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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4화 (224/488)
  • 224화

    *

    기어이 사고를 치네.

    “당신의 비밀을 내게 흘린 건, 그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란 소리 아닙니까?”

    미친놈이 너무 오래 살았다. 살 만큼 살았으니 그냥 이대로 죽일까? 패티스는 진지하게 그 생각을 하며, 여차하면 스라소니를 쓸어버릴 작전을 머릿속에 세우기 시작했다. 유클리드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별것 아니다. 수적으로나 힘으로나 우리가 더 우세하니까……,

    “전쟁이라도 할 표정이로군.”

    이엘의 웃음기 섞인 말에 패티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엘과 우논들은 높다란 성벽 위에 올라서서 항명 중인 스라소니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상 유클리드 혼자 떠벌리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아름다우신 왕이시여. 당신의 미모에 제 눈이 부시는군요.”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한참 만에 튀어나온 이엘의 목소리에 유클리드는 눈을 크게 치뜨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가 또 아름다운 분께는 한없이 말이 많은 터라.”

    “우웩.”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온이 헛구역질을 하듯 입을 벌렸다. 그녀가 그의 낯선 반응이 퍽 웃겨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레온은 민망해진 건지 미간을 좁히며 어깨로 그녀를 톡 쳤다.

    “왜 웃어.”

    “웃기잖아요.”

    “역겨운 걸 어떡해.”

    “그래도 그 반응은 뭔가 레니 같지 않았어요.”

    차라리 이카르나 미르가 더 잘 어울리는 반응이었는데. 그러나 이엘은 문득 두 사람이 제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떠올라 애써 웃으며 생각을 지웠다. 그녀의 씁쓸한 웃음을 눈치챈 레온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조언했다.

    “놈과 깊게 엮이지 마. 저건 네 상상 이상으로 미쳤다고. 인간들도 저 미친놈의 말재간엔 못 당했어.”

    “알아요. 저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는 것뿐이에요.”

    “알면서……,”

    “그래서 저도 이용하려고요.”

    피차 이용하는 관계라면 죄책감은 덜겠지. 이엘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여전히 헛소리를 하고 있는 유클리드를 향해서, 그녀는 쥐고 있던 총을 들어 조준했다.

    “폐하!”

    깜짝 놀란 스라소니들이 합세하여 유클리드의 앞에 물로 장벽을 세워 가로막았다. 그제야 주절거리던 남자의 입이 다물렸다. 저렇게 입만 다물면 풍기는 분위기는 노아와 비슷한데. 입만 열면 무겁던 분위기가 죄 날아가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남자다.

    “이게 제 구애에 대한 당신의 답입니까?”

    유클리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애초에 저쪽은 이걸 기다렸으리라. 도발에 걸려든 하이에나가 선제공격을 하는 순간, 정당한 방어라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하이에나는 이제 겨우 단합되기 시작했고, 저쪽은 오랜 시간을 전쟁으로 단련해 온 종족이다. 전쟁에서 경험이란 항목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방심하면 먹히는 건 이쪽이 될 거라고 이엘은 빠르게 판단했다.

    “스라소니는 구애를 그런 식으로 합니까?”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에 발끈한 건 다른 스라소니들이었다. 우리를 뭐로 보고! 저희도 왕이 제정신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하나로 묶여 같은 취급 받는 게 못내 억울했다. 왕을 존경하며 섬기지만, 이런 건 좀 억울하다.

    그러나 정작 유클리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오, 이런. 제가 무례했군요. 결례를 범했습니다. 인간의 방식은 잘 몰랐던 터라.”

    “적어도 당신의 행동이 어떤 종족에서도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요.”

    “하하, 제가 상식이 없습니다.”

    쯧, 저건 그냥 입을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 레온은 그 생각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편 이엘은 들고 있던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며 짧게 신음했다. 그때완 다르게 지금은 손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고 따가웠다. 이렇게 차가운 총을 쥐는데, 왜 이렇게 뜨거운 건지 모르겠다. 전처럼 본능으로 조준하면 좋을 텐데 여간 쉽지 않았다.

    슬슬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힘에 부쳐 총을 떨어뜨리기 직전임을 예감했다.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천천히 손을 내리려는데, 무언가 제 손과 총을 단단하게 옭아매는 게 느껴졌다.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게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이런 것밖에 못 해.”

    피시가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는 마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자신이 싫다는 듯 말했으나 그 순간 이엘에게 그것만큼 큰 도움은 없었다.

    “충분해, 피시. 고마워.”

    “뭘요. 폐하를 위해서라면.”

    쑥스러운 듯 해맑은 대꾸를 들으며 이엘은 총을 고쳐 잡았다. 저번에 썼던 것보다 성능이 좋은 총이라 저 정도 장벽은 쉽게 박살 낼 것이다. 저희 왕을 지키겠다며 만들어 낸 스라소니들의 장벽이 이전에 봤던 유클리드의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기도 하고. 그래도 그의 몸엔 상처를 내지 않는 선으로 잘 조절해야 한다. 괜한 여지를 주면 안 되니까.

    심호흡 끝에 방아쇠를 당기려는 차였다. 촤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장벽을 깨뜨리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선 유클리드가 허리를 숙이며 팽팽했던 긴장감을 끊었다.

    “미움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결례를 사과드리지요.”

    우아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되레 불쾌했으나 이엘은 총을 고쳐 잡으며 사실관계를 확실히 했다.

    “도를 넘어선 무례였음을 인정하십니까?”

    “예. 단순한 호감에서 기인한 장난이었으나 당신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제가 잘못한 일이겠지요.”

    끝까지 입을 놀리는 유클리드를 보며 모두가 혀를 찰 때, 그는 곁에 있던 우논을 앞으로 밀어 성벽 가까이에 서게 했다.

    “제가 온 본론은 이겁니다.”

    “그게 뭐죠?”

    “곧 종족회의가 열릴 텐데.”

    “…….”

    “하이에나의 왕께서도 오셔야 하니까요.”

    종족회의…….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글자에 이엘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늑대의 영지에서 열릴 텐데, 저희와 동행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이에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윽, 토 나와…….”

    비위가 좋지 않은 스완이 몸을 돌려 헛구역질을 했다. 이번엔 엄살이 아니라 진짜인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우논 하나가 그의 등을 쳐 주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러다 내 반쪽 보기도 전에 내가 피 말라 죽겠어.”

    “엄살 부리지 마.”

    “저걸 보고도 엄살이란 소리가 나와?! 이 잔인한 것들…….”

    “네 앞에서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지 않은 것에 감사해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늑대 때문에 스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와, 이 잔인한 종족들……. 스완은 바닥에 널브러진 뱀의 사체를 힐끗 쳐다봤다가 기겁하며 다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이에나의 영지로 향하던 뱀의 무리를 공격한 것까진 좋았다. 근데 저렇게까지 사체를 헤집어야 했어?! 차라리 삼켜 버리든가!

    “하이에나의 영지로 가면 더할 텐데? 놈들은 사체를 먹으니 곳곳에 저런 게 널려 있을 거다.”

    마치 그를 놀리듯, 2기사단을 이끌던 후작 알폰스가 명백한 비웃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너희처럼 저렇게 펼쳐 놓겠어?! 바락 소리를 지르는 스완의 목소리를 뒤로하던 그는 엷은 웃음을 터뜨리곤 사체를 쳐다봤다. 확실히 조금 심하긴 했지. 개인적인 사감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엔 양심이 찔린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많은 존재를 떠나보냈지만, 저번 종족회의 때의 습격은 늑대들에게 필요 이상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때를 떠올리니 차마 곱게 죽이고 싶진 않았다.

    만일 왕의 명령이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쩌면 앤디가 있었어도 이 정도로 학살하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지금 2기사단을 이끄는 건 알폰스였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을 섞어, 뱀들을 아예 도륙해 놓았다.

    “진정했으면 나타니엘 님께 연락드려라.”

    그의 말에 스완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 닿자 잠자코 기다리던 알폰스가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왜.”

    “넌 귀족회의 때 오헬이 늑대 영지에 머무는 걸 반대했었잖아. 근데 이젠 그녀에게 공대를 하는 게 신기해서.”

    “말은 바로 해. 난 반대표가 아니라 무효표였다.”

    “그거나 이거나.”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간 지내온 정이 있으니 매정하게 그녀를 외면할 수 없어 무효표를 던졌지만, 사실상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황녀는 이종족에게 있어 반드시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했던 대상이었으니까.

    “우린 한심한 종족이라 그래.”

    “뭐?”

    “한번 믿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믿게 된다.”

    “진짜 한심하네.”

    “맞아. 그게 인간한텐 유독 심한 편이지.”

    늑대들은 스스로의 한심함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비단 이엘이 유일한 여자여서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가 마치 절망뿐인 세상을 살려 줄 것만 같은 그런 기대감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바라 왔던 이상적인 인간상에 가까운 것 같아서.

    어쩌면 인간과 이종족이 함께 사는 게, 마냥 꿈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찮아졌으면 이제 출발하지. 놈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뱀이 스라소니를 추적해 나타니엘 님의 위치를 알아낸 모양이니까.”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처럼 들판에 살점을 이리저리 널브러뜨렸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은 모습에 스완은 입을 틀어막고 빠르게 늑대의 등 위에 올라탔다. 흐트러졌던 대열이 제자리를 찾은 것을 확인한 알폰스가 먼저 달리려던 때였다.

    “잠깐만!”

    중간쯤에 있던 스완이 손을 번쩍 들고 그를 불렀다.

    “또 무슨 일이지? 아직도 속이 안 좋아?”

    “그게 아니라. 갈 필요 없을 것 같아.”

    “뭐?”

    “오헬이 이쪽으로 오겠대.”

    “무슨…… 거기서 여기까지 꽤 먼데? 갑자기 무슨 일로……,”

    “종족회의가 열린대.”

    스완은 이엘에게 쏟아지듯 들었던 내용들을 늑대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타니엘 님이 하이에나와 레온 님과 함께 출발하셨다고?”

    “거기에 스라소니도 함께.”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 2차 전쟁 때도 이런 연합은 없었던 것 같은데. 늑대들은 저희끼리 쳐다보며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일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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