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모든 건 선황의 죄였다. 아니. 온전히 그의 탓이라고만 하는 것도 웃기지. 이 세상에 제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모두가 제 밥그릇만 챙겼기 때문에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죽었던 셈이다.
이엘은 횡설수설하는 피시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녀는 피시의 눈가에 손을 얹었다. 깨끗이 치료한 덕에 흉터 하나 남지 않았지만, 분명 그 안엔 제 목에 생긴 자상보다 더 깊은 상처가 남아 있을 터였다.
“아팠지.”
“…….”
“이 눈으로 살아가는 너도 아팠잖아, 피시.”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후두둑 떨어지는 피시의 눈물을 바라보며 이엘이 고개를 숙여 눈가에 입을 짧게 맞췄다. 마치 제 목에 난 상처에 입을 맞춰 주었던 레온처럼. 자신 역시 그의 상처를 품어 주었다.
“피시. 언젠가 네가 내게 했던 말 기억나?”
“…….”
“나도 피해자라고. 전쟁으로 모든 걸 잃어버린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고.”
“응.”
“그 말에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어.”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버겁던 어느 날. 피시는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위로하며 손목에 크라바트를 묶어 주었다.
“피시. 너도 그냥 피해자야.”
그러니까 떠안지 마. 우린 그냥…….
“응. 우린 피해자야.”
자리에서 일어난 피시가 이엘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 위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곤 허리를 감싸 깊게 파고들었다. 분명 울고 있는 건 피시인데, 마음이 아픈 건 되레 이엘이었다. 그를 위로하던 손이 점점 떨려서 종내에는 피시에게 파묻히듯 끌려가 안겼다. 피시는 이엘이 속으로 함께 울고 있음을 느꼈다.
“울지 마, 엘. 응? 네가 울면 나는 더 울고 싶어져.”
“안 울어.”
“미안해. 나만 불행하면 되는데……. 너까지 내 불행으로 끌어들여서.”
“그렇지 않아. 피시, 그런 말 하지 마.”
품에서 이엘을 떼어 놓은 피시가 눈물을 뚝뚝 흘린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엘의 손을 가져와 그 손바닥에 제 뺨을 갖다 댔다. 축축한 눈물이 손바닥 안을 적셨다.
“그런데도 난 널 포기할 수가 없어.”
“…….”
“네가 떠나면 나는 정말…… 말라비틀어져 죽을 거야.”
종족을 우선시하는 패티스나 혈육을 우선시하는 하트와는 달리, 피시는 이엘 그 자체가 중요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피시.”
“네가 나를 사랑해 주면 좋을 텐데…….”
“나는…….”
“알아. 억지로 바랄 수 없는 거……. 그래서 슬플 뿐이야.”
“…….”
“난 괜찮아. 억지 부리지 않을게.”
참는 법을 배워 간다. 피시는 지금도 갈증이 나서 이엘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영지를 떠나지 못하는 걸 알고 있기에.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기로 했다. 여기선 참아야 한다. 참을 줄 알아야 해.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미안해. 내가 너무 약해서.”
“그건 미안한 일이 아니야.”
“아니야. 널 지킬 만큼 강하지도, 멋있지도 않아서.”
“…….”
“마음조차 약해서. 그게 나는 미안해.”
그는 이엘의 머리 위에 턱을 얹고 한참이나 슬프게 읊조렸다.
*
침대에 누워 잠든 피시는 편안해 보였다. 그를 위로하다 보니 어느덧 밖이 캄캄한 저녁이었다. 정찬까지 무르고 피시의 곁에 머물렀던 이엘은 손등으로 그의 눈가를 훔쳐 주고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이엘은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너른 정원으로 나왔다. 왕성엔 많은 하이에나가 오고 갔고, 특히 세 왕자는 거처가 아예 성 안에 있었지만 패티스는 정원만큼은 온전히 그녀의 것으로 남겨 두었다. 피시도 이곳은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종족의 땅에 홀로 인간 여자인 것을 배려해 그녀만의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이니까.
“여긴 정말 평화롭구나.”
혼잣말을 하며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낮에 그 소동이 있었는데도 변함없이 견고한 위엄을 유지했다. 천혜의 요새라고 하던 패티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독립적으로 떨어져 살기 시작한 종족답게 외부와 완벽히 차단돼 평화롭기만 했다. 마치 낮에 있었던 소동 따위 별것 아니란 듯이.
이엘은 정원 중앙에 위치한 석고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조이나…….”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성이 검을 바닥에 찍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색이 없는 조각상이었음에도 마치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제복은 황실기사단에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멋있고 화려했다.
특히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그녀를 이지적인 이미지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조이나가 죽은 뒤로 그녀의 안경을 물려받은 피시가 썼을 때완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눈을 제한하기 위해 사용했던 거고, 조이나는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사용했던 점에서 내포한 의미가 완전히 달랐지만.
한참이나 조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토록 재기가 넘치는 한 사람의 생을 빼앗다니. 이토록 충성스럽고 군집력이 강한 종족을 와해시키다니. 아비의 죄악에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런데도 제가…… 당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서.”
그래서 하이에나는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나설수록 그들은 자신에게서 조이나를 찾을 테고, 그건 도리어 그들의 아픔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군주님!’
‘폐하를 엄호해!’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유클리드와 차분하지 않은 대화를 끝내며 영지로 돌아가려던 차에, 폭음을 듣고 하이에나 한 무리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능력을 쓰며 유클리드와 이엘 사이에 커다란 장벽을 세웠고,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목숨까지도 불사할 것처럼 굴었다.
달랐다. 늑대가 자신을 지키려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 내 말이면 죽을 것처럼…….”
늑대는 이엘과 함께 살아가기를 도모했으나 하이에나는 그녀의 안위만을 생각했다. 맹목적인 피시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가 그랬다. 겨우 되찾은 왕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피상적인 주종 관계가 아니라 정말 이엘 그 자체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오헬!”
한참이나 석상을 바라보고 있다가, 등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 밀로였다. 그는 며칠 전에 봤던 용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미르?”
“다친 덴 없어?”
다짜고짜 제 안부부터 묻기에 이엘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되묻는 그녀를 보며 밀로가 안도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그 자식이 접근도 못 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그 자식? 아, 유클리드를 말하는 거야?”
“네게 급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 이 모습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어. 그래서 놈을 봤는데도 처리할 수가 없었어.”
“괜찮아. 유클리드는 돌아갔고, 난 다친 데 없어. 그보다 급하게 전할 말이란 게 뭐야?”
이엘의 말에 밀로가 열었던 입을 닫았다. 미르, 왜 그래? 부드럽게 재촉하는 그녀의 물음에 결국 천천히 입을 뗐다.
“예전에 늑대의 기름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응. 그랬지.”
“주드의 기름. 네가 갖고 있는 거야?”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응……. 내가 갖고 있어.”
밀로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뭔가 괴로운 게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엘은 밀로를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긴 침묵 끝에 밀로가 운을 뗐다.
“타이곤의 갈기. 설마 그것도 필요해?”
“그걸 왜 물어보는 거야?”
“나한텐 중요해. 말해 줘, 나의 엘.”
“지금은 아니야.”
“…….”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냐. 필요하지 않아.”
도대체 어쩌다 밀로가 그런 결과를 도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주드의 기름은 필요 없게 됐어. 그래서 앤디 님께 돌려줄 거야.”
“…….”
“타이곤의 갈기는 필요하지 않아. 가져올 마음도 없고.”
“그래…….”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했던 건 너 아니었어? 아니야. 지금은 그게 아니지. 그보다 왜 나한테 그걸…….”
두 사람은 말을 하다가 말고 잠시 침묵했다. 이엘은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고, 밀로는 답지 않게 고심하는 듯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밀로였다. 그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금 전보다 나아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용이란 건 이제 알았지?”
“응.”
“전에 내가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했잖아. 난 내 종족을 보러 간 거였어.”
“용이 땅에 살아?”
“지금은 아냐. 우린 거처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때마다 이동을 하는데, 어쨌든 지금은 위쪽에 있어. 아무튼 내가 돌아갔던 이유는 거처를 옮길 시기가 됐기 때문이었어. 내가 없으면 거처를 정하기 어려우니까.”
놈들이 내려오면 살육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 자신이 돌아가야 했다. 그는 되도록 이번 거처를 땅이 아닌 바닷속이나 하늘 위쯤으로 정하려 했다. 그들의 눈에 이엘이 띄지 않기를 바라서.
그러나 안일했다. 원래도 군집력이 좋은 종족이 아닌 데다가 전쟁 때는 의견이 달라서 사이가 틀어졌으니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용들은 남의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종족이니, 그간 리더 역할을 하던 밀로에게 관심이 없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뒀다.
“놈들이 너를 알아.”
“놈들이라면…… 네 종족?”
“응. 네게 관심을 갖고 있어.”
“왜?”
“그건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내 잘못이야.”
내가 너와 엮여서. 내가 네 주변을 맴돌아서……. 그는 그 말을 꾹 삼키며 이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놈들과 약속을 했어.”
“무슨…….”
“타이곤의 갈기를 가져다주겠다고.”
“왜? 그게 왜 필요하대?”
“처음엔 다친 개체가 있나 싶었어. 타이곤의 갈기는 같은 이종족에게도 약효가 좋으니까.”
그래서 레온의 영지에 잠입했던 거구나. 아무리 제멋대로인 밀로라 할지라도 그렇게 막 나가는 애는 아니었구나 싶어서, 이엘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러나 밀로는 이엘을 바라보며 무겁게 말을 이어 갔다.
“이틀 전에 놈들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이 근처까지 내려왔었어.”
“용이?”
“나와 나쁘지 않은 사이였던 놈이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
“네가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하다고 했다며.”
그 화제에서 자신이 왜 지목된 걸까? 이엘은 가만히 밀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 종족은 내 입으로 말하기 수치스러울 정도로 교활하고 제멋대로야. 제 유희를 위해서라면 어떤 살육도 서슴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게?”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거야.”
“…….”
“네가 필요한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독수리의 눈알.”
줄곧 평온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진심으로 놀랐고,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네 혈육.”
“미르.”
“황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게.”
“…….”
“그것 세 개 맞아?”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엘은 밀로를 믿지만, 그조차 신용하지 않는 그의 종족을 믿을 순 없다.
“젠장.”
“미르.”
“내가 어떻게든 놈들이 내려오지 못하게 막을게.”
“미르. 잠깐만.”
“미안해, 나의 엘.”
“…….”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만나자.”
가까워진 밀로가 그녀의 둥그런 이마에 입술을 짧게 묻었다가 뗐다.
“작별 인사.”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어디 가는데?! 미르!”
“너를 만나 행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