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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06화 (206/488)
  • 206화

    피시는 아직도 이엘을 처음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한다. 새하얀 눈. 그 위에 늑대들이 흩뿌린 새빨간 피. 그리고 제어가 안 되는 자신의 감정을 더더욱 증폭시켜 버린 그녀의 존재. 늑대들을 지키기 위해 서 있던 모습에서, 마치 새하얀 눈이 반사라도 된 양 반짝반짝 빛이 났다.

    첫 만남에 그녀가 여자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이 세상엔 암컷이 전부 죽어 버렸는데. 모든 여자가 죽어 버렸는데. 어떻게 너 혼자 살아 있어? 위험할 텐데……. 네겐 너무 위험한 곳일 텐데, 여긴. 어떡하지?

    “그러니 그 전에 우리가 선수를 쳐야 돼, 피시. 그렇게 득달같이 몰려들기 전에, 폐하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 알아들어?”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잘 살아남아 세력을 구축했다.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를 순식간에 뒤바꾸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모든 종족이 그녀의 발 아래…….

    “피시. 내 말 들려?”

    “있잖아, 패티스. 너는 내가, 네가 말한 그 종족들처럼 엘의 발 아래 기어 다니며 선택을 바란다고 하면. 그렇게 한다고 하면 싫어할 거야?”

    “…….”

    “우리에겐 자존심이 있으니까?”

    갑작스런 피시의 물음에 패티스는 제 형제를 오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똑같은 눈동자 네 개가 서로를 옭아매듯 붙박였다. 한참 만에 패티스는 히죽 웃으며 피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전혀.”

    “…….”

    “암컷 앞에 무슨 자존심을 내세워. 그딴 건 필요 없어, 피시.”

    그저 우위를 점하고자 먼저 선수를 치자는 소리였지. 덧붙여진 패티스의 말을 곱씹으며 피시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다시금 그에게 물었다.

    “성 안에 도는 이상한 소문도 네가 낸 거야?”

    “눈치가 없는 건 아니구나.”

    “그런 짓 하지 마. 엘이 곤란해해.”

    “그렇게 배려할 때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해.”

    처음으로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피시의 모습에 패티스는 속으로 놀랐다. 언제나 제 앞에선 잔뜩 억눌려 입도 제대로 못 떼던 형이, 언젠가부터 종족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본성을 찾아가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참…… 의외의 모습을 다 보네. 흥미롭게 생각하며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래.”

    “…….”

    “나도 버림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 순간 마지막 돌을 발로 걷어차고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피시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자, 그녀가 모호한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나 좀 봐 주면 안 돼?’

    씁쓸하게도 자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엘의 눈동자엔 제 것과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냥…… 봐 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녀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비록 엘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패티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피시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멍청한 소리 말라며 그를 힐난할 순 없었다. 절망적인 답변이었음에도 피시의 눈은 오히려 빛나 보였으니까.

    “내가……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돼.”

    “…….”

    “버림받지만 않으면 돼.”

    엘이, 나를 떠나지만 않으면 돼. 그러면 돼. 그거면…… 우리는 만족할 수 있잖아.

    우리는 그런 종족이잖아.

    피시의 말처럼 하이에나는 그런 종족이라서, 패티스는 하고 싶은 말을 처음으로 집어삼켰다.

    *

    띵―

    정적을 깬 맑은 피아노 소리가 방 안을 빼곡하게 채웠다. 르네는 의자에 앉아 다시 한 번 피아노를 눌렀다.

    ‘오빠!’

    오랜만에 그 아이가 제 꿈에 나왔다. 습격 이후에 밀린 업무 처리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살다가 정말 오랜만에 잠들었는데, 릴리가 예쁘게 웃으며 저를 불렀다.

    모순. 완벽한 모순이다.

    선황의 자식은 용서하고, 루시우스 러셀의 자식은 용서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악의 크기를 운운하는 게 아니다. ……아니. 악의 크기를 운운한다면 더더욱 용서 못 할 사람은 선황의 자식이지.

    미안하구나, 릴리. 네겐 더없이 부끄러운 오라비라. 맥없는 웃음이 공중에 흐트러졌다. 르네는 릴리의 피아노를 천천히 눌러 보았다. 제 동생을 생각하며 시작한 곡이 마칠 때가 되어서는 그녀를 향한 곡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폐하.”

    노크 후에 정중히 들어온 후작이 공손한 절과 함께 르네의 앞에 종이를 건넸다.

    “매 쪽에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

    “매의 왕께서 휴전을 청하셨습니다.”

    우습군. 뱀의 세력이 퇴락하니 이쪽으로 붙겠다는 심보인가, 그게 아니면 나타니엘 때문인가. 봉해 있는 봉투를 열어 정갈한 필체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노아에게도 이런 편지가 물밀 듯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어찌할까요?”

    “방문 요청은 모조리 거절하도록.”

    “예, 폐하.”

    “후작.”

    “예.”

    “그대도 그날을 기억하나?”

    “그날이라면…….”

    “1차 전쟁이 터졌던 날.”

    엔리케의 아들 역시 그날 제 반려를 잃었다. 엔리케는 미쳐 날뛰는 아들을 제지하며 가족이었던 암컷들을 고요히 떠나보냈다. 그러면서도 본분을 잃지 않고 릴리를 지키는 것에 몸을 바쳤다. 엔리케는 그렇게 올곧았다.

    “……예, 폐하.”

    “그래.”

    왕의 번뇌를 잘 알겠다.

    엔리케는 자신이 왕께 건넸던 브로치가 줄곧 마음에 걸렸다. 루시우스 러셀은 종족의 분노를 모조리 산 인간이었기에, 그의 가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쟁 중이었음에도 부득이하게 르네를 찾아가 사실을 알려야 했다.

    21년 전의 그날뿐만 아니라, 11년 전의 그 일 또한 기억하고 있다. 불타던 러셀가. 독수리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저택은 불에 타 재만 날리고 있었다. 터만 남은 그곳에, 그리고 그 주변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이미 이종족이 한차례 쓸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분명 거기엔 러셀 후작 부인과 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흔적만으로도 사무친 원한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니 그의 자식은 모두 죽었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니……. 엔리케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폐하.”

    “노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더군.”

    “그렇습니까?”

    “알면서 놈을 감췄어. 놈이 루시우스의…….”

    빌어먹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역겹다. 지끈지끈 아픈 머리를 감싸며 무너지듯 상체를 숙였다. 덕분에 그의 팔이 떨어져 누른 기괴한 건반 소리가 귀를 때렸다. 엔리케는 왕이 진정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용서해야겠지.”

    “…….”

    “내가 놈을 용서해야, 그녀를…….”

    일라이저도 이엘도 무고한데. 둘 다 그 일과는 무관한데. 제 마음은 참 간사해서…….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던 때가 좋았는데.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릴리를 생각하면 용서할 수가 없는데.

    그녀를 생각하면 이 모순된 마음은 어떡하란 말인가.

    르네는 괴로움에 침음했다. 참 웃기는구나. 이엘에겐 그토록 당당하게 이야기했는데. 막상 원수 같은 루시우스의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니, 손바닥 뒤집듯 쉽게 변하는 제 마음이 그저 우스웠다.

    “저희는 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

    “상황 때문에 억지로 하는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 용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 그렇군.”

    “폐하께서 루시우스의 아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든, 언제나처럼 저희는 수긍하며 따를 것이고 또한 폐하를 이해하겠습니다.”

    “…….”

    “중요한 건 폐하의 마음입니다. 부디, 억지를 부려 용서와 자비를 베풀진 마십시오. 그건 폐하 자신을 두 번이나 상처 입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결정된 일이 아닌가. 르네는 이엘을 선택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체계라도 바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제 마음 역시 그녀를 위한 결단을 해야겠지.

    ‘오빠. 난 괜찮아. 이제 그만 나를 놔줘도 돼.’

    ‘릴리.’

    ‘나는 행복했어, 오빠.’

    어젯밤 꿈은 그런 의미였던 걸까? 릴리, 너는 나를 이해해 주는 건가? 이렇게 이기적인 나를……. 르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피아노를 덮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군.”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타니엘 리카르디스 르뷔아.”

    “…….”

    “황녀 말이다.”

    어차피 종족은 왕의 뜻을 따르게 되어 있지만, 르네는 이전의 집단 자살 건을 떠올리며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왕이 삶을 포기했다고 해서 모든 개체가 그런 게 아니듯이, 왕이 여자를 선택했다고 해서 종족 모두가 찬성할 리 없다.

    르네는 그녀를 제 반려로 맞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나타니엘을 자신의 주군으로 섬기려는 것이다. 왕의 반려는 종족이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만, 왕이 바뀌는 것이라면……. 그의 종족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마음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나는 그대들의 선택을 존중하네.”

    “폐하께선 그분의 어떤 면을 보시고 선택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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