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오드는 품 안에서 푸른색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불에 그을리고 군데군데 찢어져 글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이엘은 그 종이를 알고 있었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의 눈알은 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마땅한 ……위험한…… 이기에 이는 극소수의…….」
“이건…… 금서 아니야? 책을 찾은 거야?”
이온과 이엘이 오드를 몰래 숨겨 주었던 어린 시절. 그들은 황궁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몰래 빼 와 오드에게 주었다. 그 안에 금서도 몇 권 섞여 있었는데, 내용을 보니 그때의 그 금서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그리고 그을린 부분을 ‘독수리의 눈알’로 추정해 볼 때, 오드가 말했던 과제와 일치한다. 이엘은 되도록 오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로빈의 성에 지낼 때도 연구 자료와 책을 뒤적거리며 금서를 찾았지만 끝내 찾진 못했다. 그런데 그 책이 왜 이런 낱장으로 남아 있는 걸까?
“앤디 님이 내게 주셨어.”
“……뭐?”
“혹시 앤디 님이 네가 주드의 기름을 갖고 있다는 걸 아시니?”
“아…… 응. 주드의 사체가…… 티가 났으니까.”
“역시. 그것 때문인가 보구나.”
오드가 난처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무슨 소리냐고 심각한 얼굴로 묻더라. 뒤이은 오드의 말에 이엘은 사색이 된 얼굴로 종이를 꽉 움켜쥐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무슨 내용인지 유추할 수 없을 거야.”
“그래. 나도 대충 둘러댔어. 연구 자료 같다고.”
“…….”
“걱정 마. 이온의 존재는 절대 안 들킬 거야.”
주드의 것이니 앤디에게 언젠가 돌려주려고 했지만 미련처럼 붙잡고 있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기름을 꺼낼 때마다 주드와의 추억이 생각나 제 품에 다시 숨기고 말았다. 이엘에게 기름은 주드가 남겨 준 유일한 유품이었으니까.
……그래, 의심을 살 바엔 한시라도 빨리 돌려주는 편이 낫겠지. 이제 내겐 필요 없으니까.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다시 펼쳐 읽어 내려갔다.
“오드. 그런데 이게…… 위험한 일이었어? 설마 네게……,”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쉬울 리 없잖아. 언제나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나에겐 괜찮아. 걱정 마.”
“나도 이 책은 처음 봐. 이게 금서에 있던 내용이었구나.”
“종이 돌려줘. 이런 건 안 보는 게 좋아.”
이엘은 종이 귀퉁이를 꾹 쥐며 오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드.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응, 그게 뭐니?”
다정한 그의 물음에 이엘은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았다.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땅속에서 ‘그’와 만났던 것도 이엘은 오드에게 말하지 않았다. 언제든 이야기하라는 오드에게,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오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 그의 앞에 자신이 ‘악’의 손을 잡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엘. 천천히 말해도 돼.”
“있잖아. 이런 거…… 이제 필요 없어.”
“…….”
“이런 게 없어도 이온은…….”
“알겠어.”
오드는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이엘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알고 있었어, 나의 엘.”
“오드.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해.”
“…….”
“난 늘 네게 엄격했지.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을 모두 네게 맡겼어.”
“아니야. 너는 좋은 보호자야. 그렇게 말하지 마, 오드.”
“엘, 잘 들어. 네 선택이 가져올 결과가 어떠하든 나는 네 편이야.”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려움을 참았다. 오드는 제 선택을 다 알고 말하는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는 알고 있는 거지? 제 눈빛에 대한 대답 대신, 그는 손을 잡아 주었다.
“네가 외롭게 걸어가지 않도록 내가 같이 갈게.”
“오드.”
“악에게 지지 마.”
“…….”
“너는 신께서 사랑하는 아이야. 간교한 악에게 넘어가선 안 돼.”
“…….”
“그래도 네 과제는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또 네게 필요한 날이 올 수도 있잖니?”
누군가의 아픔을 훔쳐 와 내 필요를 채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이엘은 그 말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오드에게 걱정을 안겨 주기 싫었다.
*
“진짜야?”
“그래.”
“어떻게…… 거긴 내가 이미 다녀온 곳인데.”
“네가 놓쳤을 수도 있지. 정확히 봤다고 했는데, 그래도 네가 직접 보는 편이 좋을 듯한데. 알다시피 네 종족이랑 헷갈리는 종족이 여럿 있잖아.”
이렇게 빨리 찾았다고? 이카르는 의문과 의심이 점철된 눈으로 패티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패티스는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카르가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이엘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됐어요. 다녀와요, 이카르.”
“하지만…….”
“아직도 날 못 믿어? 뭐, 좋아. 나도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확신할 순 없지. 다만 네가 꾸물거리는 새에 사라져도 나는 책임 못 져.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라고 누누이 얘기했고.”
“…….”
“폐하를 지키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혼자서 어떻게 지키려고? 이어진 그의 말에 이카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지만 내가 가면 나타니엘은……,”
“저런. 뭘 걱정하는 거야?”
“…….”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킬 텐데.”
하긴. 저쪽은 정말 목숨을 걸어서 지킬 태세지. 그녀의 안전이 걱정되는 건 아니지만……. 이카르는 머뭇거리는 시선을 옮겨 이엘에게 향했다. 이엘은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고 있었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이카르.”
“…….”
“종족을 찾고 싶다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의 종족이든 아니든, 확인을 하는 편이 낫지 않아요?”
“……금방 올게.”
“네. 기다릴게요.”
시각을 다투는 일이니 당장 떠나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이카르는 제 종족을 찾아 떠났다. 갑작스러운 이별이 시원섭섭해서 이엘은 괜히 이카르가 사라진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엘.”
곁으로 다가온 피시가 이엘의 손을 꾹 잡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걱정돼?”
“조금.”
“우논이잖아.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돼. 저 사람 세잖아.”
“아니면 어떡해.”
“…….”
“기대하고 갔는데 이카르의 종족이 아니면. 실망할 거 아냐.”
기대라는 감정은 참 웃겨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제멋대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다가도 작은 일에 쉽게 실망으로 변질되니까.
이엘은 그게 걱정이었다. 이카르는 오랜 시간을 종족 찾기에 매진했던 사람이었다. 아닌 척해도 기대하게 될 거고, 기껏 찾았는데 그의 종족이 아니라면……. 거기서 불어나는 실망감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될 테니까.
“엘은 너무 착해.”
피시의 말에 이엘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한 건 너야, 피시. 너를 두고 착하다고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이기적인 거지.”
“그렇지 않아. 내겐 엘이 제일 착하고 좋은걸.”
피시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렇게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생각에 실소하며 잡힌 손을 빼자, 피시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들린 패티스의 기침 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명백히 저를 방해한 행동에, 피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제 동생을 쏘아보듯 쳐다봤다.
그러나 패티스는 피시의 눈빛을 무시하고 이엘을 향해 말했다.
“폐하. 예정대로 오후 수련을 진행할까요?”
“아, 그렇게 해 주겠나? 하트는 어디 있지?”
“먼저 영지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영지 밖에서 할 모의 훈련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도 같이 가.”
“넌 안에 있어. 하트가 대신 나갔으니까.”
언제나 피시에겐 싸늘한 패티스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냉랭했다. 단호한 그의 말에 기가 눌린 피시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꾹 다물자, 이엘이 금방 오겠다며 피시를 달랬다. 그녀는 저를 간절히 바라보는 피시와 인사를 마치고 패티스를 쳐다봤다.
“피시를 잘 부탁해. 그리고 항상 고마워.”
“영광입니다.”
의례적인 대답이 돌아왔지만 이엘은 흔흔히 웃으며 그의 곁을 지나갔다. 패티스는 그녀가 영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하곤 돌아서려 했지만 그의 형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피시의 손을 홱 뿌리치며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왜 방해해?”
“뭐?”
“조금 전에 방해했잖아.”
“…….”
“나는…… 내 방식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엘이 떠나지 않게.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라고 한 건 너야. 방해하지 마.”
“방해한 적 없는데.”
코웃음 치며 그렇게 말했지만 패티스는 자신을 돌아봤다. 과연 나는 정말로 방해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나? 우습게도 질문에 답하기 꺼려졌다.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기로 마음먹기도 했고. 그는 망연히 저만 바라보는 형을 뒤로하고 성으로 먼저 돌아갔다.
*
“분명 이 근방이었는데.”
이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트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고요해서 한번 놓치면 다시 따라잡기 어려웠다. 제 키만큼 무성하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숨은 하트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때였다.
“어라.”
웃음을 머금은 가벼운 남자 목소리에 이엘이 재빠르게 뒤로 돌았다. 순식간에 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상대방은 헤벌쭉 웃으며 양손을 흔들 뿐이었다.
“너무하네. 나는 무기 없는데.”
“누구시죠? 정체를 밝히세요.”
“나? 내 정체?”
탁한 회색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맑은 벽안이 순하게 저를 향했다. 차림새를 보니 하이에나는 아니고. 근방에 머무는 인간인가? 이엘이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하는데 남자가 제 앞으로 불쑥 가깝게 다가왔다.
“내 정체를 굳이 알아야 돼?”
“네?”
“그보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가 중요할 텐데.”
“무슨……,”
“비켜!”
어디선가 툭 떨어진 하이에나가 이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트는 몸집을 커다랗게 부풀리며 대놓고 남자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해맑게 굴던 표정을 지우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이게 누구야. 내 새끼들을 으깨 죽여 버린 하이에나잖아.”
“유클리드.”
“버르장머리 없긴. 이래서 어린놈들이랑은 상종도 하기 싫다니까.”
외관으로만 보면 성장한 하트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지만 그는 하트를 진심으로 어린애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유클리드는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며 하트가 뒤에 숨긴 이엘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 몰래 납치하러 왔는데. 왕자님이 옆에 있을 줄이야.”
“…….”
“안녕, 레이디.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지?”
이엘은 소름 끼치게 다정한 유클리드의 목소리에 미간을 구겼다.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밑도 끝도 없는 다정함이었다. 유클리드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녀를 보며 한참을 웃었다. 어찌나 웃었으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는 제 눈가를 손으로 닦으며 이엘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 언뜻 노아와 비슷한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 위에 그윽한 생김새가 묘하게 어울리는 굉장한 미남이다.
“미래의 네 남편.”
“……뭐라고요?”
“네 수컷이 될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