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나 원래 성격 나쁘잖아.”
“또 그런 소리 하시네요. 전 레온 님의 성격 좋아하는데요.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착한 너에 비하면 나는 못됐어.”
그는 손을 뻗어 이엘의 목 위에 댔다. 완전한 봉합이 이루어졌으나 흔적은 여전했다. 다시는 스스로 찌르지 않겠다며 상처를 부러 남겼다고 했다. 이엘은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혹독하고 매몰찼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더없이 너그럽고 관대했다. 타 종족이나 스스로에게 자비 따위 없는 자신과는 달랐다.
“나처럼 못된 놈이 네 곁에 있어도 되나.”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작은 몸짓을 지켜보며 레온은 입술 끝을 당겨 올렸다가 다시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대체 하이에나는 왜 저러는 거야?”
“제가 무리를 이끌게 됐어요.”
“뭐?!”
“사실상 섭정 중이에요.”
섭정이라고 표현하면 하이에나들은 서운해하겠지만. 어쨌든 실정이 그랬다. 왕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하이에나만의 왕으로 존재하기엔 종족의 다름이 너무도 명확했다. 섭정이라고 명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레온은 뭔가 말을 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영지에서도 그녀는 누구보다 빛났다. 어떤 곳이 되었든 그녀는 필요한 존재일 테니. 하이에나는 끈질기게 이엘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도 너를 그런 식으로 붙잡는 거였는데.”
“네?”
“정말 네가 하이에나라도 된 것 같아서.”
“…….”
“짜증 난다고.”
그게 짜증 날 일인가? 이엘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의문을 표하자, 레온은 그녀를 지나쳐 먼저 걷기 시작했다.
“뱀들은 어때요?”
“똑같아. 동맹 종족을 모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일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며칠 전엔 매 쪽에서 연락이 왔어.”
“휴전을 요청했나요?”
“맞아.”
애초에 매와 뱀이 손을 잡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뱀의 영지가 박살 난 순간부터 협정 역시 깨진 것과 다름없었다. 남은 뱀의 세력 중 우세한 종족이라곤 얼마 안 될 텐데. 그마저도 결국 와해되겠지. 계략밖에 모르는 뱀에게 동맹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이쪽에도 스라소니가 왔어요.”
“스라소니? 언제? 노아가 처리해 놔서 한동안 죽은 듯이 살 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요. 별일은 없었고, 동맹 제안을 그쪽에서 거절했어요.”
“설마 유클리드가 온 건 아니지?”
“맞아요. 그 사람이 왔어요.”
레온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 갔다. 놈이 왔다고?!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이엘을 다그쳤다.
“정말 별일 없었어? 그 자식이 허튼짓은 안 했어?! 널 봤어? 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레니. 왜 그래요? 일단 진정해요.”
“다시는 놈과 만나지 마. 그 미친놈이 어떤 식으로 널 유혹해도 넘어가면 안 돼.”
희대의 난봉꾼이 따로 없는 데다가 사고 자체가 괴랄스러운 놈이다. 이종족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그런데 그 유클리드가 이엘을 만나고도 별일이 없었고 동맹 제안까지 거절했다는 게 조금 꺼림칙했다. 그녀에게 흥미를 보이진 않더라도 순순히 물러날 놈은 아닌데.
“어차피 스라소니는 계획에 없었어요. 다시 그쪽에서 제안이 와도 받아 줄 마음이 없고요.”
“정말 종족들을 다 만날 생각이야?”
“제가 만나러 가지 않아도 유클리드처럼 저를 찾아올 거예요. 그러려고 정체를 밝혔으니까요.”
실제로 노아의 영지 주변에 타 종족의 정찰이 평소보다 몇 배로 늘었다. 방문 요청을 하는 건 아주 정중한 편이었고, 호시탐탐 성벽을 넘을 준비를 하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정말 허가 없이 영지로 입성했다가는 즉살이겠지만.
“아직도 네 속을 모르겠어.”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아니. 넌 내게 전부 말하지 않았잖아.”
“…….”
“내겐 뱀의 영지로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았잖아. 노아도, 독수리도 아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고.”
그건……. 이엘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그의 성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제 안전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의 위험을 알릴 수 없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그게 아니에요.”
“아니.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너에게 난 그냥 그 정도인 거지.”
내게 넌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존재인데, 넌……. 레온은 그 말은 꾹 눌러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서운함? 섭섭함? 그것도 아니면 자괴감? 그만한 힘도 되어 주지 못한다는 절망감?
네 앞에서 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느끼는데……. 넌 나를 아무런 감정도 없이 대한다는 것으로 인한 허탈함? 레온은 눈을 감으며 솟구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제가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실 거잖아요.”
“내가 네 길의 방해꾼 같아?”
“그게 아니에요.”
이엘이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꾹 쥐자,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풀어졌다. 스르르 풀려 버린 소매 자락처럼 그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멍청하게도 자신은 그녀의 말 한마디면 저런 만 가지 감정을 다 잊어버리게 되니까.
“……레니 님이 저를 사랑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사랑해.”
“…….”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온 레온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흩날리는 이엘의 머리카락을 잡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머리가 많이 자랐네. 남들에겐 쓸데없지만 제겐 일일이 알고 싶은, 그런 특별한 생각들을 하며 그저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레니 님은 자기 백성을 많이 아끼시잖아요. 종족이 힘들거나 싫어하는 일은 모조리 레니 님이 할 정도로.”
“…….”
“그래서 그랬어요.”
“…….”
“저……를 레니가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귀가 화끈거렸다.
“혹시 나 때문에 레니가 대신 위험해질까 봐…….”
나 대신 다칠까 봐요. 작아진 목소리였지만 제 귀엔 분명하게 들렸다.
“위험하지만 저는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정말로……. 제 목숨을 헛된 곳에 버릴 마음 없어요. 그렇게 쉽게 죽을 리도 없고요.”
“…….”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어서요. 제가 위험하면 레온 님이 와 주실 거라고 믿으니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이엘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산뜻한 향이 제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응, 나는 갈 거야. 당연히.”
“…….”
“내 마음은 언제나 널 향해 있어. 난 너만 생각해.”
두려웠는데. 처음엔 이런 익숙지 못한 감정놀음이 무섭고 두렵기만 했는데.
“제대로 봤네. 나는 네가 위험하느니 차라리 내가 대신 위험한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건 싫어요. 레니가 위험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 말 듣기 좋아.”
“…….”
“날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당연히 걱정해요.”
이런 별것 아닌 일조차 자신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녀를 향한 제 감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게 무서운데, 또 한편으로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져서.
나도…… 사랑받지 못한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보통의 평범한 이종족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
“나만 걱정해 줘.”
“그건 나쁜 소리 같은데요?”
이엘이 웃으며 대꾸했지만 레온은 속으로 그 말만 몇 번을 되뇌었다. 나만, 나만 좋아해 줘.
너도 나를, 사랑해 줘.
*
“겨우 인간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죄송합니다, 폐하.”
“전쟁 하나 끝냈다고 기강이 해이해졌나? 겨우 뱀 하나 잡았다고 승리에 도취하기라도 했어?!”
벼락같은 노아의 호통에 털이 쭈뼛 섰다. 우논들은 제각기 고개를 숙인 채 왕의 노성을 받아 냈다.
“자살 시도라니, 이게 무슨…… 젠장.”
간밤에 높디높은 계단에서 일라이저가 굴러떨어져 중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 장소가 그의 처소가 아니었던 것과 시간이 아무도 없는 새벽 때라는 점을 들어, 그리고 최근 그의 음울한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자살 시도라는 결론이 우세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
“치명상은 아니니 금세 깨어날 것입니다.”
안드로의 말에도 노아는 대답이 없었다.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붙잡으며 의자에 앉았다. 이엘을 볼 면이 안 선다. 최대한 그를 빨리 돌려보내길 원했는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건지…….
감시를 맡던 우논들만 탓하기도 우스웠다. 정작 자신도 놈을 보면 누군가 떠올라 그쪽으론 관심도 주지 않았으니까. 모두의 방치 속에서 사건은 터진 것이다.
“앤디.”
“예, 폐하.”
“놈이 깨어나는 대로 곧장 마을로 돌려보내도록. 더는 지체하지 마.”
“예.”
“돌아갈 때 사례를 해라. 그래도 세운 공이 있으니.”
“예.”
살얼음판 같은 집무실을 빠져나온 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시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었지만 안일했던 건 맞다.
그날 자신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고 일라이저는 그간 걸렀던 끼니를 조금이나마 챙기기 시작했고, 자신에게는 의사 표현도 조금씩 했다. 한 달 가까이 지켜보며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앤디는 성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드는 하이에나의 영지로 떠났지만 그가 머물렀던 곳엔 성력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치료실을 아예 이쪽으로 옮겼다. 다행히 일라이저의 상태는 노아가 격노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상대가 일라이저가 아니었다면 왕도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았겠지. 그는 여러 가지로 노아의 신경을 거스르는 존재니까.
“꼬마, 안녕.”
눈물이 잔뜩 번진 채 울고 있던 피터가 불편한 몸으로 일어나려 하자 앤디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괜찮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금방 깨어날 거야.”
오히려 제 눈엔 피터가 더 안쓰러웠다. 뱀에게 끌려가 반쯤 먹혔던 소년은 기적처럼 살았다. 물론 레온이 가져온 약초로 응급조처를 잘한 덕분이긴 했지만, 상당한 출혈 속에서 살아난 건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 형이 언제 눈을 뜰까요?
아이가 한 손으로 열심히 의사 표현을 했다. 피터는 글자를 모르고, 앤디는 수어를 할 줄 모르니 서로 대충 눈치로 대화를 이어 가는 수준이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과 발로 연신 슬픔을 표현하는 피터의 모습에 앤디는 누군가가 떠올라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걱정돼?”
― 네. 형이 죽을까 봐 무서워요.
친형제와 다름없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두 인간을 보니 가슴에 묻은 제 동생이 떠올랐다. 앤디는 씩 웃더니,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피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의 말을 남겼다.
“걱정 마.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금방 털고 일어날 거야.”
― 네.
“너 때문이라도 눈을 뜰 거야.”
네가 눈에 밟혀서 죽을 수도 없을걸.
그건 일라이저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내 얘기일까.
주드가 태어나기 전에도 동생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새끼 우논이 으레 그렇듯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모두 죽었다. 어릴 때 죽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강한 개체로 성장한다.
주드 역시 태어날 때부터 강하지 않았다. 보통 그 정도면 일찍 죽었을 텐데, 주드는 어찌어찌 살아남긴 했다. 그러나 집안 내력인 건지 성장도 느렸고 능력의 발현도 더뎠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부모님이 모두 죽고 제 손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 되었을 때, 앤디는 마치 제 새끼라도 된 것처럼 동생을 키웠다. 일이 바빠도 동생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종족애가 강한 집단이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혈육에 집착하는 개체는 없었다. 자신이 유난이긴 했다.
그렇다면 끝까지 챙겼어야 했다. 방심하지 말고, 어떤 것보다 동생을 우선시해야 했다. 앤디는 씁쓸함을 삼키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날과 비슷한 날씨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2주 전은 주드를 잃었던 날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이기도 했지만, 앤디는 부러 그날을 모르는 척 넘겼다. 애초에 이종족이 죽은 자의 날을 기리는 경우도 없었지만. 어쨌든 제 눈치를 보는 다른 늑대들의 시선까지 넘기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꼬마야. 돌아가서 쉬어. 너도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일라이저가 깨어나면 네게 알려 줄게.”
― 하지만…….
“인마, 네가 이렇게 울고 있으면 네 형도 마음 아파. 네 형 생각도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