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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7화 (217/488)
  • 217화

    결국 피터는 앤디의 부드러운 축객령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앤디는 밖에서 대기하던 늑대 하나를 불러 피터를 안전하게 처소로 돌려보냈다.

    성전 안은 고요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곳엔 오드가 있었는데. 그리고 또 한참 전엔 오헬도 있었지.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가 온 뒤로 이곳은 늘 북적거렸다. 매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늑대들이 있었고, 성가대를 하겠다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엘의 주변을 뱅뱅 도는 어린 테르들도 있었다.

    앤디는 웃다가, 찡그렸다가, 다시 웃기를 반복했다.

    “나야말로 점점 미쳐 가나…….”

    자꾸만 떠오르는 주드 생각에 앤디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드의 죽음은 충분히 명예로웠다. 기사로서도, 늑대로서도. 충성을 맹세하는 늑대의 습성상, 주인을 위해 죽는 죽음보다 명예로운 것은 없다. 그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늑대들은 그녀를 따르게 되었으니까.

    결국 주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알아. 아는데…….”

    젠장. 젠장…….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슬픔을 억누르는 게 고역이었다. 됐다, 더 생각하지 말자. 앤디는 생각을 접고 의자를 끌어와 침대 바로 옆에 놓고 앉았다.

    “그렇다고 자살을 하냐.”

    설령 자살이 아니라 해도 성치도 않은 몸으로 그 높은 계단을 올라간 게 문제다. 그는 멀끔한 일라이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복수심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이종족의 2차 전쟁이 왜 있었겠는가. 1차 전쟁으로부터 무려 10년이란 시간을 삭이며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 그 10년간 설움과 분노를 삼키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인간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오직 복수할 그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니 일라이저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오히려 이만큼 참아 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차라리 이카르를 죽여야지.”

    죽긴 왜 네가 죽어. 앤디는 그렇게 한참이나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일라이저는 그날 저녁 무렵에 정신을 차렸다.

    “몸은 괜찮냐?”

    앤디가 건넨 찬물을 들이켠 일라이저는 짧게 탄식을 하더니 머리맡에 놓여 있던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기억 안 나? 너 탑에서 떨어졌잖아!”

    앤디의 입 모양을 주시하던 일라이저는 뭔가 생각하더니 얕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쌌다.

    “외상은 심하지 않은데 내상은 좀 봐야 될 것 같다. 예전에 머물던 마을에 의원이 있었어? 아는 의사라든가.”

    「괜찮습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다리가 좀 아픈 걸 제외하면요.」

    “죽을 거면 영지 밖으로 나가서 죽어. 괜히 시체 치우게 만들지 말고.”

    “…….”

    “네가 자살하는 꼴을 우리가 봐야겠냐?”

    부러 서늘하게 한마디 했다. 앤디는 일라이저나 피터에게서 자신과 주드를 겹쳐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과 엮이면 엮일수록 자꾸 정만 주게 되니까. 이쯤에서 관계를 끊고 둘 다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폐를 끼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자살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미끄러졌어요.」

    “뭐?”

    「몸이 쇠약해진 것을 간과했습니다. 현기증이 나서 의식을 잃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럼 그 탑엔 왜 간 거야?! 네 처소도 아닌데 왜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데?”

    「찾아보고 싶은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

    「제국서입니다.」

    일라이저의 눈빛은 진지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정말 자살 시도는 아니었나 보군.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하다가 뜬금없는 제국서의 언급에 미간을 좁혔다.

    “제국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뱀의 영지에서 알게 됐습니다. 이전에 늑대들의 습격 때 잃어버렸다고.」

    “있다고 해도 네게 보여 줄 건 아냐. 함부로 볼 수 없는 자료고.”

    「그래서 몰래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저걸 담이 크다고 해야 하나,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 앤디가 혀를 짧게 한 번 차더니 귀찮은 표정으로 제 뒷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제국법과 선황들의 치세를 보려 했습니다.」

    “치세는 무슨. 모조리 폭군이었는데, 뭘.”

    「그래도 그중에 한 분쯤은 성군도 있으셨을 겁니다.」

    “…….”

    「황녀 전하를 위해 그러려고 했습니다.」

    후에 황위에 올랐을 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기용할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라이저는 주저하다가 펜을 고쳐 쥐며 무언가 써 내려갔다.

    「재규어가 멸족된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선 알려지지 않았나? 하긴. 알려졌어도 당시에 일라이저는 어린아이였으니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혹시나 무슨 연관이 있나 하고…….」

    황녀는 보는 눈이 정확했다. 우선 일라이저 자신부터가 그랬다. 잠깐 마주쳤을 뿐인 자신에게 미래를 제안했다. 그녀는 자신이 러셀 가문의 자식이었음을 전혀 몰랐는데도,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할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런 이엘이 선택했다. 전쟁터에서 도망칠 때 늑대도 아닌 재규어의 등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지간한 신뢰가 있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내가 뭔가 놓친 게 있지 않을까 하고…….

    “……넌 참 바르구나.”

    일라이저의 시선이 옆으로 비껴갔을 때 중얼거린 터라 앤디의 말은 홀로 남겨졌다. 흥분하며 울분을 삼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감정을 이기고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보기 시작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저런 생각을 하진 않지. 적어도 녀석에게 루시우스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아버지였을 테니까.

    자신의 아버지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내 대답은 ‘안 돼’야. 제국서는 허락할 수 없다.”

    “…….”

    “하지만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내가 아는 선에서, 진실만을 말해 줄 테니까.”

    제국서를 통째로 넘기는 건 위험하다. 심지어 이엘도 그게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왕의 허락이 필요한 부분이었고, 아마 노아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

    「재규어는 왜 멸족하게 된 겁니까?」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재규어가 왜 멸족했다고 생각해?”

    「재규어를 비롯한 몇몇 종족은 반란과 역모로 죽기도 했고, 잡혀가 생체실험을 당했다고도 들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

    “전부 역모로 죽었어.”

    이종족이 역모를? 통치 자체엔 관심이 없었을 텐데. 의문을 품는 일라이저를 향해 앤디가 다시 한 번 운을 뗐다.

    “라는 건 전부 제국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

    “역모를 위장한 생체실험이 맞아. 그리고 일부는 심심풀이로 죽였지.”

    “…….”

    “우리의 먹이사슬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야.”

    그 안에 담긴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사정을 말해 줄 인간들은 모조리 죽고 없으니까.

    “그러니 내가 말해 주고 싶은 건, 재규어 역시 같다는 거다.”

    “…….”

    “역모죄로 몰려 종족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러 갔던 게 당시 2기사단장.”

    일라이저의 눈이 커졌다.

    “루시우스 러셀. 러셀 후작이었지.”

    아버지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고……. 믿기지 않았으나 황실에 절대적이었던 그의 성품을 떠올리면 아예 거짓말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라이저는 침음하며 제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그날, 그 재규어는 복수를 하러 온 거구나……. 종족을 죽였던 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와 누님들을…….

    “덧붙여 이건 이종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

    “재규어는 역모를 꾸밀 만한 종족이 아니었어.”

    “…….”

    “그걸 네 아버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거울 안 보냐? 넌 네 아비랑 똑같이 생겼어.”

    그래서 이곳에 네 아비와 추억을 가진 늑대들은 네 얼굴만 봐도 괴로워해. 앤디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 말을 눌러 삼켰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재규어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제 신념은 필요 없습니다.」

    “뭐?”

    「저는 황녀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제 신념을 버릴 각오로 임했습니다.」

    설령 그게 복수라 할지라도.

    자신이 따를 존재가 아르세니온 황자가 아닌, 나타니엘 황녀라면. 제 마음의 복수심이란 단어는 사라져야 한다.

    「확인을 하고 싶었던 거지, 복수를 포기할 이유를 찾았던 게 아닙니다.」

    “…….”

    「황녀 전하께서 재규어를 선택하셨다면, 제 사사로운 복수심은 끊어 내야 합니다.」

    억지로 복수심을 누른 건 앤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스스로를 위해 억지로 용서라는 이름을 안고 살았다. 당장의 보복이 큰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으므로 대의를 위해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저는 달랐다. 그것을 초탈하여 맹목적인 헌신과 충성,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 지난 며칠간 침실에서 눈물로 말라 갔던 시간은, 스스로를 버리기 위한 시간이었나. 자신은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이엘만을 위해 살겠다는.

    「이제 제게 과거는 없으니까요.」

    역시 인간은 강한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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