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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5화 (225/488)

225화

*

“거보십시오. 고치길 잘했잖습니까.”

성을 복구하면서 전에 사용하던 홀을 이전보다 크게 확장시켰는데, 그땐 쓸데없는 확장이라며 안드로가 앤디를 타박했었다. 그러나 이전 크기였다면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앤디는 줄곧 기세등등한 상태였다. 안드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그때 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들의 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좌우를 훑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인데.”

앤디를 제외한 모든 늑대들은 왕의 눈치를 살피며 책잡히지 않으려 분주히 움직였다. 순차적으로 들어오는 타 종족의 왕들을 안내하고 음식과 와인까지 세심하게 살폈다. 단시간에 준비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왕의 노여움은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뭐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반드시 회의를 열어야 했는데.”

매의 왕이 목을 축이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노아가 착석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맹을 맺고 싶다고 빌빌거릴 땐 언제고, 잘난 척하긴.”

“뭐, 뭐요?! 크흠. 체면 좀 차리시오. 공적인 자리에서 그 무슨…….”

“아, 공적인 자리. 좋지. 여긴 공적인 자리였지?”

“…….”

“그럼 이 중에 나와 동맹 맺을 놈은 더 없단 소리겠지? 맞나?”

그게……. 매의 왕은 입만 뻐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모여 있던 종족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이제 와 동맹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황녀를 보여 주시오.”

“황녀는 죽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나? 우리에게 보여 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맞소. 다름 아닌 황녀가 살아 있다니.”

“늑대가 보호하고 있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위기였다. 본체화를 했더라면 모두 입에 침을 흘리며 이를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폭풍 전야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늑대들은 혹시 모를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앤디의 눈짓대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너희에게 그녀를 보여야 할 이유는?”

한참 만에 나온 시큰둥한 말투에 앤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분노하셔서 검이라도 쥐면 어떡하시나 했는데……. 물론 다행이라고 안도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 옛날의 고고했던 늑대의 기상을 다 버렸군. 겨우 암컷 하나에 이럴 건가?”

“…….”

“이봐, 노아. 황녀이기는 해도 유일한 암컷이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여잘 봐야 하는 이유는 충분할 텐데.”

말의 위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자칫하면 정말 사고가 날 수도 있겠는데. 왕의 성질머리를 아는 앤디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바짝 긴장했다.

“이제 우리도 후손을 봐야 하지 않겠나? 씨를 줄 수 있는 게 코앞에 있는데,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네 아랫것들이 멍청해 여자를 다 죽여 놓고선, 그걸 왜 황녀에게 떠맡기지?”

“뭐, 뭐? 그, 그거야…….”

“그토록 아끼는 네놈들의 아랫것들이 뱀과 결탁해, 보이는 족족 인간 여자를 죽였잖아.”

“…….”

“네 입으로 말했지? 황녀는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분노로 점철된 눈빛이었으나 다행히 폭주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앤디는 속을 쓸어내리며 와인을 벌컥벌컥 마시는 노아를 주의 깊게 살폈다. 아무리 우논이라고 해도 저렇게 며칠씩 술에 절어 살면 건강이 나빠질 텐데, 우리 폐하께선 도통 그런 생각을 안 하신단 말이야. 아무튼 최근의 노아는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 놓고, 새끼는 뱄으면 좋겠다? 너희가 그토록 증오하는 황족인데도 새끼를 낳아 주면 족해?”

“노아!”

“아니면, 뭐. 설마 황녀를 새끼 낳아 주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

“더럽고 추악하다는 건, 너희 스스로 알고 있겠지?”

그의 말에 일부 왕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정도로 끔찍하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황녀에게서 후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여기 모인 모두가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일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이래서는 인간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노아는 느른한 자태로 기대 앉아, 그들을 향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

“네놈들도 들었겠지만 그녀가 아주 대단한 걸 갖고 있더라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왜 넌 신을 버리고 그딴 걸 선택했을까. 왜 신이 아니라 악마 따위를 선택한 거야.

그게 정말 악마가 맞다면……. 알아차렸을 텐데, 영리한 너라면, 똑똑한 인간이라면…… 그게 신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라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대단하다. 우리가 보기엔 그보다 대단한 능력은 없다. 우리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능력이지.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새끼는 절대 가질 수가 없거든.”

하지만 네 입장에선 최악 중의 최악이지 않나. 전혀 대단하지 않은 일이다. 신의 보호를 떠날 만한 가치도 없는 조건인데, 도대체 왜…….

아니면 무언가 그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그놈’이 너의 무언가를 저당 잡아 억지로……. 그래서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갔던 걸까.

그 생각에 더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깐 맛봤던 달큰한 잠을 자기 위해 술을 진탕 퍼마셨으나, 단 한 순간도 발 뻗고 편히 잔 적이 없을 이엘이 떠올라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절박했을 테니, 살고 싶으면 무엇인들 못 할까.’

르네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수컷인 자신은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그녀의 두려움과 절박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강자에 속한 자들은 평생을 살아도 약자의 마음 한 터럭도 공감할 수 없듯이.

“한 가지 조언을 해 줄까?”

“…….”

“그렇게 네 새끼를 갖고 싶나?”

이죽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언뜻 술주정뱅이처럼 보였다. 외관만 보면 폭군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안드로가 제 이마를 짚으며 짧게 탄식했다. 그는 하루빨리 그녀가 귀환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발 아래 설설 기어 봐.”

“뭐……!”

“그런다고 널 봐줄지는 모르겠지만.”

분노한 매의 왕이 테이블을 두 손으로 쾅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을 때였다. 홀 안에 대기 중이었던 늑대들과 노아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귀를 쫑긋거리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로날드가 별안간 펄쩍펄쩍 뛰어 홀을 뛰쳐나가 버렸다. 동시에 모든 이종족들 역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무언가 영지로 들어왔다.

“내가 좀 늦었군.”

히죽거리며 등장한 유클리드의 모습에 갖가지 반응이 나왔다. 르네처럼 대번에 인상을 구기는 자도 있었고, 노아처럼 눈을 부라리는 자도 있었고. 대다수는 실망한 기색이었으나 그것도 곧 사라졌다.

“나의 레이디를, 아차.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퍽 어울리는 순수한 미소를 그린 유클리드가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곧이어 등장한 이엘은 그의 손을 가볍게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초대장을 늦게 받아서, 도착이 좀 늦었네요.”

자연스럽게 공석에 착석한 이엘의 뒤로 패티스가 공손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에게 건넨 뒤 저를 쳐다보는 자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제게 보여 주신 관심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황녀라는 이유만으로 당신들 앞에 나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이게 무슨……! 감히 인간 따위가……,”

“실례지만 예의를 차려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패티스가 빙긋 웃으며 입을 함부로 놀린 왕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저희 폐하께서 긴 여정으로 다소 지치셨음에도 이렇게 무례하고 갑작스레 열린 회의에 곧장 참석하셨으니, 부디 격식을 차려 예의를 갖춰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라니…….”

“안건에도 쓰여 있지 않았나요?”

이엘은 흐트러진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으며 저를 쳐다보는 남자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분명 공손한 어투였음에도 행동 하나하나에 깊게 배어 있는 황족 특유의 우아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에 잔뜩 짓눌렸다.

종족회의는 본디 제국의 귀족회의에서 출발한 것이니 이 자리에 있는 수장들은 모두 과거 귀족 위를 지닌 자들이었다. 선황과 닮은 그녀의 시선에 절로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하이에나의 새로운 왕이라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황녀의 말에 왕들의 표정이 천천히 구겨져 갔다.

“이래도 자격을 운운할 것인지?”

그건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던 늑대들과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

앤디는 안드로가 어깨를 툭 칠 때까지 멍하게 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회의가 파한 뒤였고, 왕들은 늑대들의 안내를 받아 속속들이 머물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만. 그래서 회의가 어떻게 됐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봤으나 도무지 내용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회의는 모두 이엘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그녀가 하이에나의 왕으로 참석한 이상 대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의외로 회의를 주도하는 게 그녀였기 때문에. 나머지는 거의 끌려가듯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오랜만입니다, 앤디 님.”

호의를 갖고 다가온 몇몇 왕들과 가벼운 인사를 마친 이엘이 앤디의 앞에 다가가며 작게 웃었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그는 그녀의 등 뒤에 선 하이에나들을 힐끔 쳐다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하이에나에게 의탁하라고 했더니 왕이 돼서 오면 어쩌잔 거야.”

“그러게요.”

천진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자신이 알던 그녀였다. 조금 전의 그 위엄은 사라지고, 테르들과 뛰어놀던 그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닌 척 숨겨 왔지만 그는 그녀의 귀환이 못내 기뻤다. 결국 손을 뻗어 이엘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잘 왔어. 정말, 정말 잘 왔어……. 돌아온 걸 환영해.”

모든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앤디의 말 한마디에 이엘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듯했다. 지난 반년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눈을 붙여도 제대로 자는 기분이 아니었는데. 이제야 발 뻗고 편하게 눈 붙일 수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불쑥 그녀를 품에서 떼어 낸 앤디가 귀족식 예법대로 우아하게 그녀를 향해 절하며 손을 내밀었다.

“하이에나의 왕을 뵙습니다.”

수많은 종족의 눈과 귀가 집중되는 자리였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그녀가 하이에나의 왕으로 이곳에 온 거라면, 늑대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입지도 탄탄해질 테니. 앤디의 뜻을 알아차린 이엘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앤디는 그녀의 손등 위에 정숙한 입맞춤을 했다.

“폐하께서 거하실 곳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지.”

낮게 들려온 목소리와 짙어지는 와인 향에 앤디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 폐하……. 그러기에 제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했잖아요! 그 생각을 하며 앤디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마 외모가 훤칠하니 저렇게 구겨진 셔츠도 썩 나빠 보이진 않아 망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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