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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10화 (210/488)

210화

아니. 저건 그냥 껍데기만 훌륭한, 실속은 없는 미친놈인가. 이엘은 노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제 모습을 후회하며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너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지?”

유클리드가 천연히 웃으며 이엘의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그보다 빠르게 하트가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뽑아 그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유클리드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발끝에서 솟아오른 물줄기가 동그란 결계를 치듯 나무를 삼켜 버린 것이다.

“왕자님. 이게 무슨 무례야? 나 지금 구애 중인 거 안 보여?”

“…….”

“네 모가지를 따 버리기 전에 비키라는 말 못 알아먹냐?”

역시 스라소니였다. 뱀의 영지에서 끈덕지게 따라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하트를 대하는 태도나 성격을 보면 유클리드는 못해도 왕족 이상인 듯했다. 이엘은 차분히 호흡을 가라앉히고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무례는 그쪽이 더 무례한 듯하군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언행이……,”

“방자하다? 응, 그런 말 많이 들어.”

이엘의 입이 딱 다물렸다.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 남자였다. 언뜻 밀로처럼 천연덕스러워 보였지만 그처럼 순수함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었다. 말투나 눈빛은 오만과 방자로 가득 찬, 그러면서 태도는 불손한 전형적인 귀족과 왕족의 모습이었다.

“알겠어, 레이디.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래 봬도 너 하나 보고 싶어서 산 넘고 물 건너 왔단 말이야.”

“영지로 먼저 돌아가.”

하트는 이엘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밀었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유클리드를 이길 수 없다. 생긴 건 저렇게 어리숙해 보여도 그가 쌓아 온 연륜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고 잴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

“오호라. 왕자, 너 지금 나랑 일대일로 붙겠다는 거냐?”

“어서 돌아가!”

“네가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하이에나 수컷이 뭘 더 할 수 있겠어? 그것도 내 앞에서.”

유클리드는 하트를 비웃으며 순간적으로 능력을 끌어 올렸다. 하트는 이엘을 뒤로 피신시키고 제게 쏟아진 능력을 받아 냈다. 땅에서 분수처럼 치솟은 물이 순식간에 하트의 얼굴을 집어삼켰다. 엄청난 수압에 갇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해 숨을 쉬기 버거웠지만, 하트는 그녀를 위한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눈물 나네. 인간 여자도 암컷은 암컷이라 이건가?”

“그만둬요!”

“레이디께서 순순히 날 따라오면 왕자를 놔줄게.”

하트는 이엘이 유클리드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하곤, 나무를 뽑아 물줄기를 막고 제게 씌워진 능력을 제거했다. 그러나 유클리드는 하트의 반응을 예상한 건지 그의 주변에 거대한 장벽을 세워 위아래를 모조리 틀어막았다.

하트는 제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간신히 뚫고 빠져나왔다. 그는 날랜 움직임으로 이엘에게서 점점 더 거리를 벌려 유클리드의 시선을 빼돌리려 했다.

“음. 도망만 치는 건 너무 재미없잖아, 왕자.”

너희도 공격형이잖아. 공격해, 공격! 유클리드가 개구지게 웃었다. 하이에나 왕자가 뛰어오르는 곳곳마다 그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수압이 상당한 그의 능력에 한번 발이 묶이면 순식간에 삼켜진다. 하트는 압도적인 그의 능력을 피하며 계속해서 멀어져 갔다.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 듯 천진하게 웃으며 하트를 향해 공격을 퍼붓던 유클리드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재빨리 몸을 틀어 손을 뻗었다.

촤악―! 마치 물 풍선이 터지듯 단단하고 두껍게 펼쳤던 물 장벽이 난잡하게 찢어졌다. 펼쳤던 유클리드의 손바닥 안엔 총알이 감겨 들어왔다.

“레이디. 설마 나 죽이려고 그랬어?! 너무하잖아!”

“하트!”

이엘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하트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하트가 본능적으로 달려와 이엘의 옆에 섰다.

“여긴 어디까지나 하이에나의 권역이야. 내가 여기서 당신을 쏴도 당신의 종족은 항의할 자격이 없을 텐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영지 밖이긴 해도 하이에나의 땅인 건 맞으니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유클리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 재미없어. 총을 쏘는 건 반칙 아니야? 그러다 나 죽으면 내 새끼들은 어떡하라고?”

“그쪽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눌 시간 없어. 좋은 말로 할 때 이곳에서 나가.”

“서운한데. 나는 너희랑 협상하러 온 거란 말이야.”

“협상하러 왔다면서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는 게 당신 종족의 예의인가? 허가 없이 영지에 쳐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을 훼손하고 왕족에게 상해를 입힌 죄. 그 죄를 물어도 그대는 할 말이 없겠지.”

“뭐야. 설마…… 벌써 하이에나의 왕이 된 거야?”

한발 늦었나? 단순히 암컷이라 보호한다고 보기엔 은연중에 드러난 하트의 태도가 조금 남다르긴 했다. 게다가 왕자가 아닌 여자가 제 태도의 무례를 운운하고 있다는 건…….

“와, 너흰 진짜 대단한 종족이다. 어떻게 인간 여자를 왕으로……. 우리도 미쳤다는 소릴 듣는 놈들이지만, 이 정도면 너흰 단단히 미친 종족이잖아.”

촤악―! 또 한 차례 총알이 날아오자 유클리드가 빠르게 장벽을 쳐서 막아 냈다. 마찬가지로 이번 총알도 그의 몸을 해치지 못했지만, 조금 전보다 정확하고 강도가 셌다. 이건 진짜 노린 수준인데? 게다가 상당히 먼 거린데도 조준이 소름 돋을 정도로 깔끔하다. 유클리드는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네.”

“하트. 병력을 불러와라. 스라소니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여, 지금 당장 저자를 처단하고 스라소니의 영지로 향한다.”

“잠깐만! 나 혼자 왔어! 치사하게 병력을 부르면 어떡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유클리드를 어이없다는 양 쳐다봤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불퉁한 표정을 짓더니 눈꼬리를 내리며 항복했다.

“미안하게 됐어, 레이디…… 아차, 하이에나의 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신원을 밝히는 게 도리라고 했지?”

“…….”

“내 이름은 유클리드야. 스라소니를 이끌고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 온 이유는 그대를 보려고.”

저벅저벅 다가오는 유클리드를 향해 하트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잔뜩 경계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간격을 좁혀 왔다. 저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긴장을 놓지 않는 이엘을 향해 유클리드는 배시시 웃었다.

“근데 너 가까이서 보니까 신기하다.”

“…….”

“내가 살면서 만난 인간 중에 네가 제일 예뻐. 우논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미친 소리를 한없이 가볍게 내뱉는 스라소니의 왕을 보니, 이엘은 저도 모르게 전의를 상실했다. 저 남자야말로 그녀가 만난 왕 중에, 가장 왕답지 않은 왕이었다.

*

“레이디. 나 무서운데 저 냄새나는 것들 좀 물리면 안 돼?”

“무례의 극을 달리는군요, 유클리드 님. 레이디가 아니라 왕이십니다.”

패티스가 더러운 것을 보듯 그를 쳐다보며 힐난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엘의 옆에서 헤실헤실 웃을 따름이었다. 반면 하이에나들은 유클리드를 보며 경계하는 것과 동시에 혹시라도 이엘이 그를 따라 떠날까 연신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폐하의 허락으로 유클리드 님을 초대하기는 했지만, 저희는 이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럼 보복이라도 하게?”

“필요하다면 못할 일도 없지요.”

“꼬맹이들이 제법이네.”

유클리드의 조롱에도 패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낯을 고수했다. 이엘은 두 사람의 신경전에서 시선을 떼 하트에게 돌렸다.

“괜찮나?”

“예.”

자신이 그녀를 왕으로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새 하트는 저도 모르게 이엘에게 공대를 하고, 그녀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돌아가 쉬도록 해라.”

“괜찮습니다.”

솔직히 이엘은 그의 반응에 꽤 놀랐다.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트는 신경 쓰지 말라던 패티스의 말처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제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 묘한 기운을 유클리드는 즐겁게 지켜보았다.

“역시 황녀였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말투나 기품이 우리와는 차원이 달라.”

“유클리드 님. 손님으로 대접해 드리는 것도 거기까지입니다.”

“…….”

“폐하께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조금 전에 가볍게 경고하던 것과는 상이했다. 진심으로 저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눈빛엔 살기만 담겨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하이에나의 공기가 사뭇 달라졌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만사가 천하태평인 유클리드가 하하 웃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과거에도 하이에나는 영주에게 맹목적인 헌신을 하던 종족이었다. 그러니 겨우 되찾은 왕에겐 더없이 순종하겠지. 이쪽은 자신들만큼이나 미쳐 버린 종족이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편이 좋겠다.

“뭐, 좋아. 나의 무례를 사과할게. 도량 넓은 그대가 날 좀 봐주면 안 될까?”

천성이 저런 놈이니 더는 말투 지적할 힘도 없었다. 패티스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린 채 물러나, 이엘의 답을 기다렸다. 이엘은 제게 사과하는 유클리드를 바라보다가 그의 앞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지에 온 것을 환영해요.”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철없는 애 같잖아.”

하이에나들은 너 철없는 거 맞다고 해 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유클리드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별수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예고 없이 찾아와 허가 없이 들어왔고, 왕의 소중한 백성을 해친 것을 사과드립니다.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대가 없이는 안 될 텐데요.”

이엘이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유클리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분위기를 살폈다. 이렇게까지 전투적으로 대응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인간 여자, 그것도 망국의 황녀였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를 얕잡아 본 듯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정식으로 화친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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