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동맹을 맺자는 소립니까?”
의외네. 배상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여자는 배포가 크다. 보통의 종족이었다면 배상으로 유야무야 넘어가, 제 종족과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 할 텐데. 유클리드가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내가 전쟁광이라는 건 알고 있죠?”
“악명이 자자하시니 모를 리가요.”
“그런데도 동맹을 맺자는 건.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됩니까?”
“그건 조금 곤란하네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곡해하실 듯해서요.”
이엘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클리드는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패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건을 좀 볼까요? 당신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를 넘어선 제안이라.”
“좋아요. 패티스, 서류를 건네드리도록.”
“예, 폐하.”
다소 뜬금없는 만남이었음에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빈틈이 전혀 없었다. 유클리드는 꾸며 낸 얼굴을 한 채 하이에나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폈다.
애당초 그는 놈들이 틈을 보이면 곧장 이엘을 납치해 갈 요량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혼자 왔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영지 밖에 주둔해 있는 제 새끼들이 상당했다.
어차피 이 정도 결속이면 조무래기 수준이니, 지금처럼 바다가 잠잠하기만 하면 병력은 자신들이 우세하다. 그렇게 이곳을 박살 내서라도 여자를 납치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녀와 마주하니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어울려 주고 있던 차였다.
“유클리드 님.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뭐, 보는 시늉이라도 할까. 그는 조건이 달려 있는 서류를 대충 훑어 내려갔다. 내용은 예상 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스라소니의 영지는 이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라 교역하기엔 다소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 사실상 형식적인 친교를 목적으로 한 평화협정에 불과했다.
“내용이 너무 빈약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정치를 놨다고는 해도, 이건 나를 너무 무시하는 꼴 같은데. 내 쪽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없죠? 저희 쪽에서 백향목과 같은 목재와 석재를 제시하지 않았나요. 그쪽 영지는 이런 게 부족하니까.”
“저런. 저희는 그런 자재가 필요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어서.”
“영지가 반 토막이 난 걸로 알고 있는데.”
이엘의 말에 유클리드가 그제야 웃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바보처럼 히죽거리던 낯을 지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뱀과 그의 동맹에게 습격을 받지 않았나요?”
유클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뱀의 세력을 만만하게 봤던 건 아니었지만, 그 전쟁을 치르고 곧장 보복으로 반격한 곳이 자신의 영지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늑대의 영지로 쳐들어갈 줄 알았는데, 뱀들은 무리를 추스르기도 전에 동맹을 이끌어 스라소니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솔직히 자신이 저지른 게 있으니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대뜸 내 영지부터 습격할 줄이야. 아무래도 로빈은 스라소니를 제 세력으로 빨아들일 목적이었던 듯했다.
덕분에 스라소니들은 영지 내에 살고 있는 노예들과 근방의 인간들을 부려 영지 복구하는 것에 힘을 쓰고 있었다. 습격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으므로 타 종족에게 알려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뱀의 루트를 계산해 줄곧 내 영지를 지켜봤나 보군. 머리를 굴리는 건 여자의 몫인가? 내가 이곳에 올 것도 염두에 둘 정도로 꽤 여러 루트를 계산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쪽의 세력이 불어나는 것도 이제 조금 이해가 간다.
“당신이 아무리 전쟁광이라고는 해도, 혈혈단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나와 함께 뱀과 싸우겠다는 소립니까?”
“아니요. 반대예요.”
이엘의 말에 유클리드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녀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뱀의 영지에 갇혀 있었으니, 동맹을 맺어 뱀에게 보복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아니라고?
“내가 멍청해서 그러는데, 반대라는 건 뱀과 동맹이라도 맺겠단 소립니까?”
“보복하지 않아도 뱀이 알아서 수그리고 올 테니 걱정 마세요.”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원하면 뱀에게 보복을 해 드릴 수 있어요.”
“…….”
“하지만 보아하니 스라소니는 지금 그걸 원하는 게 아닌 듯하고.”
유클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뱀을 치는 데에, 스라소니는 연합군이 필요한가요?”
스라소니는 워낙 호전적인 종족이라 심심풀이로 다른 종족의 영지를 침범하고 습격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며칠 전의 일로 뱀에게 분개하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격의 빌미를 내준 것에 즐거울 뿐이었다. 그는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이엘을 쳐다봤다.
“맞아.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건데.”
“말씀하세요.”
“혼인 동맹은 어때?”
“…….”
“그것만큼 확실하고 완벽한 동맹은 없잖아.”
패티스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유클리드를 노려봤지만 대놓고 나서지는 못했다. 이엘이 미동 없이 앉아, 미소까지 덧그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새끼를 원해. 내 아이, 내 자식 말이야.”
“그렇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여기 온 목적은 하나야.”
“…….”
“너.”
유클리드가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이엘을 가리켰다.
“네가 내 암컷이 되어 주면 좋겠거든.”
“패티스.”
“예.”
“서류 가져와.”
유클리드의 경망스러운 태도를 무시하곤 패티스로부터 서류를 돌려받았다. 이윽고 이엘은 종이를 쫘악, 쫘악 찢어 버렸다.
“협상 결렬이네요.”
“뭐?”
“안타깝게도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니 협상 결렬입니다, 유클리드.”
여자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돈 뒤로 이종족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쟁이라도 발발할 것처럼 곳곳에서 작은 마찰과 습격이 터졌고, 최상위 포식자 계층에게 붙기 위해 머리를 쓰는 종족도 생겨났다.
늑대에게 여자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클리드는 그녀를 납치해 늑대의 왕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내가 너무 간을 봤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유클리드를 향해 이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치를 놨다더니, 정말로 정세를 잘 모르시는군요.”
“무슨…….”
“수컷은 제가 선택합니다.”
“…….”
“선택권은 당신에게 없어요. 돌아가세요. 협상은 없던 일로 하죠.”
하트. 손님이 나가신다니 배웅해 드리렴.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응접실을 완전히 빠져나가 버렸다.
*
“유클리드는?”
“돌아갔다.”
돌아온 하트의 대답에 패티스가 그제야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달았다.
“유클리드가 저렇게 납작하게 눌린 건 이번이 처음일 거야.”
“…….”
“너도 그만 돌아가서 쉬어. 오늘은 폐하를 지키느라 고생했잖아.”
수고했어. 패티스가 드문 칭찬과 함께 하트의 등을 툭툭 쳐 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하트는 제 목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날것 그대로의 억세고 포악한 능력이었다. 물론 자신이 이엘의 안전을 신경 쓰느라 제대로 피하지 못한 건 맞지만, 설령 이엘이 없었다 하더라도 유클리드에게서 살아남을 순 없었으리라.
놈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도 굳건히 왕의 자리에 있는 이유가 바로 저 엄청난 능력 때문이니까. 호전적인 스라소니 정예 부대 하나가 유클리드에게 전력으로 달려들어도 그는 그들을 가볍게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조금 전에 제게 행사한 능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어쩌면 갖고 놀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협상하러 왔다면서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는 게 당신 종족의 예의인가? 허가 없이 영지로 쳐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을 훼손하고 왕족에게 상해를 입힌 죄. 그 죄를 물어도 그대는 할 말이 없겠지.’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자신조차 놀랐다. 유클리드가 평한 것처럼 그녀는 말투의 고저와 발음이 이종족과 미묘하게 달랐다. ……날 때부터 황족은 황족이라는 건가. 아주 찰나였지만 그녀에게서 조이나의 그림자가 느껴져 숨을 멈추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그녀의 거침없는 총격이었다. 이엘은 분명 자신에게 모종의 사건으로 총과 검을 잡는 게 어렵다고 고백했다. 검의 경우는 재활 훈련을 하듯 늑대에게 받은 수련 덕에 나쁘진 않았지만, 총의 경우는 달랐다. 쥐기만 해도 덜덜 떨려서 바닥에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고 총을 잡았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하트의 말을 듣고 영지 안으로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이엘은 죽을 수도 있는 하트를 두고 등을 돌리지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보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어머니께서, 그리고 조이나가 살아 있을 때처럼 가슴 한구석에 뜨끈한 무언가가 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멈췄던 과거에서 돌아온 듯한 그런 기분이.
*
덜덜 떨리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정신을 놓다가 발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넘어지기도 전에 단단한 팔이 이엘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엘. 괜찮아? 다친 데는 정말 없는 거야? 응?”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피시는 이엘의 침실에서 줄곧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이엘이 훈련을 위해 떠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긴장과 불안에 떨었다. 원래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면 불안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는데…….
더 기다리기 힘들어 박차고 나가려던 차였다. 갑작스런 폭음이 들려 영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감지한 하이에나들은 정예 부대를 속속히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엘과 함께 귀환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엔 무단 침입을 하고도 뻔뻔하게 웃는 유클리드가 함께였다. 피시는 스라소니와 함께 돌아오는 이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거렸다. 놈이 이엘을 바라보는 눈빛엔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었으니까.
혹시나 놈을 따라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불안함에 그녀의 침실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유클리드는 폐쇄적으로 지낸 피시도 잘 아는 남자였다. 원래도 난폭한 성격으로 유명한 종족이지만 그 종족의 왕은 난폭함을 넘어서는, 아주 괴랄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악명이 자자했다.
“다리가 아픈 거야? 그 남자가 널 공격했어?”
“진정해, 피시. 난 괜찮아.”
“손을 이렇게 떨고 있잖아!”
“이건 총을 잡아서 그래.”
“총을 잡았어?”
“응. 정신을 차리니 쥐고 있었어.”
총을 들 때마다 어깨가 한없이 무거워 땅 아래로 처박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검은 그럭저럭 쓸 수 있게 됐지만 총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도 손이 먼저 나갔다. 상당히 벌어진 거리라서 접근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손은 총을 꺼내 조준을 준비했다. 물론 그 여파로 이렇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지만. 이엘은 제 몸이 마치 기계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