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에겐 발발할 전쟁의 여부 따위보다, 끔찍한 ‘악’의 존재보다, 그녀가 스스로를 그런 일에 희생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고 상처였다. 누구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니.

    이렇게까지 그녀를 벼랑으로 몰아 버린 자신의 과거가 또다시 제 발목을 잡았다.

    이엘이 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제 목이 막혔다. 그녀의 의지로 버린 게 아니라 저희가 버리도록 종용한 셈이었다.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의 가라앉은 물음에 이엘은 열었던 입술을 닫았다. 여전히 이온의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대가예요.”

    “예?”

    “첫아이를…… 바쳐야만 해요.”

    너른 들판 위에 그녀의 아이가 뛰어노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그녀를 닮고, 저를 닮은 아이가 엉성한 화관을 엮어 웃고 있는 모습을…… 남몰래 상상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곧 상상을 지웠다. 그녀에게 안겨다 줄 아픔과 고통, 그리고 책임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갖지 않으면 되겠네요. 당신이 굳이 아이를 가질 필요 없습니다. 갖지 말아요.”

    “아니요. 아이는 제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가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는 가져야 해요.”

    이토록 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존재라…….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줄 자격도 없는 존재였다.

    사랑은 숭고한 감정이라는데, 자신은 그 숭고한 감정을 이용하며 타락해야만 하는 위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

    버리지 못한 단 하나를 위해, 버리지 못한 단 하나 때문에.

    “나타니엘. 우선 진정해요.”

    “모두를 지키고 싶었어요. 더는…… 더는 나 하나 살자고 다른 이의 아픔을 가져오기 싫었어요…….”

    “엘.”

    “또 주드처럼 희생을 강요하기 싫었어요. 그런데도 난 여전히 포기를 못 해서……,”

    “엘!”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몸을 떠는 이엘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노아의 너른 품 안에서 씨근거리는 숨을 간신히 가누며 안정을 되찾아 갔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놈이 정말 악마라면, 오드에게 말해서 성력으로라도 어떻게 해 보자. 응?”

    “…….”

    “누구의 희생도 필요하지 않도록.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

    그 목소리에 큰 위로를 얻었다. 그게 정말로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 위로 하나 받고 싶어서 용기를 내 노아에게 털어놓았다. 이엘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수척해진 노아의 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당신도 내게 새끼를 바라세요?”

    “아니.”

    그의 답은 너무도 단호하고 확고했다. 노아는 지척으로 가까워진 그녀의 콧잔등 위에 짧은 입맞춤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을 반려로 맞고 부부의 연을 맺고 싶은 건 여전하지만, 당신이 내 새끼를 배는 건 원치 않습니다.”

    “왜요?”

    “인간 여자가 이종족의 아이를 갖는 건 아무런 이익도 없으니까.”

    단순히 자식을 갖기 위해 행하는 일치고는 인간에겐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나는 그저 당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이 없이도 그녀와 함께하는 삶은 너무도 짧을 테니까. 인간에겐 수명이란 게 정해져 있고, 우논은 별일이 없는 한 오래 살 것이다. 그 시간이 우논에게는 덧없이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끼고 아껴 주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이게 인간을 사랑한 이종족이 영존을 포기하며 수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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