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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9화 (219/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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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화

「당신의 귀여운 아이들은 사체를 좋아하니, 가장 아끼는 아이들에게 주십시오. 맛이 기가 막힐 겁니다. 혹 더 많은 머리를 원하신다면 언제든 잡아 바치겠습니다. 아! 그러나 혹시 제 아이들을 원하신다면…… 그건 조금 난처합니다. 이래 봬도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왕인지라……. 뱀이 싫으시다면 다음엔 매가 어떠신지요? 날개 있는 것들도 제법 맛있답니다.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을 담아, 당신의 영원한 동맹 유클리드.」

일그러지는 이엘의 표정을 지켜보던 레온이 편지를 홱 가져갔다. 그는 빠른 속도로 글을 읽다가 손으로 종이를 구겨 버렸다.

“이런 놈이랑은 상종도 하지 마.”

패티스는 안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듯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대단히 미친 종족의 대단히 미친 왕이, 그녀에게 대단히 미쳐 가고 있었다. 이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다.

“폐하. 스라소니와는 완벽히 끊어 내는 편이 좋겠습니다.”

“끝에 ‘영원한 동맹’은 또 뭐야. 이게 말이 돼?”

“폐하께선 스라소니와 동맹을 맺지 않으셨습니다. 저쪽의 왕께서 제멋대로 구는 것일 뿐.”

패티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 빠르게 일축했다.

“저희는 무엇이든 폐하의 뜻을 따르겠으나, 혼인 동맹은 거절하시는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혼인 동맹?”

하다 하다, 뭐? 혼인 동맹? 기가 막힌다. 레온은 유클리드의 미친 행보에 입이 벌어졌다. 이쪽에서 내민 동맹 제안을 거절하고, 혼인 동맹을 역으로 제시했다고? 정치나 세력에 관심이 전혀 없는 유클리드라면 저 제안은 종족을 위한 게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제안이었으리라. 놈은 갱생도 안 되는 미친놈이니까.

“안 돼. 절대로 안 돼. 하지 마, 동맹.”

“어차피 할 생각 없었어요. 별로 믿을 수 있는 종족도 아니고요.”

“앞으로도 이런 식의 동맹 제안을 하는 놈들은 다 거절해. 알았지?”

“그건 필요에 따라 고민해 봐야겠죠?”

“뭐?”

“농담이에요.”

이엘이 웃으며 놀리듯 레온을 쳐다봤다. 잠시 발끈했던 그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곤 투덜거리듯이 이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고민할 거면 나부터 해.”

“…….”

“네가 그런 고민할 거라면, 나는 늑대와 동맹을 끊어서라도 네 손만 잡을 거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해도 부끄러웠던 건지 레온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이엘은 적당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만 봐. 퉁명스러운 레온의 말에 이엘은 엷게 미소 지으며 구겨진 편지를 재차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끝내 웃음이 터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늘 분위기가 차분하게 누그러져 가는 듯해서.

그는 제게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

“왜 안 껴?”

“그냥.”

“잘 어울리는데.”

피시가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지만 이엘은 서랍 안에 반지를 넣어 둘 뿐이었다.

자신의 반지가 돌고 돌아 다시 제 손으로 돌아왔다. 처음 이것을 팔 땐 주드를 살리는 것에 급급해 앞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찾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건, 자신마저 이 반지를 가볍게 여긴 탓이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물건이다. 그냥 보석에 불과한.

오히려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론 후작가의 가보가 더 가치가 있었다. 물론 그 반지는 폭탄을 끼워 폭발하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흔적도 남지 않고 박살 났지만.

그러고 보니 이카르는 자신이 어머니의 반지를 그런 곳에 사용했는데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엔 언제나 물불 가리지 않던 사람이 별일이다.

그 생각을 하며 서랍을 완전히 닫았다. 한편 피시는 자신의 생각보다 그녀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아 서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건넸다.

“엘. 오늘은 언제 돌아올 거야? 오늘도 늦어?”

“응, 오늘도 회의가 길어질 것 같아.”

“그렇구나. 알겠어. 조심히 다녀와.”

소파에서 일어나 이엘의 곁으로 다가간 피시가, 습관처럼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입술을 짧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이엘은 업무가 밀린 자신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피시의 안색을 살폈다.

“피시. 정말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요새 식사도 같이 안 하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괜찮아. 어서 다녀와. 기다릴게.”

“늦어지면 네 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있어. 기다리지 말고.”

“응.”

언제나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피시였는데, 며칠 전부터 부쩍 기운 없어진 얼굴로 침실 밖으론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엘은 걱정스럽게 피시를 지켜보다가 다녀오겠다며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피시는 이엘이 잠들었던 침대로 걸어가,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감기가 낫자마자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보통 때였다면 피시도 느지막이 일어나 이엘의 집무실로 졸래졸래 따라갔을 테지만, 레온이 온 뒤로는 줄곧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만 했다.

‘어리긴.’

‘뭐? 내가 당신보다 훨씬……!’

‘성장한 몸뚱이를 말하는 게 아냐.’

외관만 보면 피시보다 레온이 훨씬 어렸다. 그러나 우논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고, 또 겉모습이 정신적 성장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을 생각이야?’

레온이 영지에 도착하던 저녁. 종족 간 사이는 나빴지만 형식적으로는 귀빈이었기에 하이에나들은 작은 규모로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피시는 레온을 처음 마주했다.

외관은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였으나 무려 네 종족을 이끌고 있는 왕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의 그는 상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완벽한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늑대의 왕, 노아…… 그 남자처럼.

‘너 때문에 우리 계획이 다 틀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왕자.’

‘…….’

‘더는 오헬의 길을 막지 마. 네 존재가 그녀에겐 짐이 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존재가…… 짐이 된다고? 자신이 억지를 부려 이엘이 늑대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란 건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어, 조금씩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레온의 말이 맞다. 나는 그녀의 짐이 되고 있어…….

‘너희 종족이 암컷에게 어느 정도로 목을 매는지 대충 알아. 하지만 네가 짝짓기 상대로 오헬을 고른 게 아니라면, 이만 놔주는 게 어때.’

‘무슨…….’

‘오헬은 고작 수컷 하나에 갇혀 살 존재가 아니란 소리다.’

‘…….’

‘그녀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질 파트너가 필요한 거지, 겨우 부부의 연이나 맺을 수컷을 찾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소리였다. 레온의 말에 적잖게 충격을 받은 피시는 그날부터 침실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패티스는 자신에게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란 소리를 했다. 그게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며. 패티스가 자신에게 바란 것도 결국 그 정도였다. 알랑대며 비위나 맞추라는.

왜냐하면 나는 온전치 못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니까…….”

피시의 젖은 눈동자가 창을 가린 커튼에 닿았다. 그의 능력은 고작 저 커튼을 걷어 내는 정도에 그쳤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칠 만큼 넘쳐 나서. 스스로 제어도 못 할 정도로 부하가 걸렸다.

하지만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나도 엘에게 의지만 하는 게 아니라, 엘이 내게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생소한 감정이었다. 눈이 닿는 곳에 펼쳐지는 제 능력이 무서워 봉인하듯 가두기도 하고, 안대로 눈을 가리기도 했다. 하다못해 조이나의 안경으로 잘 보이는 시력까지 차단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던 시절도 있었다.

그랬던 피시가, 이 눈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나는 조이도 포기할 정도로 구제 불능인데.”

커튼을 움직이는 정도보다 조금 더 힘을 쓰는 순간, 창문이 세차게 흔들렸다. 깜짝 놀라며 잔뜩 우그러든 피시는 그녀의 침대 시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나 좀 가만둬! 그만 괴롭히라고!

꽃이 성화를 부리며 잎을 파드득 떨었다. 그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앤디가 황당하단 낯으로 꽃을 노려봤다. 저게 꽃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네? 왕께서 저한테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알긴 아나?

그의 말처럼 노아는 하찮은 꽃 따위에 쓸데없이 온갖 정성을 퍼부었다. 마치 누군가를 대신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개화 시기를 맞아 활짝 피어난 꽃은 주인도 못 알아보고 왕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짜증을 부렸다.

“폐하.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꽃은 그냥 확 갖다 버리시죠?”

앤디의 말에 시클라멘 꽃이 또 한 번 포악하게 성질을 부렸다. 무슨 꽃이 저렇게 우악스러운지 모르겠다. 매번 노아의 집무실에 올 때마다 저놈의 성질 때문에 애먼 늑대들의 기가 죽었다. 의외로 늑대는 여린 것에 한없이 약해서, 저 작은 생명체가 짜증을 낼 때면 꼬리를 내리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놔둬. 귀엽잖아.”

“네에?!”

― 흥, 눈은 제대로 달려 있네.

앤디와 꽃이 동시에 대꾸하자 노아가 피실 웃음을 터뜨렸다. 종종 왕이 저 꽃을 보며 실성한 것처럼 웃긴 했는데 저런 대답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앤디는 반쯤 넋이 나간 채 황망하게 꽃과 노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게 귀엽다고요……?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그건 됐고, 그래서 일라이저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인간들도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 합류해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내부 폭동 어쩌고 그러긴 했습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영지 밖으로 내보내는 게 시급했거든요.”

결국 인간들 사이의 내분도 점점 커져 가는 모양이었다. 그걸 통솔하기 위해 떠난 일라이저의 소식에 노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폐하?”

“피곤하군. 알겠어, 다 나가.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까.”

“예.”

앤디를 비롯해 모든 늑대들이 노아의 집무실을 총총히 빠져나갔다. 모두가 나가고 조용해진 공간에서 노아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어섰다.

“이제 한계 수준인데…….”

― 그러니까 잠 좀 자!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아나?”

― 흥. 네 히스테리에 내가 죽겠어!

그 말과 함께 시클라멘은 꽃잎을 완전히 닫아 노아와 대화를 차단했다. 누가 보면 매일 괴롭히는 줄 알겠네. 황당함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꽃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괜히 꽃을 건드리고 고민에 잠길 때가 많았으니까.

꽃을 선물해 준 누군가가 생각날 땐 정도가 심해졌고.

노을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깔린 대지를 바라보며 야트막한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일라이저는 이곳을 떠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 떠난 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미래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일라이저를 계획에서 제하고 싶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엘의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답하는 모습에서, 황족에 충성을 다하던 그의 아비가 떠올라 속이 부대꼈다.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으며 잔에 와인을 콸콸 쏟아부었다.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은 갈증에 벌컥벌컥 들이켜다가 미미하게 느껴진 아픔에 몸이 잠시 비틀거렸다. 심장 부근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뱀의 맹독이 이렇게 오래 후유증을 남길 줄이야…….

‘저는 괜찮아요. 로빈이 모두 거둬 갔어요.’

‘…….’

‘이제 작은 통증도 없어요. 폐하는 괜찮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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