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아…….”
목에 손을 얹고 성대가 울리는지 확인했던 일라이저는 문득 성대만큼이나 제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끼니를 거른 지도 한참 됐지. 머리도 며칠째 지끈지끈 아팠다. 제대로 된 사고는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바닥을 디뎠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 저놈은 우리 편이야. 오헬을 데리고 도망치는 중이라고! 오헬은 안전하다니까?’
혼잡한 상황이라 자신이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앤디는 수어를 할 줄 몰랐고, 자신은 뿌연 시야 탓에 입술 모양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거짓이라고.
그럴 리 없잖아. 재규어가 왜 거기 있어? 왜, 왜, 왜 황녀 전하의 곁에 있는 건데…….
놈을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 그날, 집사의 품에 안겨 저택을 빠져나오며 어머니와 누나들이 죽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덜덜 떨며 집사의 목을 끌어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놈이 자신을 발견했을 때, 때마침 터진 화약으로 고막이 찢어져 귀에서 피가 흐르던 그때에. 놈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발길을 돌려 불타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왜 나를 살렸나. 차라리 나를 가족과 함께 죽여 버리지, 왜 나를 살렸나! 그깟 놈에게 동정이라도 샀단 말인가? 아아,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반복되는 악몽에서 빠져나오는 것조차 못 하는데, 난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삶의 의욕을 잃었다. 들리지 않는 귀로, 터지지 않는 입으로, 고된 일은 해 본 적 없는 귀족의 손으로. 일라이저는 이 무너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울다 지쳐 잠들면 그날의 악몽이 저를 쫓아왔고, 깨어나면 생지옥과 같은 현실이 자신을 기다렸다.
“으아아아!!”
죽여야 돼. 죽여야, 내가, 나도, 내가! 나도!
내가…….
나도…… 나도 살 것 같단 말이야.
“일라이저! 괜찮냐?! 왜 그래!”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친 앤디와 늑대들은 침대 아래 둥글게 몸을 말고 엎드린 채 울고 있는 일라이저를 발견했다. 앤디는 다른 우논들을 내보내고 일라이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야, 인마. 너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고 누워만 있으면 골병들어.”
“…….”
“……미안하다. 네 편을 들어 줄 수가 없다, 이건.”
고작 며칠 만에 인간에게 연민이라도 생긴 건가. 앤디는 자조하며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나도 동생을 잃었거든.”
“…….”
“복수를 하고 싶은데…… 참고 있어.”
뱀의 영지에서 리플이 도망가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주먹을 쥐고 억눌러 참았다. 사리 분별하지 못하고 달려들면, 결국 그때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 테니. 또 다른 주드와 이엘을 만드는 꼴이 될 테니까.
“지금은 참을 때야.”
네 행동이 르네 님의 눈에 띄면, 너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돼.
“내 말은 안 들리겠지만, 새겨 뒀으면 좋겠다.”
네가 이카르를 죽인다고 해도 네 가족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돼. 악의 고리는 내가 끊지 않으면 누구도 끊어 주지 않으니까.
결국 나 자신이 살기 위해 용서라는 단어를 이용하는 꼴이지만.
*
“지금 뭐라고 그랬나?”
“찾아 주겠다고.”
“농담하지 마. 너희가 어떻게……!”
“폐하를 위해 다른 종족들과 접선 중이다.”
“…….”
“개중에 하나는 있겠지.”
“…….”
“너희 종족을 본 놈들이.”
이카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종족을 찾는 건 포기했다. 그게 유일한 삶의 미련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삶의 푯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엘을 지키는 것. 이엘과 함께하는 것.
이엘과 생을 함께 마감하는 것.
“개수작 부리지 마.”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지 않나?”
“…….”
“단순한 선의야. 오해하진 마.”
패티스가 싱긋 웃으니, 그게 그렇게 교활하게 느껴질 수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이카르 때문에 패티스는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믿지 못하는군.”
“믿을 게 없어서 하이에나를 믿나?”
“폐하께서 너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선의를 베푼다는 뜻이다.”
“…….”
“이쪽도 아군이 많아지면 좋단 뜻이고.”
설마 너 혼자 폐하를 지키겠단 멍청한 소리를 하진 않겠지? 패티스의 신랄한 어조에 이카르는 미간을 구겼지만 반박하진 못했다. 그의 말이 옳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지. 할 수만 있다면 종족을 되찾는 게 좋다.
다만…….
“물론 종족이 모여 네가 왕이 되면, 지금처럼 폐하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짓은 꿈도 못 꾸겠지만.”
마땅한 영지가 주어질 테고, 많든 적든 이카르는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패티스의 말대로 지금처럼 자유롭게 그녀와 교류하는 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물론 선택은 네 몫이다. 동족을 찾아 번듯한 무리를 꾸려 제대로 된 방패막이 되든, 아니면 지금처럼 고작 폐하를 등에 태우고 도망치는 용도로 쓰이든. 네가 선택해라, 소백작.”
저게……. 이가 바득 갈렸지만 패티스의 도발에 넘어가진 않았다. 이카르는 심호흡을 하듯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래. 맞아. 며칠 전 전쟁에서 스라소니들과 맞닥뜨렸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아무리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고는 해도, 지금 같은 세계에선 종족의 개체수가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걸 자신이라고 모를 리가. 분하지만 놈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좋아. 네 선의를 받아들이지.”
“아. 선의기는 한데 조건이 하나 있어.”
“뭐?”
“별건 아니고. 일단 들어 봐.”
“…….”
“우리 형님과 폐하 사이를 방해하지 말아 줄래?”
저건 또 뭔 개소리야? 이카르가 미간을 구긴 채 패티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는 그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빙긋 웃어 줄 뿐이었다.
“물론 폐하께서 널 선택하신다면 말은 달라지지만.”
“야.”
“품위를 지키는 게 좋지 않나? 이래 봬도 나는 한 종족의 왕자고 직계야. 너 역시 사라진 종족의 유일한 후계자였잖아.”
“말하는 꼴은 네 쪽이 더 품위 없다는 건 알지?”
“그런 말 자주 듣지.”
기 빨리는 화법에 넌더리가 났다. 이카르는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걸 매우 싫어했다. 제 성질을 못 이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자, 패티스가 우아하게 차를 따르며 그를 잡아 세웠다.
“곧 다른 의미의 종족전쟁이 일어날 거다.”
“뭐?”
“폐하께선 유일한 암컷이야.”
“…….”
“어째서인지 직접 뱀들 앞에 나서시는 바람에 노출이 됐고, 대륙 전체에 폐하의 존재가 알려졌어.”
“…….”
“우리의 첫 번째 본능은 종족 번식이란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식욕, 성욕, 그 어떤 욕구도 첫 번째 본능을 이길 수 없다.
“네놈도 뱀들과 똑같군. 나타니엘에게서 새끼를 보고 싶단 소릴 하는 거냐?”
“저런. 어떻게 그런 새끼들과 동류 취급을 하나. 기분 더럽게.”
“…….”
“뱀들이 2차 전쟁에서 인간 여자를 죽여 버린 뒤로, 우리가 놈들과 완전히 갈라섰다는 건 모르나 본데.”
이성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하이에나 세 형제를 찾아온 것은 뱀이었다. 그들은 특유의 속살거림으로 어린 쌍둥이들을 홀렸고, 엉성하게 모인 하이에나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하이에나는 세잔티노를 정복한 뒤에 다른 종족과의 약속을 깨고 제도로 쳐들어와 인간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여자를 모조리 죽인 뱀들과는 전쟁이 끝난 후 원수가 되어 버렸다.
“내 앞에선 뱀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아, 재규어.”
“너희들의 정신머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를 바란 적도 없지.”
“…….”
“뭐, 네 말이 맞아. 우리의 정신머리는 너희랑 돌아가는 체계부터 달라.”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지도 모르겠다. 이카르는 그를 그대로 무시하고 나가려다가 긴 한숨 끝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 하고 싶은 말만 간단하게 해라.”
“모두가 폐하께 달려들 거다. 네 말대로 새끼를 갖기 위해.”
“…….”
“하지만 우린 아냐. 우린 폐하 그 자체만 있으면 돼. 종족 번식도 억누를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억제할 테니까.”
그러니까 요컨대 너희는 그런 흙탕물 싸움에 끼지 않겠다? 이카르의 말에 패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형님은 예외야.”
“뭐?”
“너도 봤지만 피시, 내 형은 반쯤 미쳤어.”
“…….”
“그 형이 목숨을 걸 정도로 폐하께 집착하고 있지.”
“그래서.”
“나는 폐하께서 형님을 부군으로 들이시길 원한다는 걸 말하는 중이야.”
기가 막히는군. 그놈이 반쯤 미친 걸 알면서 나타니엘의 곁에 두려고 해? 이카르는 미쳐 버린 종족이라 치부하며 혀를 찼다.
“역시 너희랑은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서 말했잖아.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고.”
“야.”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
“만일 폐하께서 형님이 아닌 너를 택하신다면, 그럼 우리 쪽이야말로 깨끗이 물러나겠어.”
“겉으로는 그녀를 왕으로 추대해 극진히 섬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런 계략을 짜고 있었군? 너희 영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이에나와 지독하게 얽혀 있도록.”
“서로 수지가 맞을 뿐이지.”
어지간히 미친놈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동족을 찾아 무리를 만들어 제대로 된 방패가 되어야 한다. 그 옛날 황실의 방패막이 되었던 것처럼. 게다가 패티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의 의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놈의 말대로 이엘이 피시를 선택한다고 해도 자신이 말릴 권리는 없었다.
부군. 부군이라……. 그렇군. 그녀가 황위에 오르면 부군도 필요하겠지. 그게 아니어도 언젠가 이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자신은 보호자로서 그녀를 지지하고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갑자기 입맛이 떫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입 안을 부드럽게 감돌았던 차향이, 어쩐지 떫고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거래는 성립된 걸로 알겠다. 조만간 희소식을 전해 줄 테니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이카르는 갑자기 밀려드는 답답함에 짜증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