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2화 (212/488)
  • 212화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겉으로는 유클리드와 하트의 기세가 엇비슷해 보였으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엘이 그 자리를 떠나면 하트가 유클리드의 손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다치지 않았어. 손이 조금 아프지만.”

    총이든 검이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도구였다. 이엘은 그 도구를 들어 손에 피를 묻혔다. 모순적인 행위로 생긴 떨림은, 병처럼 제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후유증이 되었다.

    “난 괜찮아. 좀 쉬면 나을 거야.”

    “그 남자는?”

    “유클리드는 돌아갔어. 협상은 없던 일이 됐거든.”

    “무슨 협상이었는데?”

    “일종의 동맹이야.”

    제안을 했을 때 받아들이지 않은 건 스라소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욕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클리드는 기고만장한 낯으로 단호히 거절했다.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는 편이 그들에겐 좋았을 텐데. 어차피 며칠 못 가서 되돌아올 것이다. 그때는 제안 따위 없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관계가 될 테지만. 이런 걸 그 남자의 말대로 구애라고 하겠지, 그쪽 세계에선.

    반쯤은 예상하고 내민 제안이었다. 연연하고 싶진 않았지만 잊을 만하면 꾸는 꿈에서 스라소니는 동맹도, 적군도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이엘은 설령 스라소니가 돌아와 매달려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완전히 논외였다.

    “걱정했어?”

    “응, 많이.”

    피시의 대답을 들으며 하품을 했다. 이엘은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꽤 고단했다. 게다가 스라소니를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고. 결국 쓰러지듯 침대에 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피시가 그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엘. 졸려?”

    “응. 조금 피곤하네.”

    “쉬엄쉬엄해도 돼. 무리하지 마. 응? 그러다 네가 아프면 어떡해. 그러면 나도 마음이 아플 거야.”

    피시의 말에 이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시 머릿속엔 내 생각밖에 없나 봐.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이엘의 목소리에 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언제나 폐하가 중요해.”

    “그래? 고마워,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해 주네…….”

    “당연하지.”

    이엘의 목소리는 졸음에 먹혀 점점 작아졌다. 오늘 일정은 끝이니 푹 자게 두어도 되지 않을까. 피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베개를 놔 주었다. 그러곤 뒤척이는 그녀의 몸 위로 폭신한 이불을 덮어 주었다.

    피시는 침대 아래에 깔린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에 얼굴만 쏙 올렸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엘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피시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코끝을 괜히 건드려 봤다.

    “간지러워…….”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리던 이엘은 다시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자는 모습을 종종 보긴 했지만, 이렇게 깊게 잠든 이엘은 처음 봤다. 그만큼 고단했단 거겠지. 피시는 이엘이 안쓰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고생시키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왕이라는 이름만 그녀에게 주고 실질적인 업무는 이전처럼 패티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실제로 하이에나의 영지는 2차 전쟁을 제외하곤 침략을 당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안락한 곳이었다. 이따금 바다와 마찰이 있지만 그 정도는 우논 몇 마리로도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다.

    평화가 보장된 곳이기에 자신 있게 그녀를 데려온 거였는데.

    “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일을 안 해…….”

    “그럼 그냥 인장만 찍어. 나머진 패티한테 맡기고.”

    제 칭얼거림에 이엘이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자면서도 귀는 열어 놓는 건지 혼잣말에도 그녀가 답하자, 결국 피시는 입을 꾹 다물어 이엘이 편히 자도록 해 주었다.

    이내 심심해진 피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분 아래 떨어진 꽃잎을 발견했다. 그의 눈빛이 닿는 허공으로 꽃잎이 하나둘 떠올랐다.

    「좋아해.」

    꽃잎이 서로 모여 글자 하나하나를 만들었다. 아직도 은은한 향을 내는 꽃잎들은 어느새 줄을 지어 잠든 이엘의 침대 위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마치 그녀를 둘러싸듯 나풀거리며 꽃잎들이 춤을 췄다.

    「나는 네가 너무 좋아.」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세상 어느 이종족이 인간에게 고백한답시고 제 능력을 이따위로 쓰냐며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지만. 피시는 제 쓸데없이 무지막지한 힘을 이렇게 작고 소중한 곳에 쓰는 것이 좋았다.

    「날 버리지 마.」

    마치 감정이 전이되듯 기분 좋게 둥실거리던 꽃잎들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시금 저며 오는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시트를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꽃잎들이 침대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버리지 말아 줘, 제발……. 죽지 말아 줘. 그냥 나랑 여기서 살자. 제발…….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불안감에 피시는 끝내 시트 위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삼켰다. 그래도 며칠 잘 버텼는데, 버려지는 상상만 하면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나는 무능력한 수컷이라 쓸 줄 아는 게 이런 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제어가 잘 안 돼서 아무것도 못 하는데……. 네가 내게 질려서 떠나면 어떡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피시……?”

    짧은 단잠 끝에 눈을 뜬 이엘이 피시를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피시는 시트에 고개를 묻고 일어나지 않았다. 자니, 피시? 재차 물었지만 역시나 피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올라올래?”

    그 말에 피시가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또 혼자 생각하다가 불안에 떤 모양이었다. 이엘은 다정하게 웃으며 몸을 세워 옆자리를 비워 주었다.

    “이리 와.”

    피시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아이 같고 고집 있고 트라우마 속에 살고. 그를 구해 주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모르겠다. 피시는 자신보다도 더 여리고 순수해서,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바스러져 버리니까.

    어서. 그녀의 채근에 피시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왜 울었어?”

    “…….”

    “화내지 않아. 피시, 나는 너를 언제나 존중해.”

    “…….”

    “네가 어떤 감정이고, 어떤 생각이든 나는 존중할게. 그러니까 말해 줄래?”

    너도 늘 내가 궁금하잖아. 나도 같아. 그렇게 말하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피시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또로록 떨어진 그의 눈물이 제 허벅지를 적셨다.

    “……조이는 우리의 전부였어.”

    이엘이 구불거리며 뻗친 피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이가 잡혀갈 때…… 내가 옆에 있었어…….”

    보호석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이길 수 없었다.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접전으로 중상을 입은 암컷들이 꽤 됐고, 수컷 몇 마리는 제도로 불려 간 상태라 병력 자체가 적었다. 변경백이었던 피시의 어머니는 모종의 이유로 노화를 선택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몰려든 인간들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조이는 끝까지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결국 붙잡혔어.”

    자신의 수족이었던 모든 암컷이 잔인하게 죽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 그럼에도 조이나는 피시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능력을 쓰지 못하는 이종족은 인간의 검과 총 앞에선 그저 발악하는 짐승에 불과했다.

    조이나와 피시를 알아본 인간들은 비열하게 웃으며 자신들이 살던 땅 세잔티노로 끌고 갔다. 황제는 하이에나의 영지에 들어가는 게 어려울 거라 판단해, 기사단이 아닌 세잔티노인들을 보냈다. 그들은 하이에나의 영지에서 약탈을 일삼던 흉포한 족속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능력을 잘 쓰지 못했어.”

    “…….”

    “그래서 늘 조이 뒤에 숨었거든. 조이는…… 날 지켜 줬어. 내가 능력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어.”

    이종족들 중에도 간혹 능력을 쓰지 못하는 개체가 태어난다. 인간에게 장애가 있는 것처럼 이들에게도 그런 개체는 장애를 가진 개체였다. 종족마다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약자로 취급하며 무리에서 단단히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직계가 그렇다면 그건 흠이 된다. 특히 피시는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형제가 많은 쌍둥이였다. 그들과의 비교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언제나 자신을 쏘아보는 다른 개체들이 무서워, 피시는 조이나의 뒤에 숨어 살았다.

    “그날도 내가 능력을 잘못 써서…… 틈이 생겼어. 그래서, 그래서 모두 죽어 버린 거야…….”

    침입자가 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피시였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능력을 증폭시켰고 오히려 아군에 피해를 입히며 순식간에 하이에나의 진영을 무너뜨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암컷들에게 맡겼더라면 보호석을 빼앗는 시도라도 해 봤을 텐데, 제 섣부른 두려움이 재앙을 초래했다.

    그렇게 세잔티노로 끌려간 조이나는 피시가 보는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인간이 그토록 역겨울 수 있다는 사실을 피시는 그날 처음 알았다. 차라리 눈알을 뽑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겹고 끔찍했다. 조이나는 죽는 순간까지 피시가 괴로워할까,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숨을 거뒀다.

    “나, 나 때문에…… 조이가 죽었어…….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내가, 내가 능력도 제대로 못 쓰는 바보라서…….”

    조이나가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한 그를 세잔티노인들은 죽이지도 않고 영지로 돌려보냈다. 낄낄거리며 저를 조롱하던 소리보다 고요히 죽어 가던 그녀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미 모든 암컷이 죽어 피로 물든 언덕을 바라보던 피시는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들어 제 눈을 찔렀다.

    “죽고 싶었지만 또 살았어. 나는…… 나는 살면 안 되는데.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끝내 자신은 죽지도 않았고, 실명하지도 않았다. 그것마저도 모두 실패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이나의 숨소리가 귀에서 사라지지 않아서.

    죽고 싶은데, 죽을 수도 없어서.

    “그런데 너를 만났어.”

    아직도 눈이 내리던 그곳을 잊지 못한다. 난데없이 다가온 어린 늑대가 무서워 저도 모르게 능력을 썼다. 그런 제 능력을 끊어 내고 늑대를 구한 건 이엘이었다. 늑대들을 보호하기 위해 겁도 없이 제게 총을 쏘던 게, 그녀였다.

    피시는 그때 순간적으로 그녀에게서 조이나를 보았다. 무능한 저를 숨겨 주고 가르쳐 주고 보호해 주던 자신의 동기가 그곳에 있었다.

    너는 조이나가 내게 보내 준 나의 왕이었다. 처음부터 너는, 나의 왕이었어.

    “죽고 싶었는데…… 네가 있어서, 네가 살아 있으니까 나도 살고 싶어져서……. 엘, 엘……. 엘, 나는 정말로…… 네가 없으면 안 돼.”

    다시 돌아가게 돼. 다시 내 귀에 조이의 숨소리가, 가쁘게 흐르다가 뚝 끊어져 버린 그 숨소리가 들려. 네가 없으면 나는 그렇게 돼…….

    “무능해서 미안해……. 지, 지켜 주지 못해서…… 아무것도 못 해서…… 일을 망쳐서…… 미안해…….”

    “피시.”

    “……그런데도 이 무리를 못 벗어나서…… 미안해.”

    차라리 죽어 버리면, 차라리 이 하이에나 무리를 떠나면…… 그렇다면 속죄라도 될 텐데. 바보 같은 자신은 무리가 없으면 겁이 나고 무섭고 두려워서. 이토록 무능해서.

    “버려지는 게 무서워…….”

    “…….”

    “무서워. 너무 무서워…….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나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이…… 사실은 무서워.”

    피시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엘의 옷 끝을 움켜쥐며 눈물을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