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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4화 (214/488)

214화

나중에 다시 보자는 게 어떻게 작별 인사가 돼? 마지막 인사와 같은 말을 남겨 놓는 미르의 옷을 다급히 붙잡았다.

“미르, 잠깐만! 가지 마. 갑자기 가겠다고 하면 나는…….”

“해결하면 바로 내려올게.”

“근데 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

“내가 놈들을 설득해도, 너는 인간이라 수명이 끝나면.”

“…….”

“그럼 못 볼지도 모르니까.”

네가 날 기다릴까 봐. 그게 싫어, 오헬. 그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네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미르.”

“아니, 내가 용이 아니었다면.”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아프지 말고 건강히 지내.”

단순히 제 과제만 들켰다면 상관없을 텐데. 그러면 밀로를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이온은 아직 들켜선 안 된다. 그는 그녀의 약점이었다. 이온의 존재가 탄로 난다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테니까. 모두가 이온의 목숨을 저당 잡고 자신의 목을 틀어쥘 것이다. ‘목소리’가 그러했듯, 그녀가 어렵게 세워 놓은 판을 뒤집어엎을지 모른다.

지금도 봐. 미르가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었잖아.

“……미르.”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마. 떠나기 싫잖아.”

“…….”

“놈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잖아.”

살벌한 농담을 웃으며 내뱉던 용은, 그 말과 함께 정원을 빠져나갔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음에도 이엘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떠난 용은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다.

*

“별일이 다 있군.”

“살다 살다 사자가 우리 영지에…….”

“폐하 때문이겠지. 나는 반대하겠소.”

“나도 반대하네.”

저마다 생각은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사자의 왕이 이곳에 오겠다니.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절로 나빠졌다. 툴툴거리던 귀족들은 문이 열리며 패티스가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전하. 오셨습니까.”

“다들 자리에 앉도록.”

“폐하께서는…….”

“피곤하신 듯하여 내가 대신 왔다. 착석하도록.”

패티스는 상석에 앉자마자 밀린 일을 물 흐르듯 처리해 나갔다. 그간 이엘의 깔끔하고 여유로운 정무에 익숙해졌던 우논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패티스의 빠르게 몰아치는 업무에 점차 사색이 되어 갔다.

“전하. 쉬는 시간을…….”

“겨우 이 정도로 지쳤나?”

“…….”

“좋아. 잠시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

우논들은 살았다는 듯이 안도하며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패티스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렇게 무능해서야. 이제 암컷도 없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한심하게 살 것인가. 저러니 폐하께서 일을 전부 떠맡으시는 게 아닌가. 그 과로 때문에 몸져누우신 것도 모르고. 한심하긴.

그렇게 생각을 덧대던 패티스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서신을 들었다. 어제 새벽에 도착한 레온의 전언이었다.

“방문 요청이라니. 미친 건가.”

사자와 하이에나는 뿌리 깊은 원수지간이라 서로 상종도 하지 않는데, 그쪽 왕께서 친림하시겠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늑대와 동맹관계라 할지라도.

아. 피가 반반 섞여서 그런가? 자신은 별로 상관없다? 패티스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짜증이 난 표정으로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니. 저쪽 왕의 성미는 소문이 자자하다. 비록 반쪽씩 섞였다 할지라도 그는 사자와 호랑이의 직계 중의 직계였다. 게다가 원래 타이곤과 라이거는 사자와 호랑이에 비하면 능력치가 한참 떨어지는 게 일반인데도, 그는 네 종족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개체였다.

그러니 사자나 호랑이도 꼬리를 내리고 따르는 거겠지. 그 고고하고 우아한 성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제 종족이 아니면 자비 따위 베풀지 않는 왕이 레온이었다.

그런 왕이 온다고? 겨우 동맹관계라는 이유로?

“그것도 늑대 없이? 아무 사감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이에나 역시 늑대와 손을 잡겠다고 했지, 사자와 손을 잡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요청을 가장한 통보 따위, 찢어서 버린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다.

다만 자신의 왕은 아니겠지. 그녀는 반색하며 환영할 테다. 이건 회의의 안건으로 올릴 여부조차 확인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내용이었다. 이엘이 허락하면 하이에나는 성문을 열어야 한다.

“그나저나 날씨가 다시 우중충해졌군.”

원래 이맘때쯤이면 기온이 아침저녁으로 변하긴 했지만, 최근 몇 주간 지나치게 온화하고 맑은 날씨가 이어져서 그런가. 괜히 기분이 저조해지는 듯해서 패티스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

*

“엘. 정신이 드니?”

“응. 난 괜찮아.”

열이 펄펄 끓어오른 지 이틀째였다. 다행히 오드가 영지에 있어서 크게 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 침실에서 푹 쉬라는 패티스의 부탁이 있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이엘은 힘겹게 눈을 뜨며 자신을 살피는 오드를 쳐다봤다.

“오드. 그런 기분 알아?”

“무슨 기분?”

“기억이 중간중간 잘려 있는 듯한 기분.”

“열 때문에 그래.”

“그런가? 그런가 보네…….”

“엘.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

“미르가…….”

“응.”

“미르가 떠났어.”

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었다. 이엘은 한숨 쉬듯 뜨거운 숨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돌아올까?”

“올 거야. 약속했다며.”

“응.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무도…… 아무도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내 욕심이야? 그녀의 맥없는 물음에 오드가 아니라며 달래 주었다. 이카르도 없고, 밀로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그런가 봐…….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엘은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며칠 전 새벽, 오드는 그녀의 침실을 지나가다가 괴로움을 억누른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지만, 잇새로 들린 주드의 이름까지 숨길 순 없었다. 그날은 주드를 떠나보냈던 날로부터 정확히 1년이 되던 날이었다.

그렇게 괴로워했으면서 다음 날 아침엔 웃고 있는 모습 때문에 오드도 마음이 불편했다. 아닌 척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지친 모양이었다.

문을 닫고 나온 오드는 방문 앞을 지새우다시피 지키던 피시와 눈이 마주쳤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묻어나는 청년은 오드를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에, 엘은 괜찮아? 많이 아픈 거야?”

“열은 곧 내릴 거예요. 원래 이맘때쯤 자주 앓습니다.”

“엘이…….”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진 마세요. 감기가 옮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드의 다정한 충고에 피시가 시무룩해졌다. 그의 손엔 화려한 꽃들이 다발로 들려 있었다. 그녀의 기운을 차리게 해 주려고 들판에서 따 온 모양이었다. 오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돌아섰으나 피시가 그의 옷 끝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세웠다.

“고, 고마워…… 영지에 와 줘서. 네가 있어서 엘을 금방 치료할 수 있었어.”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자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엘의 친구한테는 나도…… 친절해지고 싶어.”

“지금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근데. 나 정말 들어가면 안 돼? 나는 우논이라 그런 거 안 걸리는데…….”

그의 조심스러운 칭얼거림에 오드가 웃으며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피시는 문을 열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피시는 창문에 놓은 화병을 가져와 물을 갈았다. 그러곤 가져온 꽃들을 정성스럽게 화병 안에 꽂았다. 그녀의 침실 안은 먼지 하나 없을 만큼 깨끗하고 쾌적했다. 식사 역시 정성을 다해 준비하니 병을 앓을 만한 이유가 없을 텐데…….

피시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움켜쥐었다. 그는 쪼르르 침대께로 다가가 여느 때처럼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깊은 잠에 빠진 이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프지 마.”

“…….”

“속상해.”

이엘의 이마 위에 손등을 올렸다. 처음보다 열이 많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뜨끈한 열기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어제 아침, 평소처럼 느지막하게 일어났던 피시는 웬일로 굳게 닫힌 이엘의 방문을 의아한 듯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엘은 언제나 꼭두새벽부터 집무실로 향했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던 피시가 그녀의 자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역시 일이 많이 고됐구나 싶어서 조용히 방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그녀의 앓는 소리가 들려와 놀라 달려갔다.

그리고 벌써 이틀째. 열은 내려갔다 싶다가도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자주 앓는다고는 하지만,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몸으로 감기를 앓는 모습이 안타까워 입술을 깨물었다.

“깨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루비에 햇빛이 얼비쳐 잠깐 눈을 찡그렸다. 그의 손에 소중하게 들려 있던 것은 그녀의 반지였다. 황녀의 반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그저 값만 비싼 반지.

피시는 그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엘의 손가락을 들어 검지에 끼워 주었다.

“역시 군주님한테 가장 잘 어울려.”

검지에 끼워진 반지는 조금 헐거웠다. 그러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더없이 빛났다. 피시는 루비 위에 입술을 짧게 맞췄다가 떨어졌다. 그에겐, 그의 종족에겐, 황자의 반지보다 황녀의 반지가 더 가치 있다. 그 생각에 피시는 하염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엘은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이 더 지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벼운 감기라고 하기엔 여전히 몸에 열이 번져 있었지만, 파리했던 얼굴색이 돌아올 정도로 기운을 차렸다.

“군주님. 사자와 호랑이가 경계를 넘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늦게 오도록 방해할까요?”

“그런 말이 아니야.”

패티스의 진담 같은 농담에 이엘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쉽군요. 덧붙여진 그의 말에 이엘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대들이 못마땅해하는 걸 알고 있다.”

“본능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해해 줘서 고마워.”

“폐하의 말씀은 무엇이든 옳으니까요.”

“내가 저걸 바다라고 불러도?”

이엘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다소 장난이 섞인 물음인 걸 알면서도 패티스는 언제나처럼 공손하고 진지하게 답했다.

“오늘부터 저걸 바다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만해. 농담도 못 하겠네.”

“날이 차갑습니다, 군주님.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떠실지요.”

“오랜만에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좋아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이엘의 어깨 위에 걸쳐진 로브를 다시 꼼꼼히 여며 주었다. 그러곤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아직도 미열이 있으십니다.”

“패티스. 너무 과한 걱정이다.”

그녀의 핀잔에 패티스가 잠시 침묵했다.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인가? 아니면 그 시기가 되어서 체온이 올라갔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이엘이 이곳으로 온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그는 보좌관의 역할을 하듯 그녀의 곁을 매일같이 지켰는데, 이엘이 달손님을 언제 맞이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군주님. 실례되는 질문이나 폐하를 보좌함에 있어 부족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이기에 그리 격식을 차리나? 말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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