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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02화 (202/488)
  • 202화

    “노아 님, 저희는…….”

    “유클리드는 제 수하의 목숨을 먼지만도 못하게 생각하나 보군.”

    “…….”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로빈에게 밟힌 지 얼마나 됐다고.”

    제 왕의 이름이 거론되자 스라소니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 썰렁해진 분위기를 읽고 입을 다물었다. 부, 분위기가 왜 이러지……? 고작 인간 여자일 뿐이잖아……?

    ……아뿔싸. 입을 잘못 놀렸구나. 기겁하며 바닥에 납죽 엎드린 우논 하나가 사죄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엎드린 우논을 제외한 모든 스라소니들의 목이 뎅강 잘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유클리드에게 가서 전해.”

    “…….”

    “그녀는 네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분이라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스라소니는 다리를 절며 도망치다시피 뛰쳐나갔다. 앤디는 피 묻은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클리드 님께서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 위험한 신호 아닙니까?”

    “아니. 그냥 간본 거다. 정말 관심이 있었다면 직접 왔겠지.”

    스라소니의 왕은 무리를 이끈 지 꽤 오래된 연륜이 있는 남자였지만, 하는 짓은 생긴 것처럼 철없고 제멋대로였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추악한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부류. 그런 유클리드가 직접 오지 않고 제 수하를 보냈다는 건 크게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간만 보는 거겠지.

    게다가 스라소니는 계획에 필요치 않다. 노아는 이엘이 꿈에 연연하는 걸 싫어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꿈에서 스라소니는 딱히 아군도 적군도 아니었다고 하니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이대로 놈이 이엘에게 관심을 끊어 주면 좋겠는데.

    “줄줄이 방문 요청서가 쏟아집니다, 폐하.”

    안드로가 서신이 그득하게 쌓인 박스를 내밀자 노아의 이마가 보기 좋게 갈라졌다. 젠장. 내가 지금 이런 것들 응대나 하고 있어야겠냐고. 그의 신경질적인 말투에도 안드로는 묵묵히 서신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이엘은 늑대의 영지에 머무는 것으로 처리해 놨다. 하이에나의 영지에 있다고 알려져도 어떤 미친 종족이 그곳으로 가겠느냐마는, 노아는 그런 것에조차 조금의 허점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덕분에 늑대의 영지엔 방문을 가장한 염탐 요청서가 쏟아지던 중이었다.

    모든 게 이엘이 짜 놓은 대로 흘러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만족해야 할 텐데도, 냄새를 맡고 쏟아지는 이종족들의 행보에 노아는 짜증만 솟구치고 있었다.

    “역시 미루길 잘했군요.”

    “패티스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수작이나 부리지 않으면 다행이야.”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거기가 제일 안전하니까.”

    뭐, 위험하면 밀로 놈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고. 그래. 이곳으로 데려오는 건 조금 시간을 두는 게 낫다. 게다가 여긴 일라이저 일도 꼬여 버려서, 이엘이 와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역시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군.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

    “용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래서 싫어?”

    “아니라니까.”

    이엘의 대답에 용은 그제야 안도한 듯 웃었다. 벌써 저 멀리 해가 어슴푸레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희붐히 쏟아지는 빛을 뒤로하고 밀로는 다시 구름을 끌어모아 몸을 숨겼다.

    “벌써 돌아가는 거야?”

    “하이에나가 눈치채면 귀찮아진대.”

    “그럼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되잖아.”

    “돌아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려. 그리고 내 역할은 하늘 위에서 지켜보는 거라서 안 돼.”

    어쩐지 의젓한 대답을 하는 밀로가 낯설었다. 이엘은 그를 더 붙잡지 못하고 아쉽게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밀로라고 하늘 위에 있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분방한 자신의 성격까지 눌러 가며 하늘에서 이엘을 지켜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비단 영지 경계를 어슬렁거리는 타 종족의 침입 위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내려올 놈들이 위에도 있으니까.

    밀로는 그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남몰래 집어삼켰다. 연이어 터진 사건 때문에 제 종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여건이 안 됐다. 타이곤의 갈기. 그걸 구하는 게 꽤 어렵다는 건 놈들도 알고 있으니 성급하게 내려오진 않겠지만.

    그러나 용이란 놈들은 동족인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는 종족이다. 믿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심심해지면 흥밋거리를 찾아 언제든 내려올 것 같아 밀로는 불안했다. 그러나 불안함을 애써 누르고 태연하게 인사했다.

    “걱정 마. 하늘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알겠어. 조심해, 미르.”

    용인 제 모습을 보고도 그녀는 걱정을 놓질 못했다. 여전히 동생을 보듯 자신을 살피는 이엘의 태도에 밀로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밝아 오는 햇빛을 더 밝혀 주기 위해 모든 구름을 다 걷어 내 주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태양의 첫 빛이 이엘에게만 온전히 쏟아져 내렸다.

    좋은 아침이야, 나의 엘. 밀로는 그렇게 속삭이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엘은 밀로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인간들 사이에서 용은 상상 속의 종족으로 여겨졌다. 이엘은 어릴 때 그림책에서 봤던 용을 떠올리며, 조금 전의 밀로와 비교해 보았다. 언제나 그림책 속의 용은 불을 뿜으며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당 역할이었는데. 막상 직접 본 밀로의 본체는 괴랄하다기보다는 신비로운 쪽에 더 가까웠다. 포악한 성격도 아니었고.

    “오히려 좀…… 허술한 편이지, 미르는.”

    처음 만나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배를 곯고 바닥에 나뒹굴며 구걸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기억을 잃고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기에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귀족 자제인가 싶었는데. 이종족이라니, 그것도 용이라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내심 안도했다. 이종족이라면, 적어도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까. 이전에 암시장에서도 봤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밀로처럼 덩치가 큰 인간을 둔으로 생각해 사냥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엘에게 밀로는 무식하게 힘만 센 바보였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떨어질 때면 걱정이 늘 앞섰는데. 차라리 이종족인 게 더 안심이다.

    “그러면 전에 고향에 다녀온다는 건…… 어딜 다녀온 거지? 설마 동족에게…….”

    “나타니엘.”

    “깜짝이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이엘은 제 근처로 다가온 재규어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랐잖아요! 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이엘의 반응에 이카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직도 적응을 못 했나? 놀리는 그의 말투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재규어는 장난치듯 긴 꼬리로 그녀의 발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밤샜어?”

    “잠을 못 잤어요.”

    “셋째 왕자 때문에?”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코가 빨개.”

    그의 말을 들으니 좀 추운 것도 같다. 코를 훌쩍이며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카르가 두툼한 모포를 이엘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감기 걸린 거 아냐?”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약 먹어. 넌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

    “제가 말한 적 있어요?”

    아니면 이카르의 앞에서 자주 앓았나? 하긴. 뱀의 성은 공기도 탁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체중이 쭉쭉 줄어서 비실비실하게 걸어 다녔던 것 같기는 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엘과는 다르게 이카르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르겠다.”

    “네?”

    “널 지키려고 했던 일인데, 정작 너는 그걸 원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말만 하던 이카르가 모포를 단단하게 여며 주며 제 품에 이엘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 안에서 이엘은 눈만 끔뻑거리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위로 올렸다.

    “이카르. 숨 막혀요.”

    “다시 늑대에게로 돌아갈 건가?”

    말을 돌리는 그의 물음에 이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그게 해결이 안 됐네. 아무 대답 없는 이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카르가 제 품에서 그녀를 조금 떨어뜨렸다.

    “셋째 왕자가 네게 집착하는 것 때문에 그래? 미쳤다는 소문이 진짜였군.”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피시는 그냥 아픈 거예요.”

    “그래.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아픈 거지.”

    “맞아요. 치료가 필요하죠…….”

    폐하께서 치료하고 계시잖습니까? 패티스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피시의 곁에 있으면 증세가 완화된다고 말했지만, 이엘은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은 오히려 그의 삶을 악화시키고 있다.

    나는 인간이니 영원히 피시의 곁에 있어 줄 수 없는걸. 수명을 차치하고도, 자신에게 목숨이 보장된 삶이란 없다.

    “이 방이 그 여자의 방이라고?”

    “네.”

    품에서 이엘을 놓아 준 이카르는 경탄에 찬 표정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조이나가 쓰던 방이며 대대로 왕이 쓰던 침실이라고 했다. 한사코 거절하는 그녀의 말에도 패티스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이 방을 그녀에게 주었다.

    “네쌍둥이 이야기는 유명했지. 숨어 살던 나도 알 정도로.”

    “그래서 미안해요.”

    “…….”

    “피시를 그렇게 만든 건 제 아버지니까.”

    “네 아비는 너도 그렇게 만들었어.”

    “…….”

    “네가 떠안을 필요 없다.”

    이카르는 단호하게 일축하며 흐트러진 이엘의 머리카락을 걷어 주었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니까.”

    “이카르.”

    “나조차 누굴 원망할 자격이 없거든.”

    내 손에 묻힌 피로 누군가는 울었을 테니까. 지금도 울고 있을지 모르고.

    “그러니까 셋째 왕자의 일에 자꾸 너를 엮지 마. 네가 자책할 필요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쉽지 않아요.”

    “네가 중요히 생각해야 할 건 네 자신뿐이야.”

    “…….”

    “그 왕자의 집착이 널 옥죄고 얽맬수록 고통받는 건 너라고.”

    눈앞에서 하마터면 그를 잃을 뻔했다. 피시가 머뭇거림 없이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심장이 지금도 조마조마했다.

    “나타니엘. 비뚤어진 애정을 곧이곧대로 받아 줄 필요 없어.”

    “…….”

    “네 책임이 아니라고.”

    문득 이엘은 자신의 자해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던 이카르를 떠올렸다. 그가 왜 그렇게 슬퍼하고 괴로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들었겠지. 괜한 미안함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자, 이카르가 소리 없이 웃었다.

    “간지러워.”

    그가 웃을 때마다 길게 난 흉터가 일렁이듯 움직인다. 그녀의 손이 조금 내려와 그의 상처를 매만졌다.

    “이건 언제 생긴 거예요?”

    “도망치다가.”

    “…….”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증거니까 싫지 않아.”

    “저도 여기 있어요.”

    이엘은 제 목에 남은 자상의 흔적을 가리켰다. 이카르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째 네 상처가 더 아픈 것 같다.”

    “그리고 여기도.”

    옷으로 가려졌지만 가장 흉측한 상처는 제 가슴과 배에 새겨져 있다. 그거야말로 정말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증거였다. 동시에 르네에게는 후회와 자책을 안겨 주는 증거였고.

    “저도 싫지 않아요.”

    “…….”

    “살았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불안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도 언제든 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까 봐. 그런 짓을 하고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라서. 그러니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만으로도 이카르는 감사했다.

    “신께선 날 버리지 않으셨어.”

    “신은 모두를 사랑하시니까요.”

    “아니. 그동안은 사실 잘 몰랐어. 우린 분명 버려진 종족이니까.”

    “…….”

    “하지만 네가 내게 왔고, 내가 네게 머무를 수 있는 지금이라면.”

    뜨거운 입술이 이마 위에 길게 머물렀다. 단순한 친애라기엔 감정이 깊었고, 애욕이라기엔 욕심이 없었다. 다만 이카르는 갈등하던 길에서 진로를 확정한 듯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어.”

    “…….”

    “네가 나를 믿게 만들었어.”

    영원히. 정말 영원히 너와 살고 싶어. 네 행복을 내가 다 물어다 주고 싶어. 할 수 있다면, 다른 놈들의 행복을 모두 낚아채서 네 앞에 갖다 바치고 싶을 정도로.

    “저도 당신을 만나서 행복해요. 신께 감사하고요.”

    그렇게 해서 웃는 네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이카르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쏟아지는 햇빛보다 네 웃음에 눈이 멀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아마도 나는 하이에나의 셋째 왕자보다 더 미친놈인 게 분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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