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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7화 (227/488)
  • 227화

    “물론 길게 가지 않고 금세 끝날 거다. 후작 위를 승계할 때 이미 모든 반발 세력을 제거하고 올랐으니 내분의 끝은 로빈에게 쉽게 돌아가겠지. 지지기반이 확실하니까.”

    르네의 말을 들으며 노아는 홀을 주의 깊게 쳐다봤다. 로빈의 동맹 종족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계라는 놈이 머리를 쓴 것이다. 비록 로빈의 동맹이 위태하다고는 해도 동맹은 동맹이다. 단 하나의 종족이라도 그를 도우러 가면 반역은 손쉽게 끝난다.

    아마 놈은 종족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중간에서 가로채 그걸 기회로 삼은 것 같은데. 혹시 로빈을 도우러 올지 모를 동맹족을 차단하기 위해. 그러나 굳이 동맹족이 관여하지 않아도 로빈의 지지기반은 튼튼하니 도미닉이 승리할 일은 없다.

    그래도 뱀의 내분이 갖는 의의가 명확했다.

    “중요한 건 물자 공급이다. 인간들 역시 자잘한 전쟁을 시작했고, 그 대부분의 물자를 공급하던 게 뱀이었으니 뱀과 결탁했던 인간들도 금세 패전하겠지. 뱀은 우리의 습격과 연이어 터진 내전으로 외부로 공급할 물자는 물론이고, 저희가 쓰던 것까지 턱없이 부족하게 될 테니까.”

    이엘이 어디까지 예측하고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줄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그녀가 도미닉을 부추기고 종용해 왔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선택을 받고 호위를 맡던 그 남자에게, 이엘은 은근한 이야기를 꺼내 그를 부추겼다. 그가 방계라는 점을 들먹이며 로빈과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곧잘 했다. 그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인간들의 내전을 보고 왔다. 그 역시 금세 끝날 테지만.”

    그 틈에 활약하는 일라이저를 르네가 못 봤을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돌리고 이곳으로 오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이엘의 귀환은 이렇게나 많은 이에게 환희를 안겨 주었다.

    노아가 놀란 것만큼이나 르네도 놀랐다. 생각보다 이른 재회이기는 했지만, 그에겐 다분히 오랜 시간이 걸린 재회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흐린 미소를 지은 채 이엘을 지켜보았다.

    “폐하. 모처럼 영지에서 열린 연회인데 이렇게 밋밋하게 끝나는 겁니까?”

    갑자기 다가온 앤디의 말에 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왜 연회장을 이렇게 크게 지었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서 정리나 해.”

    “아니, 폐하. 좀 들어 보세요. 저희가 연회를 연 게 얼마 만인지 아시잖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연회를 즐겼다고.”

    맞는 말만 하는 노아 때문에 앤디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아니, 뭐 우리가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요……. 이럴 때 장단 좀 맞춰 달라는 듯, 그는 구원의 눈길을 르네에게 향했다. 조용히 목을 축이던 르네가 문득 시야 끝에 걸린 그녀를 보곤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네 영지에서 무도회를 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별로 즐기지 않으셨으니까.”

    “이참에 열어 보는 건?”

    “엘이 싫어할 텐데.”

    “오헬이 춤을 싫어합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노아의 말을 놓치지 않은 앤디가 소리를 지르자 연회장이 고요해졌다. 제 이름을 들은 이엘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이쪽을 바라보다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의외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교계 쪽으로는 뛰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 앤디의 입꼬리가 위로 씰룩거렸다. 그는 그녀가 제 앞에 서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드리운 채 그녀를 향해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폐하의 첫 춤을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뚱딴지같은 소리에 이엘이 미간을 좁히고 노아와 르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아는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피실 웃더니 안드로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는 늑대들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엘이 살짝 입을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무도회를…….”

    “폐하. 부디 첫 춤을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와, 저 얼굴 짓궂은 것 봐……. 이엘은 앤디의 표정에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못 하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우논 몇이 악기를 들고 조촐한 악단을 꾸리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노아의 허락이 떨어지는 대로 곧장 연주할 기세였다.

    결국 이엘은 앤디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광입니다!”

    “시끄러워요.”

    “춤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들어서요.”

    “놀리는 게 재밌어요?”

    그녀가 불퉁한 표정을 짓더니 앤디의 발을 냅다 밟아 버렸다. 굽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평평한 신발을 신고 있던 탓에 별로 아파 보이진 않았다. 앤디는 히죽 웃으며 이엘을 연회장 중앙으로 이끌었다.

    “좋아서 그럽니다.”

    “좋기는…….”

    “돌아오셨잖아요.”

    “…….”

    “아닌 척해도 우리 모두 기다렸다고요. 이 날을.”

    그녀의 귀환을 기다린 게 어찌 노아만일까. 앤디는 이엘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다.

    “정말로 기다렸습니다.”

    “……저도요.”

    “자, 그러면 인사를 할까요.”

    앤디가 먼저 예법에 맞게 절하자 이엘도 그를 따라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급작스럽게 꾸려진 악단의 연주가 시작됐고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기억력이 좋아서 잊지 않았나 본데.”

    노아의 얼굴엔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물론 그는 악단에게 르네의 영지에서 연습했던 곡으로 연주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실수하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게 못내 즐거웠다.

    “내가 잘 가르쳐서 그렇지.”

    “잘나셨군.”

    “왜. 이번에도 지나가는 개로서 하나도 웃기지 않은 건가, 이 상황이?”

    “…….”

    있는 대로 짜증이 난 노아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르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리다가 다시금 목을 축였다. 어느새 음악 따윈 무시하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데뷔탕트 때의 릴리와 스티븐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둘도 저렇게 쾌활하게 춤을 췄었는데. 그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르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잠깐, 잠깐. 선곡이 좀 별론데. 더 좋은 곡 없습니까?”

    모퉁이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유클리드가 박수를 치며 악단의 연주를 멈췄다. 졸지에 춤을 추다가 만 앤디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쩍 벌렸다. 여기서 등장하겠다고? 상상 이상의 또라이다. 작게 중얼거린 앤디의 목소리를 들은 이엘이 웃음이 터진 건지 입을 손으로 막고 어깨를 들썩였다.

    “자. 이걸로 합시다.”

    마치 제 수하에게 시키듯 자연스럽게 늑대들에게 말했으나 그 말을 늑대가 들어줄 리 없었다. 제 왕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늑대답게 유클리드를 멀뚱히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봐, 기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망칠 셈이야?”

    “분위기를 망치는 쪽은 유클리드 님 같군요.”

    웃음을 멈춘 이엘이 진지하게 한 소리 하자 유클리드가 반색하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건 당신뿐이군요.”

    저 듣고 싶은 대로 듣는구만. 대놓고 구애 중이라고 선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의 태도에 늑대들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필 걸려도 저런 또라이한테 걸리냐? 앤디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막무가내인 유클리드는 계속해서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다.

    “레이디. 제게 다음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놀고 있네. 저거 진짜 왜 저래? 앤디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고,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노아를 찾았다. 주최자가 쫓아내라고 명령하는 게 가장 좋을 텐데 대체 어딜 가신 거야! 속이 타서 마른침을 삼키는데, 그의 뒤에 있던 이엘이 불쑥 튀어나와 유클리드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폐하?!”

    기겁한 앤디를 뒤로하고 이엘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클리드의 앞에 섰다. 앞머리를 위로 올려 잔뜩 치장한 남자는 어느 때보다 더 훤칠하고 잘생겨 보였다. 참, 입만 열지 않으면 호감형인데…….

    그녀의 눈짓을 받은 악단이 다시금 연주를 시작하자 유클리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리드했다.

    “아무리 이용하고 싶다고 해도 저 미친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한편 귀퉁이에 앉아 사태를 관망하던 레온은 기가 막힌 광경에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겉으로 볼 땐 스라소니를 끌어들이는 게 무슨 이익이 있나 싶겠지만, 스라소니는 자유분방하고 어떠한 틀에도 끼워지는 일이 없는 종족이다. 그러면서도 왕인 유클리드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서 누구도 쉽게 얕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눈에 거슬리지만 감히 손댈 수 없는 종족.

    그런 유클리드가 저 나름대로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이엘이 볼 땐 한없이 가벼운 태도였을지 몰라도 유클리드는 착실하게 그녀를 향해 예법을 지켰다. 그의 태도에 이종족들이 미간을 좁힌 게 그 방증이었다. 언뜻 보면 이 연회장에서 가장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그러니 굳이 저놈을 골라 소문을 퍼뜨렸지. 정보통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스라소니를 고른 게 아니었다. 믿기지 않지만 유클리드는 여러 의미로 이종족 내부를 충분히 뒤흔들고도 남을 놈이니까.

    “오, 레이디. 정말 독특한 춤을 구사하시는군요.”

    “그러는 유클리드 님은 의외로 춤을 잘 추시네요.”

    “제가 또 춤에는 일가견이 있는 터라.”

    하여간 조금만 장단을 맞춰 주면 제 자랑으로 끝난다. 속으로 혀를 찼지만 이엘은 웃는 낯을 고수했다. 그녀는 빙그르르 돌면서 빠르게 주변을 곁눈질했다. 안 그래도 이목이 쏠렸는데 유클리드 덕분에 웅성거리는 소란이 더해졌다. 의도하긴 했지만 역시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레이디. 제게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서운합니다.”

    “집중하고 있어요.”

    “제 제안은 아직도 고려 중이십니까?”

    “글쎄요. 제가 얻는 이득이 없는 듯해서.”

    “저만큼 강한 능력을 가진 수컷도 없는데, 딱히 나쁘지는 않을 텐데요.”

    “딱히 좋을 것도 없죠.”

    이엘이 그의 말을 가볍게 여기며 응하자 유클리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만 들릴 듯이 속삭였기 때문에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지 못해 의문을 달았다.

    “역시 당신은 제게 어울리는 분입니다. 제 왕좌 옆자리에 당신이 있는 날을 매일 상상하고 있어요.”

    “그 왕좌를 제게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겨우 네 옆자리에 앉겠다고 내가 네 손을 잡겠니?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유클리드는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어찌나 박장대소했으면 춤을 추다가 다리를 접질려 넘어질 뻔할 정도였다.

    “리드가 형편없으시네요. 제가 리드할까요?”

    “이런. 레이디께 실례를 저질렀군요. 조심하겠습니다.”

    “주의하세요. 유클리드 님이 넘어질 때 같이 넘어져서 우스꽝스러운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유클리드는 그저 이 시간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체 알 수 없는 남자였지만, 또 제멋대로인 만큼 속이 다 보이기도 했다. 이엘은 계속해서 제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시선을 받아 내며 지루한 춤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님. 당신의 존함까지 저는 사랑하고 있어요.”

    “네, 감사하네요.”

    “잘 보세요. 제 눈빛이 얼마나 진지한지 안 보이십니까?”

    “보여요. 가볍고 또 가볍네요.”

    빈정대는데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남자는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음악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라 이것만 끝나면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누가 이런 음악을 골랐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유클리드의 웃음이 멎었다.

    “형편없긴.”

    조금 전 이엘에게 들은 말과 동일한데도 어쩐지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유클리드는 제 쪽으로 다가오는 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사이 음악은 끝이 났다.

    “다음 춤을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쉬려고 했던 이엘은 깔끔한 셔츠 차림으로 다가온 노아를 홀린 듯이 쳐다봤다. 그녀는 유클리드에게서 제 손을 홱 빼고 노아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날 밤처럼 마무리까지 함께 하고 싶군요.”

    유클리드와 노아가 서로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둘을 같이 세우고 보니 완전히 달랐다. 이엘은 피어오르는 웃음을 가리지 않고 정중히 인사했다.

    “좋습니다. 그날 하지 못했던 것까지 함께 해요.”

    춤을 추는 게 제일 싫었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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