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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3화 (223/488)
  • 223화

    이엘이 제 품에 온전히 기댈 수 있도록 피시가 자세를 고쳐 안았다. 어느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품에 머리를 기댄 이엘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서러움과 괴로움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이따금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헐떡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게 그에겐 고역이었다.

    허세가 아니라 진짜였으면 좋겠다. 정말로 내가 네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으면 좋겠어. 하다못해 하트처럼 군을 이끌 수만 있다면, 그럼 네게 큰 도움이 될 텐데…….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응? 혼자서 아파하지 마, 제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가슴 한구석이 너무 아파서, 그냥 울고만 싶어졌다. 마치 감정이 전이라도 된 것처럼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겨 내야 하는데. 견뎌야 하는데.

    나약한 나처럼 굴복하면 안 되는데…….

    “아냐……. 아니야. 이기지 못해도 괜찮아.”

    “…….”

    “꼭 강해질 필요 없어. 약한 너도 나는 사랑해. 엘, 엘. 그러니까 울어도 돼. 혼자 아파하지 마.”

    피시는 서러움을 삼키고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곤 그녀를 침대에 바르게 눕혀 주고 열려 있던 창문을 단단히 닫았다. 화로에 불을 지피고 침실 온도를 높여 주었지만 여전히 추워 보였다. 그는 두꺼운 모포를 끌어와 그녀의 몸 위로 여러 개 덮어 주고 나서야 안심한 듯 침대를 벗어났다.

    그의 자리는 카펫 위였다. 언제나처럼 그곳에 앉아 침대 위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잠들지 않은 이엘은 무지근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기만을 반복했다. 피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찾아온 아침이 두 사람을 감쌌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까지 눈을 감고 있던 이엘은 쏟아지는 햇빛에 결국 눈을 떴다. 맨정신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비교적 몸이 가벼워졌다.

    “조금 더 자.”

    밤새 그녀를 지켜봤던 피시가 벌떡 일어서며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나 이엘은 그의 손을 밀어 내고 몸을 일으키더니 물끄러미 피시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이 불안해, 피시는 안절부절못했다.

    “엘. 아직도 아파?”

    “아니. 덕분에 좋아졌어.”

    “다행이다.”

    “피시, 잠깐 이리 와.”

    그녀의 손짓에 피시가 허리를 숙여 커다란 키를 접었다. 이엘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고마워. 위로해 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엘.”

    “노력하지 않는 너도, 나 역시 좋아해. 무리하지 마, 피시.”

    피시가 하트에게 능력을 쓰는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다. 고생하는 그의 눈이 가여워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히 쓸었다.

    그게 좋았던 건지, 피시가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순수하게 웃고는 제 머리에 닿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갖다 댔다.

    “응, 나도. 나도 좋아. 나는 사랑해. 나는 어떤 모습의 엘이라도 사랑해.”

    각자의 약함을 우리만 이해할 수 있어. 슬픈 교점을 찾은 피시는 그녀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조금 더 힘을 담아 읊조렸다.

    “사랑해.”

    너의 전부를 사랑해.

    *

    “귀족회의 때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앤디가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농담을 던졌으나 그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흠흠. 머쓱해진 그가 헛기침을 하며 애먼 꽃을 톡 건드리자 시클라멘이 꽃잎을 펼쳐 죽일 듯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 야. 죽고 싶어?

    나 참……. 이젠 하다 하다 꽃이 늑대를 죽인단다. 늑대 위상 어디 갔냐…….

    “그게 말이 돼?”

    한참 만에 입을 뗀 노아는 오늘도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취하진 않았으나 그의 옷은 마치 와인에 푹 젖은 것처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반면 그의 맞은편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르네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상반된 모습인데도 표정은 비슷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전했을 뿐이다.”

    “인간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인데?! 어떻게 신을 버리고 다른 것을…….”

    “절박했을 테니.”

    “…….”

    “살고 싶으면 무엇인들 못 할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깊이는 누군가 판단할 게 못 된다. 르네는 그녀가 자진하려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자살 사건이 연기였다고는 해도, 그때의 그 공허한 눈동자와 허무함으로 얼룩진 얼굴이 전부 거짓일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나저나 아주 난리더군. 소문이 퍼진 건 알았지만 이쪽으로 다 몰릴 줄은 몰랐다.”

    “유클리드는 나타니엘이 하이에나의 영지에 있는 걸 아는 것 같아.”

    “그럼 다른 종족을 여기로 몰아넣고 자신은 그쪽으로 갈 생각인가?”

    “벌써 하이에나의 영지에 스라소니들이 도착했고 유클리드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

    “안 가도 되나?”

    “일단은.”

    이엘은 괜찮다고 말했으나 노아는 이미 2기사단을 그쪽으로 보냈다. 이쪽에도 상당수의 이종족이 몰린 터라 혹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을 준비해야 했기에 자신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이에나의 종족 특성상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지켜 줄 테니, 오히려 이곳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2기사단에는 스완도 함께 딸려 보냈으니 여차하면 환각으로 홀리고 퇴로를 확보하면 된다.

    스라소니는 각 개체가 강하진 않다. 호전적이라 인정사정없이 달려들겠지만 떼로 덤벼도 오히려 하이에나 두세 마리보다 못하다.

    유클리드만 없으면.

    “그 미친놈만 없으면 별문제는 없어.”

    “미친놈이 문제잖아.”

    르네의 말에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스완을 통해 이엘에게 스라소니와의 이야기를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마주쳤다는 이야기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엘이 말하지 않으면 사정을 알 수 없다는 게 그의 속을 타게 만들었다. 그는 한숨처럼 근심을 토로했다.

    “‘그 존재’라는 놈.”

    “…….”

    “아무 대가 없이 그럴 리 없어.”

    차라리 신이었다면 모르겠다. 악마라니. 악한 존재라니……. 신뢰할 수 있는 르네로부터 들은 내용인데도, 노아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런 존재가 정말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은 그도 뱀들처럼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존재를 만났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가 뭔가 엄청난 것을 대가로 요구했을 텐데, 그게 뭘까. 노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부터 불안이라는 단어를 매시간 달고 살게 된 기분이라, 그게 몹시 씁쓸하고 슬펐다.

    “폐, 폐하!”

    그때 갑자기 우논 하나가 거친 숨을 들이쉬며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 있어? 노아보다 먼저 반응한 앤디가 소리를 쳤다. 우논은 가쁜 숨을 쉬더니 노아와 르네 앞으로 밀랍 인장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두 분 앞에 도착한 서신입니다.”

    “누가?”

    “스라소니가 가져왔습니다.”

    “스라소니가 여길 왔나?”

    “예. 유클리드 님은 안 계셨고 일부만 도착했는데…… 그게…….”

    “뭐야, 말해.”

    “영지 밖에 모여 있던 다른 종족의 왕들에게도 각각 서신을 전하던데요.”

    그 말에 노아가 종이를 찢듯이 뜯어 서둘러 내용을 확인했다.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미간이 좁아지자 분위기가 덩달아 가라앉았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던 안드로가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을 깼다. 심상치 않은 노아의 반응에 르네도 자신의 종이를 뜯어 확인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이쯤 되니 모여 있는 늑대와 독수리들은 괜히 저희가 초조해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왕을 채근할 수도 없고…….

    “폐하! 설마 오헬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저 지금 갈까요? 하이에나 영지로 가요?! 네?”

    유일하게 재촉할 수 있는 앤디가 빠르게 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노아는 대답 대신 쥐고 있던 종이를 갈가리 찢어 바닥에 흩뿌렸다.

    “폐하?”

    “준비해.”

    “무슨 준비요?”

    “종족회의.”

    “네에?!”

    눈을 휘둥그레 뜬 앤디가 소리를 내질렀다. 예정되었던 것도 취소한 지 오래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 무슨 종족회의란 말인가. 그놈의 종족회의로 전쟁이 몇 차례씩 진행 중인데. 애초에 종족회의는 자주 열리던 것도 아니었다.

    “잠깐만요, 폐하! 이런 갑작스런 회의는……,”

    “유클리드가 머리를 썼군.”

    이어진 르네의 답에 앤디를 비롯한 우논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예정에 없이 갑자기 열리게 될 종족회의는 직전에 회의를 열었던 곳에서 열게 돼 있다.”

    직전에 있던 회의는 늑대의 영지에서 열렸다.

    “그리고 그 회의에 참석했던 종족은 모두 참여하는 게 원칙이야.”

    하이에나는 그때 참여했다.

    “구실은 여러 개야.”

    “…….”

    “하이에나에게 새로운 왕이 생겼다는 점.”

    하이에나가 무슨 왕이 생겨?! 소식을 듣지 못한 늑대와 독수리가 웅성거렸다. 그들을 잠재우듯 르네는 끊었던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유일한 암컷이 존재한다는 것.”

    비정기적인 종족회의는 절반이 찬성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늑대의 영지에 모두가 모여 있는 지금, 누구보다 늑대의 영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지금. 누가 종족회의를 반대하겠는가.

    “손님 맞을 준비 해.”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노아의 목소리에 늑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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