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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5화 (215/488)
  • 215화

    “달손님은 지나가셨습니까?”

    “아…….”

    저도 모르게 짧게 탄식했다. 그간 많은 영지를 전전했지만 자신의 달거리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화제에 이엘이 입을 다물었다.

    “혹시 기간이 되어 체온이 올라가신 건 아닌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 말씀은 아직 지나가지 않으셨단 소리시군요.”

    뱀들 앞에 제 피임 방식을 알렸을 때부터 소문이 퍼질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패티스가 모르는 걸 보니 그것까진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며칠 전에 왔던 유클리드 역시 그건 모르는 눈치였고. 스라소니는 정보망이 빠른 편인데도 그가 몰랐다는 건, 아직 대륙 내에 퍼지지 않았단 소리다.

    이엘은 물끄러미 패티스를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아직도 내가 떠날까 불안한가?”

    “폐하를 믿으니 불안하지 않습니다.”

    “나는 달거리를 하지 않아.”

    “…….”

    “불임은 아니야.”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이엘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엉망이 되자, 패티스는 겉에 걸친 망토의 끝자락을 잡은 채 팔을 뻗어 그녀에게 들이닥치는 바람을 막아 주었다. 덕분에 그의 팔 안에서 고요함을 되찾은 이엘은 선선히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스스로 피임을 하고 있어.”

    “약을 드시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것과는 조금 달라.”

    “무슨…….”

    “어그러진 짓이야. 약으로 피임을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 방식이라.”

    패티스는 이엘의 말을 정확히 가늠할 순 없었지만 그녀의 작은 숨소리에 담긴 번민을 고스란히 느꼈다.

    “신의 뜻을 버렸으니까.”

    “…….”

    “신을 버리고, 다른 것의 손을 잡았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그건 그저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때의 자신이 간절히 찾았던 건 신이 아니라 악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으니까. 되돌리려 해도 그때의 과오는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길 것이다.

    “내가 신을 버렸기 때문에…… 신께서 날 벌하신다면.”

    “…….”

    “그대들은 나를 버리고 도망가도록.”

    내가 너희를 떠날 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너희가 날 버릴 준비를 하라는 의미였다.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이었으나 패티스는 웃지 않았다. 이엘은 점차 강도가 세지는 바람에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며 살짝 비틀거렸다.

    “군주님. 제가 드렸던 말씀을 잊으셨군요.”

    그는 펼쳤던 팔을 안으로 굽혀 이엘의 어깨를 잡아 제 품으로 당겼다. 패티스의 너른 품에 안기다시피 폭삭 끌려간 이엘이 잠깐 숨을 멈췄다.

    “그림자는 하이에나가 함께할 거라고 했는데.”

    작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를 처음 봤던 날처럼 열 기운이 몰려와 잠시 어지러웠으나 단단한 팔이 제 어깨를 꽉 끌어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버리다니요. 서운합니다, 군주님.”

    “…….”

    “죽을 때까지 당신 뒤만 쫓아다닐 텐데.”

    미열이 심하군요,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패티스는 특유의 미소를 짓더니 단번에 이엘을 품에 안아 올려 성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

    “어서 오십시오. 종족회의 이후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패티스였던가? 종족회의 때 들이닥쳤던 그 쌍둥이들 중 하나. 그때보다 훌쩍 성장한 상태라 마치 딴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달라 보였다. 레온은 눈가를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풀었다.

    “오헬을 만나고 싶은데.”

    “폐하께서는 안쪽에 계십니다.”

    “……폐하?”

    “예. 저를 따라오십시오.”

    패티스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레온의 무리를 안내했다. 어안이 벙벙한 사자와 호랑이는 연신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하이에나는 왕이 없잖아. 왕자 따라서 종족이 전부 미쳤나? 저희끼리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레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이엘을 찾았는데 뜬금없이 왕 이야기를 했다. 하이에나는 암컷만을 왕으로 두기 때문에 1차 전쟁 이후로 왕좌를 비워 뒀을 텐데?

    설마.

    “어서 오세요, 레니.”

    “오헬!”

    안내받은 응접실로 들어선 레온은 오랜만에 보는 이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 했으나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미소를 짓고 있는 패티스였다.

    “레온 님.”

    “이게 무슨 짓이지?”

    “실례합니다. 폐하께 가시기 전에 소유하신 무기를 모두 버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까부터 뜻 모를 소리를 하는데. 너희에게 왕이 있던가?”

    “눈이 있으시다면 안 보이실 리가 없을 텐데. 안타깝군요.”

    “왕자. 지금 미쳤습니까?!”

    함께 왔던 근위대장 란트가 패티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란트뿐만 아니라 뒤에 있던 우논들 역시 분노에 휩싸여 금방이라도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갈 태세였다. 레온은 눈썹을 위로 틀어 올리며 란트를 제지하고 패티스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를 보러 왔다고 해서 너희와 화친하는 건 아니다. 말투가 건방지군.”

    “실례했습니다. 제가 무례했군요, 왕이시여.”

    “패티스.”

    마치 비꼬는 듯한 어조에 이엘이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손님께 무례하구나.”

    “송구합니다, 폐하. 조심하겠습니다.”

    정복 차림으로 내려선 이엘을 향해 패티스가 공손히 절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레온의 앞에 섰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잠깐 걸을까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안색은 좋아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열기가 느껴졌다. 레온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이마 위에 제 손등을 댔다.

    “열나잖아.”

    “다 나았어요.”

    “뭣들 하는 거야?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지 않고!”

    남의 영지에서 소리를 버럭 내지르는 레온을 보며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제 곁으로 다가온 하트의 팔을 거절했다.

    “괜찮아. 레온 님과 잠시 걷겠다. 그대들은 손님들이 머물 곳을 안내해 주도록.”

    “예, 폐하.”

    “폐하. 하트는 호위를 맡았으니 먼발치에서라도 따르게 허락해 주십시오.”

    “괜찮대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더는 방해하지 말라.”

    그녀의 일축에 패티스를 비롯한 하이에나들이 빠르게 물러섰다. 그들은 레온의 뒤에 서 있던 사자와 호랑이들을 안내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이 모든 상황을 황망히 쳐다보던 레온의 앞에 이엘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잠깐 걸어요. 정원이 무척 예쁘거든요.”

    “너 열나잖아. 그냥 쉬어. 이야기는 나중에 해.”

    “다 나았다니까요? 바람도 좀 쐬어야 회복한대요. 가요, 어서.”

    봄볕처럼 적당히 따뜻하고 빛나는 미소에 레온은 저도 모르게 귓불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엘이 이끄는 대로 소매가 잡힌 채 정원까지 끌려 나왔다.

    각별히 신경을 쓴 정원은 입구부터 잔디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걷는 길마다 매끈한 돌들이 이어져 있다. 최근에 조경 사업을 준비하게 된 입장에서 바라보니, 정원의 주인이 꽤 사랑으로 돌봤구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천히 가. 넘어지겠어.”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의 목소리엔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레온은 이엘에게 묻고 싶은 게 한가득했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바보처럼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그냥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갈증이 모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바다가 있어서 바람이 좀 차요.”

    “…….”

    “그래도 너무 아름답죠?”

    마치 제 것을 소개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뱀의 영지에서 봤던 우울하고 지친 얼굴은 사라지고 더없이 평온한 낯이었다.

    “여긴 정말 아름다워요. 왜 모두가 이곳에 찬사를 쏟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레니. 이쪽으로 와 봐요. 더 예쁜 게……,”

    “네가 더 예뻐.”

    감정을 폭발시키듯 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레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꿈속에서 봤던 너보다, 지금의 네가 더 예뻐.”

    “레, 레니…….”

    “조금만 이러고 있자.”

    “…….”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겠어.”

    “레니.”

    “내 품에 네가 있다는 게, 나는 아직도 안 믿겨.”

    웃기게도 자신은 다른 놈들보다 형편이 나았다.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지면 늘 이엘이 꿈에 나왔으니까. 물론 포필렌 꽃을 복용하고 통증을 억누른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지만. 어쨌든 불면증으로 아예 잠을 못 자는 노아보다는 나은 게 분명했다.

    꿈에서만 그리던 그녀가 제 앞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마치 어린아이가 소중한 것을 숨겨 놓듯, 레온은 그렇게 한참이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뱀의 영지에선 지친 네 얼굴에 화가 났는데.”

    “…….”

    “여기선 네가 행복해 보여서 또 화가 나.”

    그게 뭐예요……. 이엘의 웃음 섞인 대꾸에 레온은 그녀를 놔주었다. 이엘은 몸을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농담 같지 않은 진지한 얼굴에 미간까지 살짝 좁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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