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네가 말한 네 상태는 자연을 어그러뜨리는 일이야.”
“…….”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날 때부터 불임도 아니고, 선택적인 피임이 가능하다니. 그렇다고 약을 먹는 것도 아니란다. 그것과는 결이 다른 형태라고……. 이건 말이 안 돼.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하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말해. 너도 나처럼 피험체였어?”
“인간의 힘으로도 이건 불가능해요.”
“피임은 인간도……,”
“레니. 저는 단순한 피임과는 달라요.”
“…….”
“세포가 아예 사라져요. 몸에서 말끔히.”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잡힌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임신 가능성이 아니라 임신 그 자체요. 저는 임신 그 자체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무슨……,”
“신께선 피조물을 조화롭고 완벽하게 만드셨다고 했죠.”
신이 만들지 않고,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 종종 있다. 이를테면 보호석과 같은 것들. 그런 것은 신의 뜻에 위배되는 물건이었다. 때문에 그걸 만들기 위해선 오드와 같은 종족들이 자신의 수명과 피를 바쳐야 했다. 그걸 없애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고.
대가란 그런 것이다.
“저는 신이 아닌 다른 것과 손을 잡았어요.”
“…….”
“정신계 능력을 갖고 있는 이종족이 절 홀려도 없어졌던 세포는 돌아오지 않아요. 내가, 내 스스로 의지를 갖고…… 정말 아이를 갖고 싶을 때만요. 그때만 돌아와요.”
“너…….”
“당신 말대로 신의 뜻을 완전히 거스른 행위예요. 조화롭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은 모습이죠.”
그는 왜 그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 선택이 아니었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 결국 이도 저도 포기하지 못한 제 탓이었다.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해 벼랑으로 몰려 버린, 오롯한 제 탓이다.
“신을 떠난 행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너도 알잖아.”
“알아요.”
“…….”
“갚을 준비도 됐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엘의 웃음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던 레온이 잡은 손을 제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만만치 않을 거야. 인간이 우리에게 했던 짓으로 이런 결과가 초래됐듯이, 네 선택으로 너 역시 힘들지 몰라.”
“각오했어요. 어차피 전 처음부터 험난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신의 가호가 네게 닿기를 바랐는데.”
“…….”
“네가 신을 버리면 어떡해.”
그래도 인간은 신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었잖아. 그런데 네가 먼저 신을 떠나면 어떡해. 그의 목소리 곳곳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서려 있어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글쎄요. 차라리 신을 먼저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적은 있어요.”
뒤늦게나마…….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랐지만, 너무 늦었겠지요.
“같이 해.”
“네?”
“네가 갚아야 할 것들. 나랑 같이 갚아.”
“…….”
“네가 잡았다던 그것에게 갚아야 할 대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같이 갚아 나가자.”
이엘은 모호하게 웃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레온에게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레온 몰래 제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를…….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거니.’
오드와 성전이 완벽한 결계를 이루던 노아의 영지에선 ‘그것’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언제든 부르면 만나 줄 거라고 했으나 신의 힘이 더 강한 곳에선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서 밤을 타, 로날드와 함께 영지 밖으로 나가 다시 그와 마주했었다.
‘싫다고 거절한 건 네 쪽이었단다. 기억 안 나니?’
‘지금은 달라졌어요. 그때의 거래에 응하고 싶어요.’
‘뭐, 좋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드니까.’
‘…….’
‘그렇게 네 오라비를 살리고 싶니?’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명백하게 웃고 있었다. 이엘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하나는 버려야 했다.
‘다만 나는 널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구나.’
‘약속해요. 제 목숨을……!’
‘아니. 그것 말고.’
‘…….’
‘네가 정말 이 세계를 망치려고 하는 건지.’
‘…….’
‘망치는 척하는 건지.’
그가 제 속마음까지 읽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엘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시험이 끝나길 기다렸다.
‘왜 내 눈엔 네가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
‘그럴 리가요.’
‘왜 내 눈엔, 네가 이 세계를 지키고 싶어서 날 찾은 것처럼 보일까.’
‘단순해요. 오빠를 살리려고 필요한 것들이 너무 어려우니까요.’
‘…….’
‘저는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담담한 그녀의 말에 목소리가 침묵했다. 이엘은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어차피 주드가 죽었어요. 그나마 정을 줬던 애마저 죽었으니까…… 더는 필요 없어요.’
‘…….’
‘절 마음대로 하고 싶었잖아요. 못 믿는다면서요. 내키지 않으면 저를 죽이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무언가를 버려야 했기에, 이엘은 스스로를 버리기로 했다.
‘움직일게요. 이 세계를 제 방식대로 무너뜨릴게요. 그러니까…… 이온을 살려 주세요, 제발.’
왜냐하면 자신은 누군가의 장난처럼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으니까. 이제 제 목숨보다 소중해진 것들이, 너무 많아졌으니까.
‘좋아.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으니, 그렇게 하자꾸나. 다만.’
‘…….’
‘네 오라비의 목숨값이 너완 달라, 더는 네 목숨과 동등한 가치가 될 수 없구나.’
‘네? 전에는 제 목숨을 달라고……!’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천칭에 무게를 달아 가치를 매기고, 체스판 위에 세워 둔 자신을 방관하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제 세상과 제 삶은, 힘없는 체스 말보다 못하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고, 너는 처음의 네 모습보다 가치가 떨어졌다. 네 수명도, 네 존재의 가치도. 모두 떨어진 지금, 어떻게 네 오라비와 동등할 수 있겠니.’
‘…….’
‘네 아이 말이야.’
언제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체스 말과 같았다. 쥐면 그대로 으스러지고, 뒤집으면 그대로 떨어지는. 주체만 달라졌을 뿐, 객체인 자신은 변한 게 없었다. 이온의 목숨은 저당 잡힐 만큼 가치가 있고, 제 목숨은 그저 하찮은 체스 말에 불과했다.
‘첫아이의 목숨값을 합치렴.’
너는 신의 축복을 받은 소중한 아이야. 신은 너를 사랑하셔. 신은 너를 사랑하셔서 남겨 두셨단다. 네가 너무도 살고 싶어 했기에…….
어느 날의 오드가 그렇게 말했다. 신께선 나를 선택하셨고, 나를 사랑하셨기에 살려 주셨다고. 그래, 그랬구나……. 내가 신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는 내 절망을 원한 것이다. 신의 사랑을 받은 자의 타락으로, 신을 이기기 위해.
나는 또다시 흔들리는 손바닥 위에 서 있었다.
‘첫아이를 낳아 그 피를 바치는 날.’
‘…….’
‘모든 게 끝날 거란다.’
‘…….’
‘너의 이 긴 생애도, 시련도, 고난도. 네 오라비의 혼수도.’
목표는 세상의 멸망이 아닌, 자신의 타락. 자신의 몰락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수를 쓰면 곤란해. 아무나 흘레붙으면 무슨 의미가 있니.’
‘…….’
‘네 사랑이 동반하지 않은 임신은 의미가 없다는 걸 기억하렴.’
어린 시절의 제 전부는 이온이었다. 제 사랑을 오롯이 받을 존재도 이온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저가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그 아름다운 감정을 이제야 겨우 배웠는데…….
문득 눈앞에 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저를 향해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늘 감정을 억눌렀다. 표현하지 않도록. 들키지 않도록. 아무도 모르도록. 그래서…… 더는 뺏기지 않도록. 그랬는데…….
‘그럼 다 끝나나요?’
‘…….’
‘그럼 정말…… 제 불행도 끝이 나나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추악하게 타락시키기 위해 나를 골랐구나. 이엘은 주억거리며 제 배를 내려봤다.
‘사랑 없이는 씨앗을 뿌릴 수 없고, 사랑이 없이는 거둘 수 없단 소리죠?’
처음부터 버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버릴 수 없는 존재라서.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졌다. 모든 걸 지킬 수 없어. 주드의 세상을, 당신의 세상을, 그리고 오빠 너의 세상을 지키려면 버려야 해, 내 자신을.
그러니까, 오빠. 살아 줘. 꼭, 나를 위해 살아 줘. 나는 오빠를 그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해. 이온, 너는 내 자신 그 자체야. 너를 지켜 나를 살릴 거야. 네가 살아 나를 지켜. 내 존재를 기억해 줘. 이온, 그렇게 너를 사랑해. 내 하나뿐인 가족.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하고 아껴.
나는…… 그렇게나 지쳤어.
“오헬. 내 말 들려?”
“네. 들려요.”
“괜찮아. 너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돼.”
“…….”
“내가 함께할 테니까. 알았어?”
고요한 죽음……. 내 긴 생애도, 시련도, 고난도. 그게 지독하게 이어진 이온과의 줄을 끊어 낼 유일한 수단이었다.
“내가 함께할게.”
그게……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당신들에 대한 내 이기적인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