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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8화 (218/488)
  • 218화

    *

    “젠장.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군.”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아둔 잔에 포도주를 콸콸 따르고 급하게 들이켰다. 유리잔을 깨뜨릴 듯이 세게 내려놓은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발코니가 있는 문을 향해 걸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눈동자만 형형히 빛났다.

    ‘세상에! 정말로 수선화를 가져오셨어요?’

    ‘그대가 갖고 싶다고 했으니까.’

    ‘너무 예뻐요. 감사해요, 폐하.’

    그 망할 여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여전히 폭약에 먹먹한 귀를 파고들 듯,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로빈 님. 요새는 로빈 님이 잘해 주셔서 너무 좋아요.’

    조금씩 제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니.

    ‘저도…… 노력할게요.’

    ‘무엇을?’

    ‘폐하께 마음을 열어 볼게요.’

    ‘…….’

    ‘아직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지만……. 또 모르잖아요.’

    빌어먹을…….

    ‘제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다면.’

    ‘…….’

    ‘뱀은 싫어도 당신의 아이는 갖고 싶을지도요.’

    늑대에게서 버려져 오갈 데 없어진 연약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제게 붙었다. 처음엔 그저 생존을 위한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진심으로 제게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제 아이를 지켜 주실 거예요?’

    ‘내 전부를 걸고.’

    ‘…….’

    ‘나의 아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될 테니.’

    제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의 여자가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정말 마치 자신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기쁨을 이기지 못한 얼굴로.

    ‘내 아이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처럼 배곯지 않고…… 목숨을 위협받지 않고…… 학대당하지 않고…….’

    ‘내 아이를 감히 누가 학대한다는 거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둔이라면 충분히.’

    ‘제가 당신을 선택하면 되는 건가요?’

    그 말과 함께 까르르 웃었다. 그땐 미세한 틈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일부러 틈을 열어 둔 거였다. 그 여자는 그렇게도 교활하고 영악해서.

    ‘다음엔 내가 당신을 잡으러 올게.’

    감히 나를 잡으러 오겠다고? 도망쳐도 모자랄 판국에, 나를 잡으러 오겠다고.

    ‘내 눈에 띄지 않게 잘 도망치길 바라.’

    그때의 미소가 진짜 네 미소였나? 나를 향해선 그런 식으로밖에는 웃지 못한다는 건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했더니, 제게는 그런 미소밖에 주지 않았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커다란 창 너머로 보였던 성 한쪽이 사라졌다. 연구실이 있던 지하를 포함해 성 전체를 폭파시켰다. 지난 10여 년을 연구에만 매진하며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던 로빈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분노가 차오른 건 아니었다.

    그깟 성 따위. 그깟 연구실 따위가 뭐라고.

    “줄곧 그 생각만 했다는 건가?”

    즐거웠다.

    그래,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지만. 로빈은 분명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이 즐거웠다.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빌어먹을 인간에게 푹 빠져 지낸 것을 이제야 인정했다.

    그래서 너도 같을 거란 멍청한 생각을 했던 거지. 자신의 어리석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녀의 배신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로빈은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조각상과 액자의 유리가 깨져 버렸다.

    “폐하!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소음을 듣고 안으로 들어서던 리플이 로빈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부축을 도왔다.

    “놔라. 성치 않은 네 몸이나 챙겨.”

    “……죄송합니다.”

    “탓하려는 건 아냐.”

    리플의 어깨는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이엘이 끊어 놓았던 인대가 이번 전쟁으로 인해 완벽하게 기능을 상실했다. 로빈은 씨근덕거리던 숨을 겨우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인 리플을 쳐다봤다.

    “치료는 계속 받도록 해라. 뭣하면 레온 놈의 목을 따서 갈기라도 가져다줄 테니. 그래도 그쪽이 가능성이 제일 크니까.”

    “예, 폐하.”

    “스라소니는.”

    “교환했습니다.”

    그 멍청하고 안하무인인 왕의 밑에 있는 것들도 참 불쌍하다. 포로를 교환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복수가 먼저였던 건지 자른 머리를 교환하자는 뜻을 보내왔다. 제 목만 아니면 아무리 동족이어도 관심 없다는 의미로밖에 안 보였다.

    결국 이쪽은 잡힌 스라소니들의 목을, 저쪽은 뱀들의 목을 잘라 맞교환했다. 그마저도 일부만.

    유클리드는 그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왕이었다. 그럼에도 스라소니들이 그 미치광이를 사모하다 못해 숭배할 정도로 능력이 강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협정서라도 보내왔나?”

    “아닙니다. 역시 보내지 않았습니다.”

    “놈의 목을 따지 않는 이상 스라소니는 굴복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늑대 쪽에 붙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클리드 성격에 노아에게 붙을 리가. 차라리 나타니엘을 납치하려는 게 더 놈답다.”

    정보통이 워낙 빠른 종족이니 벌써 그녀의 거취를 알아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영지를 복구하기도 전에 스라소니를 공습한 건 단순히 스라소니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노아의 영지에 있을 리 없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튼튼한 울타리이기는 하나, 이엘이 그곳으로 갈 리 없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로빈이 알게 된 여자는 제 몸 하나 건사하겠다고 쉬운 길을 선택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기 위해 시간을 벌 필요도 있고.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걸까. 의미심장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나를 피해 도망간 것은 아닐 테고…….

    “폐하. 스라소니 쪽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은 계속 감시하도록. 그리고 우리 쪽도 방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놈은 전쟁이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반드시 보복하러 올 것이다.”

    보복하러 오는 게 유클리드답지. 비록 우리의 습격으로 어수선해졌다고는 하나, 전쟁할 여지를 만들어 준 것에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다. 전쟁에 미친놈이니 광분하며 이곳으로 달려오리라.

    그래, 놈이 이곳으로 온다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고. 만일 오지 않는다면…….

    “놈의 시선을 빼앗는 무언가가 달리 있지 않다면 말이지.”

    나타니엘의 거취를 알아낸 게 틀림없다.

    *

    “보지 마.”

    레온이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지만 이엘은 고개를 옆으로 빼서 그의 보호로부터 벗어났다. 패티스가 건조한 시선으로 바닥에 놓인 것을 바라보다가 이엘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습격을 하겠습니다.”

    “됐어. 그걸 노리고 이런 짓을 벌였을 텐데, 뻔히 보이는 술수에 넘어가 줄 필요는 없어.”

    이엘은 그렇게 말하며 저 흉물스러운 상자를 노려보다시피 쳐다봤다. 정보통만 빠른 게 아니라 행동력도 참 빠르다. 이곳에 왔다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레온이 하이에나의 영지에 온 뒤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가 오기 직전까지 그녀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이카르와 밀로가 순차적으로 곁을 떠난 탓인지 괜히 헛헛한 기분이었던 데다가, 짧게 앓고 지나간 감기도 그녀의 저조한 감정에 한몫을 더했다. 그게 아니어도 이제 겨울이 슬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계절이 된 탓이기도 했고.

    그러니 그 뒤에 찾아온 손님이 더 반가울 수밖에. 그 반가운 손님은 여전히 잔소리가 많았지만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제 곁을 지켜 주었다.

    그래서 잠시 간과했다. 지금이 어떤 때였는지.

    “패티스. 서신을 다오.”

    “예.”

    원래 하이에나는 성벽을 따로 세우지 않을 정도로 주변 경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최상위 포식자였고 그 누구도 바다를 갖고 있는 영지에 침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영지엔 이엘이 있었고, 며칠 전엔 유클리드의 공격을 받았다. 주변에 경비 단계를 높여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성벽 건축 역시 그녀의 명령으로 시작했지만 박차를 가하게 된 건 유클리드 때문이었다. 그의 침입은 하이에나로 하여금 긴장감을 조성했다.

    권역 안을 시찰하러 나간 것 또한 최근 들어 생긴 새로운 일과였다. 오늘 아침, 이 새로운 일과를 수행하러 나갔던 정찰병들은 경계 부근에 놓인 상자 여러 개를 발견했다. 처음엔 썩은 내가 나는 듯해서 서둘러 숲을 뒤졌던 것인데, 상자 위에 적혀 있는 이엘의 이름을 발견하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영지로 돌아가니 당신의 생각만 나더군요. 아― 당신은 제게 최면이라도 걸었습니까? 어째서 제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시는 건가요? 저는 이제 당신의 새카맣고 탐스러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당신의 최면입니까? 당신은 이종족이었던가요?」

    미친 소리를 아주 정성스럽게도 적어 놨다. 역시 유클리드의 짓인가. 이엘은 황당한 낯으로 편지와 상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상자 안에는 우논으로 추정되는 뱀의 머리통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제가 당신을 위하여 보복을 했습니다. 이토록 제가 당신께 열렬히 구애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물론 당신 때문에 저는 제 아이들을 몇 마리 양보해야 했지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당신이 나와 혼인하면 아이는 언제든, 얼마든 태어날 텐데요.」

    다양한 의미로,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부류가 몇 있다. 단언컨대 유클리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랭크될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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