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05화 (205/488)
  • 205화

    *

    “성벽은 이 정도 높이로 쌓는 게 좋아요.”

    “예, 폐하.”

    “시간이 있으니 너무 급하게 쌓지는 말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땅이라 그런지, 모든 종족에게 있는 성벽조차 이곳엔 없었다. 제아무리 하이에나라고는 해도 자신이 이곳에 머무는 이상 수호를 단단히 하는 편이 좋겠지. 이엘은 폐부로 들이치는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저곳엔 아직 밀로가 있을까? 보이진 않지만 저 하얀 구름들 사이에 그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곳에 머물면서 고질병이었던 무릎 통증도 줄어들었고 체중도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모두 평안하다는 의미였다. 이런 평화를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고요했다.

    “엘. 무슨 생각 해?”

    “어서 와, 피시.”

    “모닝 키스.”

    어젯밤, 악몽을 꿨다며 제 방을 찾아온 피시는 웬일로 지금까지 늦잠을 잤다. 이엘은 아침부터 밀린 영지 일에 일찌감치 준비하고 나오느라 피시를 따로 깨우진 않았다. 지금에서야 일어난 피시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그의 다정하고 애정 어린 입맞춤이 이마 위에 닿자, 곁에 있던 다른 하이에나들이 헛기침을 하며 은근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아무래도 영지에 돌고 있는 소문 때문인 것 같은데…….

    “피시. 당분간은 무서워도 밤에 내 방에 오면 안 돼.”

    “왜?”

    “왜라니. 사람들이 오해해.”

    “누가? 왜? 무슨 오해?”

    “음…….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영지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

    이엘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대충 수습하려고 했다.

    “내가 네 수컷이라고?”

    “어……? 아…… 알고 있었구나.”

    “응. 지나가는 우논들이 다 그렇게 말해.”

    “어쨌든 괜한 소문이 돌면 좋을 게 없어.”

    “소문이 아니면 되잖아.”

    “…….”

    “나는 언제든 너와 함께할 마음이 있는데.”

    단순히 애정을 동반한 연인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더 은밀하고 진득한 소문에 이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런 게 아냐, 피시. 그녀의 중얼거림에 피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 컸어, 나도.”

    “피시. 그러니까 이건……,”

    “기꺼이 네게 봉사할 수 있는데…….”

    “그만!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화들짝 놀란 이엘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거르지 않고 나온 그의 말에 되레 자신만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피시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가 더 빨랐다. 피시가 제 입을 틀어막던 이엘의 손바닥을 혀로 길게 핥아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피, 피시…….”

    “어떻게 하면 내가 네게 어울리는 수컷이 되는데?”

    마냥 어린애로만 생각했던 피시의 낯선 말투에 이엘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피시는 샅샅이 핥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약지 끝을 깨물었다.

    “나도 좀 봐줘.”

    “…….”

    “응?”

    오늘의 피시는 자신이 알던 어린 소년이 아닌 것 같아서 곤란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화답할 수 없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시는 이엘의 손바닥에 쪽쪽 입술을 붙였다.

    “사랑받고 싶어.”

    “피시…….”

    “나 좀 봐 주면 안 돼?”

    처음 만났던 그때의 어린 소년은 완전히 사라졌고, 남은 건 오롯한 성체의 모습을 한 남자였을 뿐.

    *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네. 신은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지.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형아. 황제가 뭐야?”

    “황제가 뭐냐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텐?”

    “으응, 황제가 다시 돌아올 거라잖아.”

    “뭐?”

    “황제가 올 거래! 그러니까 황제는 좋은 사람이지? 우리 편이야? 이종족을 무찌르고 우리를 구해 주러 오는 거야?”

    “…….”

    “형아?”

    남자는 제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황제…….”

    “형아!”

    황제가 돌아온다고……? 남자는 한참이나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리다가 눈을 크게 치떴다.

    ‘알잖아. 인간이 얼마나 환멸이 나는 종족인지. 그러니 너도 보고 싶지 않나, 황자?’

    그날. 속수무책으로 마을이 무너져 엉망이 되었던 그날. 뱀의 왕이 그 소년을 잡아채며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맞아, 우리에겐 황자가 남아 있어……. 우리에게도 벗어날 구멍이 있었어.

    “형?”

    신께선 우리를 위해 마지막 희망을 남겨 놓으셨더라.

    *

    “형편없어.”

    챙그랑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던 이엘은 하트의 냉혹한 평가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그는 피시의 부탁으로 자신의 검술 훈련을 억지로 봐주고 있었다. 그런데 집중을 못 하고 호흡이 흐트러져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니, 제게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한다.

    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죄송해요.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

    “부탁드립니다.”

    하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저렇게 약한 걸 어떻게 왕으로 섬기나? 자신들의 왕은, 조이나는 저렇게 약해 빠지지 않았다. 혼자 일족 수십 마리와 맞붙어도 너끈히 이길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하지만 자신은 끝내 그녀를 왕으로 인정하겠지. 제 의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남은 혈육 둘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승계하면 가문은 네가 이끌어야 한다.’

    ‘예.’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지 말렴. 네가 누구보다 동생들을 아끼는 것을 내가 아는데.’

    ‘…….’

    ‘내게는 어리광 부려도 되는데, 너는 좀체 그런 게 없구나.’

    그래도 그때는 곧잘 웃었다. 의외로 네쌍둥이 중에 형제애가 가장 강한 게 하트였기에, 그는 조이나와 이야기할 때면 드물게 웃기도 했다. 다정한 누님의 충고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니 자신은 피시와 패티스의 말을 무시할 수 없겠지. 그들이 저 인간 여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고 하면, 반대는커녕 선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의지를 갖고 저 여자를 택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자신은 저 인간 여자를 인정한 게 아니니까.

    “일어서.”

    그의 말에 이엘이 일어서자마자 돌덩이들이 눈앞에 몰아쳤다. 이엘은 들이닥친 몇 개를 피하고는 허공에 떠오른 커다란 돌을 차례차례 밟고 위로 올라섰다.

    하트의 능력은 상당히 정교해서, 여러 개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면서도 그녀가 밟고 선 것들만은 바닥으로 푹푹 떨어지게 했다. 몇 차례 그의 공격을 상대하며 익숙해진 이엘은 넓은 시야를 확보하며 공중에 뜬 돌을 밟고 빠르게 이동했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들이닥친 그녀의 검이 뱀처럼 꼬불거리며 하트의 시야를 갈랐다. 고개를 뒤로 홱 내빼며 시각을 포기해 버린 탓에 기껏 쌓아 올렸던 돌덩이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무서운 기세였다. 마치 조금 전의 실수를 무마하려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들이닥쳤다.

    하트는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다시 눈을 썼다. 흙먼지가 살아 움직이는 인형처럼 형체를 만들어 이엘을 덮쳤다. 눈과 코가 막힌 이엘은 아예 눈을 감았다. 어차피 깜깜한 땅속에서 살 때엔 대부분의 감각을 버리고 살았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어, 눈을 감은 채 검을 들고 뛰어올랐다.

    뺨을 긁고 지나간 자잘한 돌멩이 때문에 얼굴 곳곳이 따끔했지만 이엘은 검에만 집중했다. 저쪽은 위험하면 알아서 피하겠지.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해 공격하는 것만이 답이다.

    하트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게다가 자신을 봐주지 않고 상대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저도 모르게 온몸에 열이 끓어오른 상태였다.

    “저, 저러다 다치면 어떡해.”

    “걱정도 팔자네. 폐하는 네 생각보다 강하니까 방해할 생각 하지 마.”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피시는 초조함에 발을 굴렀다. 그녀가 수련을 원하기에 자신이 직접 하트에게 부탁했지만, 저렇게까지 살벌하게 훈련을 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패티스의 핀잔에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래, 왕이라면 강해야지. 나지막한 패티스의 말을 들으며 피시는 주먹을 쥐었다. 강한 암컷일수록 지도력이 강해지는 건 종족의 당연한 룰이었다. 패티스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녀를 굴릴 생각인 모양이었고, 하트는 패티스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저렇게 몰아치는 훈련을 하겠지. 피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삼켰다.

    어제도 팔과 다리에 생채기를 잔뜩 달고 돌아와 제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가 강해지는 건 분명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속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보다 폐하의 마음을 움직이고는 있는 거야?”

    패티스는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피시를 떠봤다.

    “잔챙이는 내가 처리한다고 약속했잖아. 형님은 빨리 폐하의 마음을 얻어 내라고.”

    자신의 채근에도 피시는 침묵했다. 저렇게까지 고요한 것을 보면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성내에 도는 소문은 패티스가 퍼뜨린 것이었다. 이엘은 하이에나 종족 전체가 인정한 그들의 왕이다. 지금이야 자리를 잡느라 여유가 없어서 신경을 못 쓰겠지만, 차차 안정이 되면 종족의 눈이 그녀에게 돌아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종복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수컷으로서.

    하지만 그녀의 짝으로 피시를 내정해 둔다면……. 허수아비일지라도 피시는 엄연한 직계이자 왕자다. 아무리 미쳤다는 소문이 돈다고 해도 그의 정통성을 무시할 순 없을 테고. 그는 선대 변경백의 아들이었고, 조이나의 피붙이다. 결코 맞설 수 없지. 패티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가 꾸물거리면 내가 대신할 거야.”

    “뭐?”

    “왜? 나는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해, 피시?”

    “…….”

    “네가 아니어도 나. 혹은 하트. 우리 둘 중 하나가 그녀의 마음에 들 수만 있다면 상관없잖아?”

    “패티스! 그렇게 엘을 네 마음대로……!”

    “멍청하긴.”

    혀를 쯧쯧 차며 제 형제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넌 아직도 이곳이 누님과 웃으며 살던 꽃밭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네 동심을 지켜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면 정신이 돌아올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지, 쯧. 패티스는 피시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네 머리가 꽃밭이라 천천히 얘기해 드리죠, 형님.”

    “…….”

    “세상에 암컷은 우리 폐하 한 분뿐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네가 알아?”

    “무슨……,”

    “곧 온갖 수컷이 폐하의 아래에 모여 허덕거릴 거란 의미라고요.”

    단순히 암컷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패티스가 말하는 건…….

    “최고의 권력이야.”

    “…….”

    “어떻게 보면 이런 세상이기에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이지.”

    “…….”

    “우습게도 이렇게 되고 나서야 암컷을 인정하는 꼴이라니. 하여간 한심한 놈들이야.”

    그리고 이런 식의 권력을 억지로 떠안게 된 그분껜…….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란 말인가. 암컷은 존재만으로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함에도, 이런 사태가 되어서야 이런 식의 이유로 권력을 쥐게 된 건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닐 터였다.

    어쨌든 이미 모든 종족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이종족은 이리저리 갈라지기 시작했고. 공공의 적이 없는 한, 다시 하나로 뭉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중엔 그녀를 힘으로 억압하거나 납치하려는 종족도 있겠지만, 이미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점하는 종족이 연합을 맺었다.

    “늑대를 비롯한 연합군이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함부로 나서는 건 어려울 테고.”

    “…….”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딱 하나야.”

    피시는 조금 전부터 패티스의 말을 들으며 멍한 표정으로 훈련 중인 이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택을 바라며 그녀의 발 아래서 기어 다니는 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