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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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를 뵙습니다.”
“일단 다들 앉아요.”
그녀의 말에 우논들은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뱀들이 사욕을 갖고 제게 온순히 굴었다면, 이쪽은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으로 굴종했다. 콧대 높은 하이에나가 인간인 자신에게 이렇게나 순종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늑대의 영지에서 제게 덤볐던 후작조차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지난날, 미천하여 왕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폐하께 고합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르군요.’
‘물론입니다, 폐하. 아둔하였던 제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말투는 거칠었으나 웃음은 흔흔했다. 속내를 감추는 뱀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오히려 제 속을 다 내비칠 것처럼 굴었다.
“폐하. 몇 가지 안건을 가져왔습니다.”
“주세요.”
패티스가 공손히 서류 뭉텅이를 건넸다. 이엘은 하나하나 넘겨 보다가 중간쯤에서 손을 멈췄다. 눈치 빠른 패티스는 웃으며 그녀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먼저 아뢰었다.
“제도를 이곳으로 삼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곳?”
“예. 천혜의 요새이지요. 이전의 제도처럼 쉬이 불타진 않을 겁니다.”
침략 또한 없을 테고요. 차려입은 옷만큼이나 정갈하게 대답한 패티스의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이 땅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입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지요.”
“바다와 인접한 연안부는 바다의 위협이 너무 커요. 이로 인한 재해도 만만치 않고요.”
“기존의 제도였던 내륙 쪽은 개간했던 곳까지 상당 부분 황량해져, 이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해요.”
그녀의 대답에 패티스가 웃음을 흘렸다.
“폐하. 이곳은 바다가 맞닿아 있기에 아무나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저희는 폐하의 안전이 우선이에요.”
“제도는 접근성이 좋아야 해요. 패티스,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이곳은 도리어 고립될 뿐이군요.”
“접근성이 좋기에 망한 제국도 있습니다.”
“…….”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실언이라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제 무례를 사죄한다. 이엘은 조금의 동요 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패티스.”
“예, 폐하.”
“당신은 나를 시험하나요?”
“어찌 그런……. 폐하, 제가 감히 폐하를 시험하겠습니까? 저는 비천한 수컷입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죠. 그것도 망한 제국의 황족.”
“…….”
“나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에게 수지가 맞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담담한 그녀의 말에 하이에나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패티스는 반박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꾸지람을 받는 게 싫어,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를 대신해 이엘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하트가 조용히 대꾸했다.
“결국 너는 우리와 함께할 마음이 없는 거네.”
“왕자님! 폐하께 말씀을……!”
“폐하? 누가 왕이라는 건가.”
“…….”
“우리에겐 조이나만 왕일 뿐이다.”
“…….”
“인간은 믿을 필요가 없는 족속이고.”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명백히 싸늘한 어조였다. 말수가 적다 못해 없는 지경인 그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표출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트는 이엘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덕분에 찾아온 정적으로 패티스가 대신 나서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첫 안건부터 막혔군요. 시간을 천천히 갖는 게 좋겠습니다.”
“…….”
“어차피 폐하께선 저희와 계속 함께하실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빙긋 웃자, 우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흐지부지 회의가 끝나 버렸다. 고요히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귀족들은 절하며 자리를 떠났다. 쫓아낸 것과 다름없는 패티스의 태도에도 이엘은 책망하지 않았다. 쪼르르. 차를 따르는 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형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저와 피시의 의견을 따를 테니까요.”
“패티스.”
“예.”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나요?”
“난해한 질문이군요. 아둔한 저로서는 현명한 답을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괜한 신경전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어요.”
고개만 패티스가 있는 쪽으로 돌린 이엘이 그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내가 있어야, 당신의 종족이 사는 건가요?”
“…….”
“내가 왕으로 존재해야, 하이에나는 제 몫을 하는 겁니까?”
열린 창문 새로 불어온 바람에 이엘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동시에 길게 늘어뜨려 묶은 그의 머리카락도 같은 방향으로 흩날린다.
“예, 폐하.”
“…….”
“당신께서 존재하셔야 저희가 삽니다.”
“…….”
“그리고 제가 살죠.”
빙긋 웃는 미소에 일순 소름이 끼쳤다. 패티스는 표정 변화 없이, 일관된 낯으로 다시금 공손히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제국이 존재하던 시절부터 공국처럼 따로 존재하던 종족입니다.”
대륙의 끝은 언제나 바다와 닿아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땅끝은 버려지거나 비워졌다. 그러나 이곳만은 달랐다. 마치 신의 축복을 직접 받은 것처럼 비옥한 토지와 소산물이 넘쳐 났고, 갖가지 자원이 넘치도록 풍부한 땅이었다. 인간은 이곳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살 자신도 없었다.
하여 이종족을 보냈다. 가장 강하고 방어력이 좋으며, 머리는 뛰어나지만 권력엔 욕심이 없는 종족.
“제국에 속하여 황제의 명령을 받기는 하나, 이곳은 영주가 왕이 되는 곳. 철저히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곳이었지요.”
“…….”
“그러니 저희에게 왕의 부재란, 고작 20여 년의 세월이 사라진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곳. 황제의 말보다 변경백의 말이 더 절대적인 곳이 이곳이었다. 그들의 영주가 반역을 일으키자고 하면 곧장 따를 기세로. 단순히 동족의 리더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영주이기 때문에.
그러나 선대 변경백들은 황실의 명령에 조금의 반발 없이 따랐다. 심지어 세잔티노에서 이루어지는 수탈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들이 약해서? 전혀. 그녀들은 강하고 호전적이다. 영지를 침범하는 미지의 생물을 깔끔하게 도륙하여 바다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정도로.
“우리의 무조건적인 순종에, 선대 변경백들께선 평화로 답하셨습니다.”
“…….”
“황실에 반하지 않는 것. 그건 이곳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평화를 확고히 하는 것과도 같은 말이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 종족애가 남다른 종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폐하.”
왕이 있어야 한다. 허울뿐인 자리라 할지라도, 누구든 그 자리에 앉혀야 한다. 그래야 종족이 뭉치고 강해진다. 와해되어 힘을 잃고 멍청하게 살아가던 것들을 한데 모으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왕이 없어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다.
꼭 하이에나가 왕이 되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암컷이면 된다. 그저 여자면 돼. 그녀가 약하든 강하든 개의치 않아. 군림하여 우리를 지도할 군주가 되어 주기만 한다면, 설령 인간 여자라도 기꺼이 받들어 모시겠다.
이대로라면 재규어처럼 멸족할지 몰라. 단독 생활을 하는 재규어조차 저렇게 비참하게 무너졌는데, 하물며 무리 생활을 하는 자신들은? 절대 오래 살 수 없다. 끝끝내 죽어 버리겠지. 이 세계에서 영영 지워지겠지.
“저희만의 왕이 되어 달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원치도 않으실 듯하고요.”
“그게 제가 말한 수지에 맞는 거래인가요?”
“아닙니다. 저희 쪽이 얻는 이득만 많은 거래이지요.”
“…….”
“그러니 저희는 폐하의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패티스는 창가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커튼이 하나둘 빛을 가릴수록 회의실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빛은 늑대와 함께.”
“…….”
“그림자는 하이에나가.”
그는 놀라울 정도로 영민하다. 자신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 숨겨진 뜻까지 간파했다.
“언젠가 빛을 버리셔야 할 날이 올 테니까요.”
“그걸, 하이에나가 하겠다?”
“어떤 더럽고 추악한 짓이라도.”
“…….”
“저희는 왕을 위해 존재할 뿐인, 비천한 수컷이니까요.”
새끼를 낳는 것도 암컷. 키우는 것도 암컷. 무리를 이끄는 것도 암컷. 가장 강한 것 또한 암컷. 수컷은 무엇 하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완벽한 모계사회. 그러니 암컷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 존재의 의미가 온전히 암컷으로부터 나오는 사회니까.
“저를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그대의 웃는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으니까.”
아, 드디어……! 제게 하대하는 모습에 패티스의 눈동자에 희열이 감돌았다.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감히 손을 청했다.
“폐하. 원하신다면 제 속마음을 낱낱이 토하겠습니다. 의심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불신은 무리를 와해시키지요. 부디 당신의 자애를 베푸사, 조금의 의심도 품지 마시길.”
이엘이 그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얹었다. 패티스는 겸허히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묻었다가 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아― 비로소 나에게 왕이 생겼도다……. 그는 이 손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