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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2화 (222/488)
  • 222화

    *

    메스꺼운 연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일라이저는 코와 입을 틀어막은 수건을 조금 더 강하게 매듭지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쑥대밭이 됐다. 그가 전에 살던 곳은 아니었으나 제도와 인접해 있던 마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왕래하던 일라이저의 마을로부터 씨앗을 받아 농사를 제법 잘한 터라 인구수가 점점 증가하던 곳이기도 했다.

    ― 일. 아이들은 모두 안전한 곳에 대피했어.

    ― 알겠어. 너희는 먼저 들어가서 준비해. 내가 상황을 지켜보다가 신호를 줄 테니까.

    ― 잠깐만. 궁금한 게 있어.

    주근깨를 가진 청년이 머뭇거리다가 일라이저를 향해 손짓했다.

    ― 그분…… 정말 황자님 맞으셔?

    아르세니온. 그 황자의 존재가 이 사달을 만들었다. 폭동의 중심엔 황자의 존재가 있었다.

    일라이저가 늑대의 영지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수습할 때, 그녀는 축복의 나무를 인간들이 사는 마을 곳곳에 전달했다. 오드와 함께 나타난 그녀의 존재는 보는 사람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을 안겨 주었다.

    ― 그분께서 우리를…… 구해 주실까?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살아남은 유일한 황족이 무너져 가는 세계를 구원하고 잃어버렸던 제국을 재건하리라는.

    하이에나의 짓일 테지. 일라이저가 아는 이엘은 그런 잡다한 소문을 퍼뜨려 가며 민심을 사로잡는 것엔 관심이 없다. 차라리 현장에 직접 나서 움직이는 편이 그녀에게 더 어울렸다. 그렇다면 현재 몸을 의탁하고 있는 하이에나 쪽에서 이런 소문을 흘리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그 사실을 이엘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일은 일라이저도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 그분이 우리를 구해야 할 의무는 없어.

    ― …….

    ― 우린 이미 한 차례 그분을 버렸다. 그러니 그분도 우릴 구할 의무는 없어.

    설령 황족이라 할지라도, 제국이 무너진 지금. 그녀가 황족의 의무를 다할 이유는 없다.

    ―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닿는다면.

    ― …….

    ― 황자님은 우리를 외면하진 않으실 거야.

    그의 대꾸에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굴에 재를 묻힌 그들을 보며 일라이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는 인간이 좋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온정 있는……. 자신의 모습과 다를 게 없는 나약한 인간이 좋다. 나약하기에 신을 바라고, 나약하기에 우리는 성장할 테니까.

    ― 그러려면 먼저 각자의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폭동의 근간이 된 건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자의 존재였다. 무성한 소문에 휩싸여, 마치 구원자가 되어 버린 그녀의 존재가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공포를 불러왔다.

    인신매매와 같은 짓을 벌여 이종족과 결탁을 벌이던 자들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들은 되레 이런 세상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해 살고 있었다. 제국에서 인간들의 위치가 아무리 높았다고는 해도, 그건 그래 봤자 이종족과 인간 사이였다. 같은 인간들끼리는 또 달랐다.

    평민은 자신이 귀족이 아닌 것에 불만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즐겼다. 그러나 빈민가 레타와 같은 지역의 백성들은? 모리아와 같이 극한 차별을 받는 땅의 주민들은? 그들에겐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약탈로 무법 지대를 누비는 지금이 오히려 그들에겐 더 살기 좋을지 모른다.

    ― 마을을 빼앗기지 마세요. 더는 땅을 더럽혀서는 안 돼요.

    자신의 예상보다 내부 폭동이 더 빨리 일어났다. 하이에나가 당긴 불씨 탓이겠지. 일라이저는 시선을 들어 올려 잿빛 하늘을 쳐다보았다. 맹금류로 보이는 것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독수리만이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이 향하는 곳은 늑대의 영지 쪽이었다.

    *

    목이 졸렸다. 오늘도 그녀의 꿈속에 나타난 아비가 목을 조르며 폭언을 쏟아 내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감히 짐을……! 짐을 능멸하려 하다니!’

    제가 언제 폐하를 능멸하려 했습니까? 그러나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 나간 말은 다른 것이었다.

    ‘다, 당신 같은 사람은…… 주, 죽어야 해……!’

    목소리도 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엘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아귀힘은 생각한 것보다 억셌고 정말로 그녀를 죽일 것처럼 목을 조여 왔다.

    ‘죽어라. 그토록 원한다면 친히 해 주지.’

    아. 이게 내가 그리 바라던 고요한 죽음인 걸까. 그러나 꿈속에서조차 그녀는 고요하게 죽지 못했다. 이엘은 희뿌옇게 변해 가는 선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읍……!’

    무언가 작은 형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저게 뭐지? 그녀가 탁해진 시야로 그것을 알아보기도 전에 목을 조여 오던 황제의 아귀힘이 풀렸다. 스릉― 그가 검을 집어 들고 올라타 있던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황제의 옷을 움켜쥐었다.

    ‘아, 안 돼!’

    ‘놔라.’

    ‘미치광이……. 당신은 미쳤어……! 저, 정말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아니……. 당신은 고, 곧 죽…… 윽!’

    선황의 손이 다시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번엔 정말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푸악! 입에서 핏덩이가 터져 나왔으나 그는 힘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띠며 체중을 실어 힘을 더할 뿐이었다.

    ‘죽기나 하시오.’

    그렇게 명멸하듯 시야가 껌뻑거리다가 암전됐다.

    “컥……!”

    목을 붙잡으며 벌떡 일어난 이엘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요즘처럼 잔업이 많아 제대로 숙면하지 못할 때면 악몽을 꾸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꿈은 처음이다. 평소와 다른 꿈이었는데도 마치 겪어 본 경험처럼 너무도 생생해서……. 이엘은 무릎을 끌어 모으고 양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귓가에 잔인한 아비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저 좀…….”

    죽음을 겪었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었다. 무언가 엄청난 극도의 두려움이 찾아왔다. 목이 졸리는 틈에 내가 봤던 건 뭐지? 뭔가 엄청 작고 가녀린 것이었는데. 선황이 그것을 쫓아갈까 두려웠다. 죽어 가던 와중에도 그게 눈에 밟혀 심장이 아팠다.

    그게 뭐지? 왜, 이 꿈은 대체 뭐지……?

    “아……!”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코끝이 시큰거리는 걸 보니 눈앞이 흐려진 이유가 눈물 때문인가? 나약한 스스로를 탓하며 눈물을 억눌러 참았다. 울기 싫다. 적어도 아버지 때문에 더는 울고 싶지 않아.

    그자는 죽었어! 죽었단 말이야! 그만해……. 나를 그만 좀 찾아와, 제발……. 나 좀 놔둬요, 아버지.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생각이야? 혼자 죽어서 그래? 나랑 이온은 살고, 당신만 죽은 게 억울해서?!

    나를 버렸잖아. 당신은 끝까지 나만 버렸잖아. 루스 경에게 이온을 맡겼으면서, 나는 황녀궁에 유폐해서 버렸잖아. 불타는 황녀궁에서 약탈을 당하고 덜덜 떨었단 말이야. 죽어 버린 당신처럼 나도 거기서 죽어 가고 있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났을 뿐인데, 왜 자꾸 내 피를 말리는 거야.

    왜 행복해질 만하면 나타나서 나를 괴롭게 해…….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원히 선황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엘?”

    하늘이 빙빙 도는 기분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당황한 듯한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 울어?”

    제 흐느낌을 듣고 찾아온 피시가 방문을 열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 고립된 것처럼 차가웠던 공간에 온기가 찾아들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 피시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엘은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저 멍하니 피시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엘…….”

    꽤 피곤한 하루를 보냈던 터라 일찌감치 방에서 잠을 청했던 피시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신음에 눈을 번쩍 떴다. 잠결에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맨발로 정신없이 달려와 이엘의 방문 앞에 섰고, 그녀의 흐느낌을 듣자마자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마주한 게 울고 있는 이엘의 모습이라니. 충격을 받은 피시는 우물쭈물하며 발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그녀가 앉아 있는 침대께로 다가갔다.

    “꿈꿨어?”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도 이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피시의 손등에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옆에 있어 줄게.”

    피시는 발작하며 겁에 질릴 때마다 자신을 달래 주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곤 이엘이 했던 것처럼 그녀를 달래 주려 했다. 그녀보다 훨씬 커다란 팔을 벌려 꼭 안아 주었다. 작은 체구가 제 몸 안에 들어오고도 자리가 남았다.

    “울어도 돼.”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그의 옷깃을 쥐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어느새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피시는 제 가슴팍이 눅눅하게 젖어 가는 것을 느끼며 함께 슬퍼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그 위에 입을 맞춰 주며 진정시키는 것에만 전념했다.

    “내가 나쁜 건 다 없애 줄게.”

    “…….”

    “행복하게 해 줄게.”

    허세다. 자신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가진 능력도 제어 못 하는 게 무슨…….

    “혼자 떠안지 마. 응?”

    제 앞에서 이엘은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고,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이나처럼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조이나처럼 자신의 왕이 될 만한 여자였다.

    그래서 아픔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죽는 순간까지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던 조이나처럼, 강하고 담대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독한 상처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나 노력하고 있어. 네 옆에 서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흐느낌이 조금씩 멎어 간다. 피시의 목소리는 이엘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재잘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앞으로도 더 노력할게. 치료도 받을게.”

    “…….”

    “네가 없어도 괜찮아질 수 있게, 네 발목을 잡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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