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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20화 (220/488)
  • 220화

    ‘넌 가끔 내가 우논이란 사실을 잊는 것 같아.’

    로빈과의 만찬 이후 쫓기듯 나왔던 영지 끝에서 이엘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녀를 향한 죄책감에 안절부절못하던 때에도 이엘의 안부가 자신에겐 가장 중요했다.

    그녀가 로빈의 영지로 가야만 하는 이유 중에는 몸속에 남아 있는 로빈의 독도 한몫했다. 로빈이 던져 준 해독제는 이종족을 낫게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인 이엘을 완전히 치료하기엔 부족했다. 왕이 직접 뿌린 독을 거둬 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그녀의 몸 안에서 똬리를 틀고 꼼짝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노아는 로빈이 영원히 독을 제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이엘은 로빈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를 떠날 수 없게 될 테니. 살기 위해 스스로 로빈에게 가야만 할 테니. 그런 식으로 이엘을 붙잡아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로빈은 자살 소동으로 혼절한 이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뿌려 놓은 독을 남김없이 모두 가져갔다. 혹 독이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할까, 제 종족의 미미한 독마저 말끔히 제거해 그녀를 지켜 왔다. 이엘이 자신하며 로빈의 영지로 가려 했던 이유가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게 아니라, 정말로 자살 시도까지 그녀의 계획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너는 내 곁을 떠날 때부터 그 일을 각오했던 건가…….

    노아의 흐리멍덩한 시선이 탁자 위에 닿았다. 그곳엔 차마 다 적지 못한 그의 편지가 수십 장이나 쌓여 있었다. 레온이 하이에나에게 가겠다는 말을 했을 때 전해 주고 싶었으나 끝내 그곳에 닿지 못하고 이곳에 버려졌다.

    ‘아르세니온 황자는 언제나 제게 빛이었어요.’

    그녀의 말을 떠올리니 또다시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이종족의 시선이 제 영지로 쏠려 그녀를 하이에나에게 맡겨 둔 것이 불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간을 벌어 준 것 같아 안도했다.

    겁이 났다. 괜찮다고 말하는 이엘의 얼굴이 자신을 겁나게 만들었다. 자신이 일라이저를 볼 때마다 루시우스를 떠올리듯, 그녀는 자신을 볼 때마다 그녀의 오라비를 떠올릴 것이다.

    스스로가 이토록 겁이 많았음에 자조했다. 용맹함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그것도 감정 앞엔 부질없음을 느꼈다.

    그날 밤 노아는 술에 잔뜩 취한 덕에 선잠이었으나 오랜만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짧은 꿈이었지만 11년 전 그날이 꿈에서 완벽히 재현됐다. 레온은 선황의 목을, 르네는 황녀의 목을, 그리고 자신은 황자의 목을 베는.

    그러나 차라리 그 꿈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이튿날 전해진 소식은 제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기에 충분했으니까.

    *

    회의가 마련된 곳에 착석한 수는 많았으나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 때문에 얼어붙은 건 앤디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의 폭동이야 그렇다 쳐도……. 그는 어안이 벙벙해 연신 입만 벙긋거렸다.

    “그래서.”

    눈가에 피로를 잔뜩 달고 등장한 노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상태였다. 왕의 등장에 우논들이 일제히 절했으나 그는 상석에 앉아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어제도 제대로 못 잔 건지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고 포도주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저래서는 술에 취하다 못해 절은 폭군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말해. 뭔 일인지 제대로 얘기하라고.”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늑대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한 피로함에서 기인한 노성이 아니었다.

    “왜 그녀가…….”

    뒷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늑대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이래.”

    한참 만에 말문을 튼 건 스완이었다. 소문을 듣자마자 그는 이엘을 채근해 진실을 물었고, 그녀는 맞다는 대답만 남긴 채 지금까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게 가능……,”

    “가능하대.”

    당황한 앤디의 말허리를 끊고 스완이 대꾸했다. 무슨 방법으로 그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엘이 자신들에게 거짓말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정도를 넘어선 충격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이제야 알려 주는 걸까. 그것도 자신들은 직접 들은 게 아니라 건너 들었다.

    “유클리드가 말을 지어냈을 확률은.”

    “없습니다.”

    “…….”

    “적어도 유클리드 님은 거짓말을 할 만큼 복잡한 생각을 하진 않으시니까요.”

    지난밤 스라소니의 영지로부터 각 종족에 이상한 소식이 전해졌다. 마치 일부러 스라소니에게 소식을 흘린 것처럼 정보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불행 중 다행은 오헬의 위치를 유클리드 님만 아신다는 점입니다. 나머지 종족들은 이곳으로 몰려드는 중입니다.”

    “차라리 불임이라면 좋을 텐데.”

    중얼거리듯 탄식과 함께 터진 그의 혼잣말에 늑대들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봤다. 이종족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텐데……. 차라리 완전한 불임이었더라면, 늑대의 보호 아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그때 말한 그녀의 계획인가 보군요.”

    안드로의 낮은 음성에 노아는 눈을 감았다. 아이를 담보로……. 웃음이 나오는군.

    인간이 이종족의 아이를 갖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다. 특히 모체가 인간일 경우는 과정과 결과 모두 모체에게 위험하다. 그래서 노아는 설령 그녀의 마음을 얻어 반려로 받아들여도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완전한 불임도 아니고 자기 의지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라니. 그녀의 안위 따위 생각도 않는 이종족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아이를 갖기 위해 달려들겠지.

    그러나 반대로 설명하면 그것만큼 이엘에게 좋은 협박도 없다. 허락된 종족에게만 아이를 갖겠다고 하면, 그 어떤 종족의 왕이 반발하겠는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전쟁이라 해도 그들은 기꺼이 그 일을 벌일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같은 이종족을 모조리 죽여 홀로 살아남는 자의 새끼를 갖겠다고 말해도 이종족은 본능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이종족이 맹목적으로 그녀의 생명을 지켜 줘야만 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정신이, 의지가 새끼를 갖는 것이라면…… 이종족은 여자의 몸이 아닌 ‘나타니엘’을 지켜야 한다.

    “유클리드 님이 아셨다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닙니까? 폐하. 당장이라도 하이에나의 영지로 가서 오헬을 데려와야 합니다.”

    앤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자칫하면 미치광이에게 오헬을 빼앗길지 모른다. 유클리드라면 그녀를 납치해 무엇이든 할 놈이니까. 미친놈답게 종족의 번영보다 제 생각만 해도 문제요, 미친놈답지 않게 종족 번식 생각만 해도 문제였다. 뭐가 됐든 놈은 존재 자체가 해악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퍼진 근원지가 스라소니입니다. 뱀이라면 또 몰라도 스라소니에게서 그 소문이 시작될 리가 없습니다. 오헬이 직접 나선 게 아니라면요.”

    “뱀?”

    “로빈 님이 오헬이 여자임을 아셨음에도 건드리지 않았던 점.”

    “…….”

    “그게 단순히 자살 소동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뱀은 알고 있었단 소리야?”

    “그런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안드로의 목소리를 곱씹던 노아가 앤디를 향해 명령했다.

    “르네 불러와.”

    “예, 폐하.”

    뱀의 영지에서도 한차례 소동이 있었더라면 줄곧 지켜봤던 독수리가 모를 리 없다. 왜 제게는 숨겼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

    “미쳤군.”

    패티스가 혀를 차며 짧은 평을 내리자 곁에 있던 하이에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스라소니의 영지는 광물 자원이 넘치기로 유명하지만 구태여 재력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닌데 저게 무슨 꼴인가. 며칠 전 공사를 마무리 지은 성벽 바로 앞에 스라소니들은 진을 치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의 앞잡이는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갖가지 보석과 자원을 가져온 선발대에 이어서 저 멀리 후발대도 경계를 넘는 게 보였다. 이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하이에나들은 진작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돌아가라.”

    “황녀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동맹 제안을 거절한 건 너희 왕이다.”

    “폐하께선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여 동맹이 아니라 절대적 복종이라 할지라도 그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퍽이나. 네놈들의 왕이 퍽이나 그리하겠다. 조소와 함께 패티스가 몸을 돌렸다.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사실 진위를 가리기 위한 쪽과 진위 따위 관계없이 눈치 싸움을 시작한 쪽. 어차피 나타니엘이라고 하는 여자에겐 늑대를 비롯한 막강한 지지대가 있다. 유일하게 맞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뱀은 순식간에 몰락했고, 그들의 동맹족마저 탈선해 처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스라소니처럼 제법 강한 종족이라면 전자일 테지만, 대다수는 후자를 택하겠지. 눈치 싸움이 더 심해질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이종족은 나타니엘에게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으니까. 본능이란 그런 것이었다.

    “전하. 어떻게 할까요?”

    “놔둬라. 함부로 침입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둬. 어차피 놈들은 유클리드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

    “예.”

    “인간 마을에 다녀오겠다던 정찰병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곧장 왕성으로 가라 이르겠습니다.”

    “수고해.”

    테르의 등에 올라타 왕성으로 가는 내내 그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신들도 저런 꼴이 될 뻔했다.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해 남의 영지에서 아등바등하는 꼴이란. 처음으로 피시의 존재가 종족에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엘의 비밀은 다른 종족에게 충격과 기대를 동시에 안겨 주었지만 하이에나에겐 무의미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언젠가는 종족 번식의 본능을 억누르진 못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피시가 그녀의 부군으로 자리하고 남은 후일 테니 상관없다.

    “어리석은 형님이 이런 거라도 잘해야 할 텐데.”

    분명 그 생각에 흡족해야 하는 게 맞는데도, 언젠가부터 패티스는 불쾌한 감정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왜 이런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하이에나에겐 이엘의 비밀은 큰 화젯거리가 아니다. 그러니 영지 내에서 심기가 불편한 것은 저 갈기 달린 놈밖에 없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수고했다. 영지 밖은 어떠한가?”

    “예상대로입니다. 스라소니가 진을 쳤습니다.”

    “그만 돌아가서 쉬어.”

    “예.”

    “오헬. 일 끝났으면 나랑 얘기 좀 해.”

    성으로 돌아온 그를 반겨 주는 이엘의 뒤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레온이 서 있었다. 패티스는 레온과 이엘을 흘긋 쳐다보다가 망토를 휘날리며 성 안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난 이엘이 한숨과 함께 뒤로 돌았다.

    “기만한 건 아니에요.”

    “넌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레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의 앞에 다가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엘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울컥 밀려오는 서운함을 삼키고, 레온이 그녀를 불렀다.

    “오헬.”

    “…….”

    “왜 피해? 왜 내 시선 피하냐고.”

    “피한 적 없어요.”

    “네 비밀, 그거 숨겼다고 화난 적 없어.”

    살다 보면 누구나 상처가 생기고, 그로 인해 비밀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특히나 네겐 이 세계가 끔찍할 정도로 위협적일 텐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레온은 이엘이 자신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나 좀 봐.”

    “레니.”

    “신이 만든 세상은 조화롭고 완벽해.”

    “…….”

    “나처럼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면.”

    “타이곤이나 라이거는 인위적인 게 아니에요. 정상적인 관계로 태어나기도 하잖아요, 나드처럼. 부탁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레니.”

    “이제야 날 보네.”

    레온이 한숨처럼 속삭이며 이엘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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