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글쎄.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군.”
보통은 암컷을 마음에 품으면 제 반려로 맞는 것이 정상이다. 공작이라면 공작 부인으로, 백작이라면 백작 부인으로. 남녀의 차별이 없는 독수리조차 이런 식이었다. 모계사회가 아니고서는 모든 종족이 그랬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국한되었을 때의 이야기고.
“그녀는 인간이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동시에, 포기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까지 봤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화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들의 약하고 추한 모습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모습. 그렇다면 우리 이종족의 다름 또한 이해하지 않을까.
실제로 그대는 그러했지. 죽은 늑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인간에게서 보호석을 빼앗았으며, 내 종족에게 점자라는 인간의 도구를 선물했다. 신이 창조하신 이래, 이토록 우리를 이해해 준 존재가 있었나.
왕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곧 백성이 버려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이 집단 자살로 종족을 포기하려 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정통성이 확실하니까.”
인간은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저 지금처럼 평탄하길. 옆에서 누가 죽든 말든, 그저 나만 평탄하길……. 그러니 한 가문이 오랜 시간을 통치해도 반발할 마음조차 없었지.
그들에겐 그저 먹고 놀고 자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통치는 귀찮으니 누군가 알아서 해 주길. 어차피 작위가 없어도, 작위를 가진 이종족보다 우위에 있을 테니 그저 놀고먹으리라. 어찌 보면 짐승만도 못한 욕구였다. 드물게 신의 축복을 활용해 지식을 쌓아 올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인간은 극소수였다. 황실은 인간에게 안락을 주었고, 그것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므로 모두를 배부르게 할 순 없었다. 때문에 입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인구수를 통제해 왔던 것이다.
처음부터 변화를 막았다. 황실에 반하지 않도록, 현재의 환경에 만족하도록. 그러니 남아 있는 극소수의 인간들은 제게 주어진 유희와 쾌락에만 미쳐, 현실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여전히 인간들은 눈앞에 닥친 것들을 해결하기에만 급급했다. 지금 이종족의 아래서 우리를 구원해 줄 존재가 나타나길. 그게 누구라도 좋아. 제발 이 현실만 어떻게 좀 해 줘.
그런데 황자가 살아 있다고?
그렇다면 이 귀찮지만 대단한 일을 황자가 해 주면 되잖아. 찬란한 제국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게, 살아남은 황족이 다시 일하면 되잖아. 우리를 이종족의 손에서 건져 주는 건, 황족이 해야 할 일 아니야?
“황자의 반지를 후작도 알고 있겠지. 상징성에 불과한 물건이지만, 그걸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는 보장돼. 수많은 형제를 제치고 반지를 받은 황자가 황위에 오르는 게 정통이니까. 그만큼 정통이라는 건 높은 신분에서 낮은 신분까지, 모두의 눈을 가리는 단어다.”
“인간들은 좋아하겠군요.”
“이종족은 경계하겠지. 미치광이 선황의 자식이라니. 두려움에 그녀를 죽이려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대하게 되겠지. 우린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인간을…….”
“그래. ……인간을 사랑하도록.”
신께선 정말…… 너무하시군요. 저렇게 약하고 악한 존재를 왜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까지 그들에게 주도록 만드신 건지……. 그런 불경한 생각을 엔리케는 한숨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있을 땐 우리는 서로 평화를 유지했다. 종족 간 먹이사슬의 균형을 잘 맞춰 가며 서로의 영지를 넘지 않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
“그러니 지금 이 세계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끼게 되겠지. 통치해 줄 인간을 본능적으로 바라게 될 테니.”
“그렇군요.”
“선황의 자식이지만, 선황을 닮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불안한 기대를 심어 줄 거야. 너는 다르겠지. 너는 달랐으면. 오랜 시간 통치했던 가문에게, 본능적으로 다시 허리를 숙이게 되는 거다. 귀소본능처럼.”
인간은 제 욕심과 안위를 위해 정통성을 바란다면, 이종족은 본능으로 정통성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타니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
선택적으로 피임을 하고 있다고……. 르네는 그 사실을 아직 노아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건…… 그래, 그건 그녀가 갖고 있는 온전한 그녀만의 권력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을 저버리고 택한 파멸의 권력.
이엘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르네는 침묵할 것이다. 그녀가 뱀의 소굴에서 위태로운 순간이 닥쳐올 때까지 함구했던 것처럼. 필요에 의해 입을 열기 전까진 자신도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이다. 그건 그녀만의 권력이었다.
그런데…… 그걸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씁쓸함에 웃음을 삼켰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엔리케에겐 다른 의미로 들렸다. 유일한 암컷이니 그녀의 선택을 바라는 수컷들을 휘두를 수 있으리라는 의미로.
그의 해석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매의 서신만 하더라도 이미 기로를 틀어 버렸다니까. 단단한 연합군의 경비를 뚫느니, 차라리 인간 여자의 환심을 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겠지.
마치 뱀처럼.
“그리고 자기희생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지. 적어도 죽음의 상황에서 백성을 버리고 내뺄 사람은 아니란 거다.”
“인간은 변합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누가 루시우스 러셀이 그런 짓을 할 줄 알았습니까? 마치 엔리케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을 받으며 르네는 야트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자신이 변할까 제 목숨을 맡기는 인간도 있던가?”
“…….”
“나타니엘은, 그녀는 늑대에게 제 목숨 줄을 쥐여 주었다.”
“네?”
“늑대들의 귀족회의에서 그랬다더군. 절개 높은 기사단이 자신의 뒤를 지키며, 자신이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엔 주저 없이 제 목을 찔러 달라고.”
그녀의 가장 큰 방패막은 늑대의 연합군이다. 늑대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종족의 연합군은 늑대가 돌아서면 와해될 수밖에 없다. 중심에서 균형을 맞춰 주는 게 늑대니까. 그러니 제 목숨 줄을 늑대에게 쥐여 주었다는 건, 결국 목숨을 이종족 모두에게 주었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였다.
물론 엔리케의 말처럼 인간은 변한다. 언젠가 그녀 역시 제 아비처럼 폭군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나 예고 없이 학살당하는 것보다 그것을 각오하고 준비하며 시작하는 게 낫다는 것쯤은 겪어 봐서 알고 있었다.
이엘은 그것을 말해 준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믿지 말라고. 나 역시 연약한 인간일 뿐이니 돌아설 수 있음을 알고 있으라고. 그것은 달리 말하면 도움을 청한 것과 같다. 나는 혼자서 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나를 도와 달라고.
나와 함께 만들어 가자고.
수탈 목적이 아닌, 조화를 위해 협조를 구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르네는 함께 걸어가자는 자신의 말에 기쁘게 마주 웃던 이엘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나는…… 나타니엘의 뛰어난 염량과 현명함을 사랑한다. 이제껏 그녀가 뿌려 온 작물은 제때에 수확하는 것에 성공했지. 지혜로운 통치자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법이다. 나타니엘은 계속해서 제 존재의 필요성을 그런 식으로 증명해 왔어.”
“…….”
“나처럼 아둔하여 저가 살기 싫다고 백성을 저버리는 왕보다는 훨씬 나아.”
“폐하, 그것은 저희 또한 동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더 아둔하다는 것이다.”
“…….”
“너희의 지혜마저 가려 버렸으니.”
이런 식이면 밤도 새겠군. 르네가 자조하며 덧붙이자 엔리케도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게 폐하께서 선택하신 이유군요.”
“그대가 물어보니 답한 것이지만, 그대들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근 시일 내로 귀족회의가 열린다고 들었다. 어떠한 결과라도 나는 납득할 테니 거짓을 꾸미지는 말도록.”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이후로 이야기를 좀 더 주고받은 엔리케는 들어왔을 때처럼 공손히 릴리의 방을 나갔다. 어느덧 짙은 밤이 찾아왔다. 르네는 가져왔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창틀 위에 올려 두었다.
한 번쯤 제대로 된 군주를 섬겨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공작 위를 지낼 때도. 끊임없이 그런 생각을 해 왔다. 비단 자신뿐 아니라 충신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해 봤겠지. 자신의 손으로 추대한 현명한 군주의 치세를.
그게 르네는 이엘이었다. ‘믿게 만드는 인간.’ ‘믿고 싶은 인간.’ ‘믿을 수 있는 인간.’ ‘믿어야 하는 인간.’ 모두 그녀가 가르쳐 준 단어였다.
“군주와 반려가 동일시되는 게 옳은 건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모든 생각과 가치관의 기초가 된 게, 그저 ‘단순한 사랑’이었음을.
한 겹도 되지 않는 얇은 사랑이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정신을 차렸을 땐 제 전부를 갉아먹어 버렸음을.
그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바른 눈으로 널 보지 못했을 테고, 네 가치를 부정했을 것이며, 내 인생에 찾아온 빛을 스스로 걷어차 버린 우둔한 남자가 되었으리라.
제 눈은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었으나, 그녀를 향한 사랑이 눈동자를 가린 편견을 떼어 내고 나서야 르네는 스스로가 완전해졌음을 느꼈다.
모든 것은 그저 ‘단순한 사랑’에서 시작됐다.
*
“거기, 누구야!”
“…….”
“모습을 드러내라! 안 그러면 총을 쏠 거야!”
불침번을 서던 남자가 총구를 겨누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우거진 풀숲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였던 것이다. 최근 들어 이종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노예들이 도망쳐도 뒤쫓아 오거나 보복을 가하지 않았다. 사냥하는 일도 줄었고 인간 마을을 침략하는 일도 줄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자신 혼자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젠장. 큰일 났네.
남자는 달달 떨리는 턱을 애써 다물며 천천히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지역이나 다 그렇겠지만 이쪽 지역은 최상위 포식자가 사는 영지 근처였다. 몇 달 전엔 땅 아래까지 습격을 당해 불구덩이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어느새 식은땀까지 흘리며 숲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아차! 이러다 마을이 습격당하면 어떡하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서둘러 돌아가려 했지만, 일순 곁눈으로 보인 무언가에 멈칫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는 다시 총을 겨눈 채 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거, 거기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