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그래도 성큼성큼 다가오는 노아는 술 냄새를 풍기는 것치고는 걸음걸이나 자세에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취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앤디는 저도 모르게 이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의 재회인데 꼴이 이게 뭡니까, 폐하! 한숨이 나왔다.
그의 예상대로 이엘 역시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살짝 코를 찡긋거렸다.
“술을 많이 드신 듯합니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마셨습니다.”
어쩐지 무뚝뚝하게 돌아온 대답에 가운데서 앤디만 불안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엘은 엷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침실은 내가 안내하겠으니 따라오시길.”
“그럼 부탁할게요.”
뒤따라오려는 하이에나들에게 괜찮다는 손짓과 함께 이엘은 노아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홀을 벗어나 귀를 울리던 소음도 줄어들어 두 사람의 구두 소리만 들릴 때쯤, 침묵을 깨고 노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객실이 변변찮은 곳밖에 없으니, 본래 그대가 머물던 곳에 머무는 게 어떨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
“어딘지 아니까 제가 알아서 가면 될까요?”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던 이엘도 비슷한 위치에서 멈춰 섰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몸을 돌려 그제야 이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게 될 줄 몰랐네요.”
“안 본 사이에…….”
“네?”
“더, 늠름해지신 것 같군요.”
그의 말에 이엘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아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끌어안으려다 멈칫하더니 셔츠를 잡고 코에 대며 냄새를 맡았다.
“젠장, 술 냄새가 진동하잖아.”
“적당히 마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냄새가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심하지 않아요.”
어쩐지 놀리는 투에 노아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이 풀어졌다. 어색한 경어를 쓰고 있었지만, 원래대로였다면 자신은 이렇게 감히 내려다볼 수조차 없었으리라. 그런 복잡한 생각에 주저하는 사이, 이엘이 간격을 더 좁혀 왔다.
“안아 봐도 돼요?”
“예?”
“오랜만이잖아요.”
“물론입니다. 다만 술 냄새가……,”
“괜찮다니까요.”
푸스스 웃음을 터뜨린 이엘이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껴안았다. 그녀의 몸에선 저와 상반된 좋은 냄새가 풍겨 왔기에 노아는 더 민망해졌다. 이런 포옹 정도는 이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인데 복합적인 이유 때문인지 드물게 그의 귀가 붉어졌다.
“좋아요. 보고 싶었어요, 정말.”
“…….”
“노아. 당신은요?”
“제 얼굴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 목소리에 이엘이 또 웃음이 터졌다. 실성한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줄곧 긴장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엘은 행복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여긴 그녀가 스스로 쟁취한 그녀의 집이었다. 발붙일 곳 없이 떠다니던 제게 주어진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보고 싶었던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고.
“노아.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잠을 좀 설쳐서.”
“또 불면증이 생겼어요?”
“괜찮습니다, 이젠.”
네가 돌아왔으니 그 또한 괜찮다. 노아는 제 얼굴을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빌어먹을 뱀의 소굴에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안쓰러웠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평온한 낯이었다.
이곳에서 머물렀던 때보다 더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면서도 또 짜증이 밀려왔다. 하이에나들이 어지간히 잘해 준 모양이지.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표정이 안 좋은데요.”
“그럴 리가.”
그는 이엘의 뺨 위에 입술을 길게 눌렀다가 떼며 대충 수습했다. 수상쩍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사이 벌써 이엘의 침실에 도착했다. 익숙한 문을 발견하고 이엘은 노아의 손에서 벗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정말…… 그대로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계속 치워 두었습니다.”
“…….”
“당신의 정원도 여전한데, 보러 가겠습니까?”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이전과 다름없이 깨끗하고 환한 침실이었다. 마치 르네가 릴리의 방을 매일 청소해 놨던 것처럼, 자신의 침실 역시 주인을 매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침대 시트, 카펫, 어느 곳 하나 깨끗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애들이 열심히 청소하더군요.”
“고마워요.”
“나야말로 돌아와 줘서 고마울 따름인데.”
이마 위에 짧은 키스를 받고 이엘은 웃으며 방 안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하이에나의 영지라고는 하나 이곳만큼 편하진 않았다. 황녀궁과 비슷한 건 오히려 하이에나의 침실이었음에도, 되레 이곳이 더 그리웠다.
“제 침실 옆을 고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나는 대로 그쪽으로 옮기십시오.”
“아니요.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거기가 더 클 겁니다. 더 좋고요. 그쪽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큰 곳은 필요 없어요. 여기가 더 안락하고 좋은데요?”
바로 옆으로 와야 자신이 안도할 게 아닌가. 여긴 기껏해야 꼭 필요한 가구들만 갖춰져 있고 생활하기엔 별로 좋지 않았다. 노아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체되는 만큼 별저처럼 크고 화려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제 마음도 몰라주는 이엘은 창문을 열고 연신 감탄만 하고 있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정말 여기 있을 겁니까? 내 옆방이 좋지 않아요?”
“네. 여기가 더 좋아요.”
기운이 쭉 빠진다. 좋다는데 뭘 더 할 수 있나. 노아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이엘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한편 이엘은 그를 등진 채 웃고 있었다. 곁눈으로 힐끗 봤을 때부터 그는 마치 강아지라도 된 양, 아무 말도 못 하고 초조하게 굴었던 것이다. 조금만 골려 주고 나중에 그의 옆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 방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
이종족은 인간에 비해 머리를 잘 쓰는 편은 아니었으나 본능에 관해서는 인간보다 나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 지난 10여 년을 살며 더더욱 고심하게 됐다.
“세잔티노도 당신이 지휘하셨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지휘라는 거창한 단어는 민망하네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함께할 수 있었다면 영광이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친분이 없었으니까요.”
이엘의 웃음소리에 남자가 따라 웃으며 한껏 그녀를 칭찬했다. 본체화라도 했더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아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전 종족회의와는 달리 화려한 연회가 열렸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몇몇 왕들은 이 틈을 노려 그녀에게 달라붙듯 접근했고, 이엘은 사양하지 않고 교류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이미 그녀와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이러고 있으니 네가 내 영지에서 툴툴거리던 게 이해가 가는군.”
어느새 다가온 르네가 조소하며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제 영지에서 열렸던 연회에서 자신이 이엘과 춤을 출 때, 인상을 찡그리고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노아의 모습과 지금의 자신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느낀 것이다. 르네는 계속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운을 뗐다.
“우리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자들이 접선해 왔다.”
“벌써?”
“어제 회의가 확신을 주었던 것 같다.”
암시장. 세잔티노. 암울한 미래. 모든 걸 무너뜨렸다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왕으로서 떠안아야만 하는 책임감. 종합적인 관계가 이종족을 모두 괴롭혔다. 비단 종족 번식만을 두고 염려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멸종해 갈 이 땅의 안위가 문제였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깊게 생각해 본 이종족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2차 전쟁 때, 그냥 남은 인간들마저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는 종족도 있었다.
‘인간이 이종족의 먹이사슬에 들어가진 않지만, 결국 당신들이 살아가는 체계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
인간이 모두 죽는다는 건, 먹이사슬 중 하나가 끊어지는 것보다 심각한 일이었다. 영리한 독수리가 홀로 인간의 글자를 깨우치는 것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만 봐도.
창조주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래로 인간과 함께 살아온 그들은 인간의 도움 없이는 발전할 수 없고, 그렇다고 퇴보하여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자들은 초조해졌을 테니까.”
“그게 어느 정도야?”
“사분의 일 정도.”
생각보다 꽤 많다. 그게 아니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을 버릴 수 없는 게 이종족이니까. 납득은 간다.
“그보다 뱀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실뱀 하나 안 보일 줄이야.”
“재미있는 소릴 들었어.”
르네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쪽에 내분이 생겼다더군.”
“내분? 이 시국에?”
“웬 방계 하나가 날뛰고 있는 모양이야.”
그놈 이름이 도미닉이었던가. 이엘 곁에서 시중을 들고 호위하던 그 곱상한 뱀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