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총으로 기선 제압을 하려 했는데 긴장한 나머지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타앙―! 뒤늦게 총을 쐈지만 그마저도 조준을 잘못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며 하늘을 향해 쏜 것이다.
“으, 으악!”
“진정하세요.”
단정하게 떨어지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니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괴성을 질러 대는 남자를 향해 은발의 청년이 손을 뻗었다.
“저는 사람입니다. 진정하세요.”
“사, 사, 사람?!”
“쉿. 목소리가 너무 커요. 누가 듣겠습니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섰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청년은 자신을 향해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이 근방에 사시나요?”
“예, 예…….”
“마을이 있습니까?”
“아, 네. 작은 마을이라 숫자는 적습니다.”
“그렇군요. 정착하신 걸 보니 식량은 해결하신 건가요?”
“몇 달 전에 거래하던 마을에서 얻어 온 씨앗이 있습니다. 그걸로 일단 농작을 시작했는데, 아직 날이 차가운 탓에…… 솔직히 조금 어렵습니다.”
“총을 갖고 계시는군요.”
청년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방에 이종족의 영지가 많아서요. 혹시 몰라서…….”
“사냥도 준비하시는 건가요?”
“그,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인원이 많지 않아서 그럴 엄두도 못 냅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배를 곯다가는……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제게도 딸린 아들이 있어서……. 목숨을 걸어야겠지만요.”
청년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웃으며 그를 더 안쪽으로 이끌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던 빛이 점차 짙어져 어느새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남자는 찌푸렸던 눈을 억지로 뜨며 빛의 근원을 보려 했다. 그런 그의 눈을 밝힌 것은 아득할 정도로 우람한 나무 한 그루였다.
“축복의 나무입니다.”
“추, 축복의 나무……?”
“이곳의 토양이 좋아서 마을에 옮겨 심지는 않겠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이곳을 찾아 과실을 거둬 가세요.”
“어떻게 축복의 나무가…….”
“당신들은 믿음이 좋으시군요. 제 손이 닿지 않아도 싹이 보였던 나무는 이 나무가 처음입니다.”
성력으로 간신히 버티던 축복의 나무들은 나자르가 몰살되면서 덩달아 생명을 잃고 메말라 갔다. 그렇게 대부분 말라비틀어져 죽어 버렸고, 그나마 남은 거라곤 싹을 틔우지 못한 채 앙상한 가지로 형태만 유지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니 그 축복의 나무에 싹을 틔울 수 있는 존재는 나자르뿐이란 소리다.
“설마 당신……!”
“대부분 축복의 나무들은 제가 손을 대야 싹을 틔울 수 있는데, 이 나무는 이미 싹이 보였어요. 그건 당신들이 신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나무는 신의 자비를 받아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 나자르……,”
“오드. 그만 돌아갈 시간이야.”
맑은 목소리에 남자가 열었던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나무 근처에 손을 대고 서 있던 사람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외형만으로는 남잔지 여잔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한 소년이 제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다시 불렀다.
“오드. 시간이 없어. 돌아가야 돼.”
“그래. 돌아가자.”
“저, 저기 잠깐만요! 혹시 당신들…… 뱀에게 잡혔다던 그분들이십니까?!”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오드 대신 소년이 대답했다. 남자는 홀린 듯이 소년에게 시선을 박았다. 빛의 세기가 약해져 이제야 소년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정말로, 정말이었구나…….
“화, 황자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오드의 축복을 들으며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평민이었지만 귀족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에게 황족은 높디높은 존재였다. 소년이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압감에 절로 숙연해졌다.
“하이에나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네?”
소년의 갑작스런 말에 남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화들짝 놀라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소년의 곁에 커다란 짐승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두툼하고 길쭉한 목에, 온몸에 새겨진 점 같은 무늬. 금방이라도 입을 벌려 그 단단한 치악력으로 숨통을 끊어 버릴 듯한 기세의 하이에나가 네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하이에나는 인간 마을을 습격하지 않을 거예요.”
“어, 어떻게…….”
“엘. 그만 돌아가자.”
소년의 곁에 서 있던 하이에나는 남자를 본척만척하더니 칭얼거리듯이 소년의 옷 끝을 물어 당겼다. 소년은 작게 웃으며 하이에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라 남자는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디 지금과 같은 믿음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오드의 친절한 충고에 남자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이에나와 두 사람은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나무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양쪽 뺨을 내려쳤다. 찰싹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내 졸아서 내가 꿈을 꾼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기엔 그의 눈앞엔 축복의 나무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며 고고하게 서 있었다.
*
“폐하. 홀로 가시면 위험하십니다.”
“오드와 피시가 함께 갔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피시는 능력을 잘 쓰지 못합니다. 자칫하면 폐하께 해가 될 테니, 차라리 하트와 함께 가십시오.”
“싸우러 간 것도 아닌데, 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오늘따라 다정하게 대꾸해 주는 이엘의 목소리에 패티스는 하려던 잔소리를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폐하께선 자비로우시군요. 당신을 버린 종족인데도 그들을 위해 축복의 나무를 살려 두러 가시다니요.”
“동시에 내 종족, 내 백성이기도 하지.”
“…….”
“그들은 모두 내 무책임의 소산들이야.”
이따금 이엘이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죽은 조이나가 떠올랐다. 단순히 같은 위치에 선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언뜻 비슷하게 느껴져서.
“처음으로 인간이 부러워지는군요.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은 무리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니까요.”
20년 넘게 왕도 없이 어설프게 살아왔던 우리와는 달리. 그 말은 삼키고 패티스가 꾸며 낸 미소를 짓자 이엘이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내겐 거짓을 고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예?”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
“나는 억지로 여기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있고, 그대와의 거래도 내가 원해서 응한 것이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속내를 꽁꽁 숨겨 가면을 쓴 로빈과는 달리, 이쪽의 넷째 왕자는 그저 염려가 되는 것이다.
언제든 왕이 떠날까 봐.
“황위는 인간만을 위해 오르려는 게 아니니까.”
“…….”
“게다가 축복의 나무는 인간만을 위한 게 아니란 걸 알지 않나. 장기적으로 볼 때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과 사냥을 줄여 줄 것이다. 식량이 줄어들면 인간은 자연히 사냥을 나가게 될 테니까. 먹이사슬에서 인간과 이종족은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아. 그 역할을 축복의 나무가 대신할 것이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잡아 하나로 높게 묶었다. 그러곤 이슬에 젖은 로브를 벗으며 패티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대신 옷을 받기 위해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었으나 이엘은 작게 웃으며 거절했다. 그러곤 나긋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패티스.”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
“그렇게 억지로 웃지 않아도, 나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벗은 로브를 제 팔에 걸쳐 들고 이엘이 패티스의 옆을 지나쳤다. 은은한 체향이 스치듯 코끝에 머물렀다가 떠났다. 순간적으로 후두부를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언뜻 그녀가 저를 보며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비웃음도 아닌 순수한 웃음으로.
그리고 그 웃음이 잔상처럼 짙게 남아 시야를 가렸다.
“패티, 엘은 어디 있어?”
“…….”
“패티스?”
새벽이슬에 젖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들어선 피시는 얼이 나간 패티스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저러지? 저렇게 정신이 나간 얼굴은 난생처음 본다.
“패티. 왜 그래? 엘에게 혼났어?”
“어…… 어?”
“괜찮아?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엘은 어디 있어? 만났어? 여기로 들어갔는데.”
“폐하는 침실 쪽으로 가셨어.”
“알겠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던 피시는 그녀가 갔다는 방향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패티스가 그를 잡아 세웠다.
“잠깐.”
“왜?”
“너 어디 가?”
“엘에게.”
“침실에?”
“응. 왜?”
내가 뭐 잘못했어? 그렇게 묻는 피시의 얼굴은 무구 그 자체였다. 그러게, 새삼스럽게 내가 왜……. 오히려 그렇게 종용한 건 자신이었는데. 그는 할 말을 잃고 잡았던 형의 팔을 놓았다.
“패티. 몸이 안 좋으면 좀 쉬어. 요새 무리해서 그런 거 아니야?”
자신과는 정반대로 피시는 놀라울 만큼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와 이런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피시는 걱정을 담은 눈동자로 자신을 한참이나 살피다가 그만 가라는 손짓에 그녀의 침실로 사라졌다.
아주 찰나였지만 피시가 이엘의 침실로 들어가는 게 불쾌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정말 찰나에.
패티스는 손으로 제 코끝을 쓸었다. 냄새란 냄새는 모두 사라져 무취의 공기만이 남았는데, 어쩐지 제 코에는 미미한 향이 영원히 묻어 나올 것만 같았다.
*
“기도하러 왔니?”
“응. 좋은 아침이야, 오드.”
“좋은 아침이야, 나의 엘.”
오드가 이엘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원래는 노아도 오드와 함께 오기로 했지만 그쪽 사정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꼬여서 오드만 홀로 오게 됐다. 그래도 오드가 와 준 덕분에 축복의 나무를 찾아 생명을 불어넣는 게 쉬워졌다.
“왕자님도 좋은 아침입니다. 평안한 밤 되셨습니까?”
“…….”
피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오드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엘을 데리고 갈까 두려워, 만날 때마다 경계했다. 그럼에도 오드는 그의 순수한 성품을 좋아해 매번 반갑게 인사했다.
“왕자님. 잠시 엘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알겠어.”
한시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지만 피시는 이엘을 믿기로 했다. 말없이 떠난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약간의 불안을 담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엘은 피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피시.”
“응.”
아쉬운 듯 웅얼거린 피시가 습관처럼 그녀의 손끝을 조금 움켜쥐었다가 놓고는 성전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엘. 혹시 주드의 기름을 갖고 있니?”
“……응. 그건 갑자기 왜?”
“이것 좀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