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끝내 맑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까지 했다. 버리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피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피시를 데리고 늑대의 영지로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언제까지고 피시의 보호자를 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고.
“그런 게 아니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약속해, 정말 떠나거나 버리는 게 아니야.”
“…….”
“피시. 나 좀 봐.”
이엘은 토닥거리던 손을 멈추고 그의 하얀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시선을 마주쳤다. 눈물범벅이 된 채 입술을 파르르 떨던 피시가 울먹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시. 너는 하이에나의 왕자야.”
“…….”
“네 종족은 왕만 필요한 게 아니야. 네가 필요해.”
“나, 나는…….”
“잘했잖아. 잘해 왔잖아. 나하고 약속한 대로, 너는 줄곧 여기서 잘해 왔어.”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넌 할 수 있어, 피시. 그녀의 목소리에 피시가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못해. 나는 못해…….”
“…….”
“나도 데려가. 여길 떠날 거면 차라리 나도 데려가 줘. 응? 제발…… 제발.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려면 허락이 필요하고 절차도 복잡해.”
“싫어. 나는, 무섭단 말이야. 엘이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우선 진정해, 피시. 성으로 돌아가자. 가서 다시 이야기해. 응?”
그녀는 이미 마음을 먹었다. 결국 여긴 그녀의 영지가 아니었던 거야. 아무리 우리가 왕으로 추대하고 섬겨도, 결국 엘은 늑대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야. 나는 또 버려질 거야. 아니, 이미 버려졌어. 나 같은 건 그녀 마음에 차지 않는 어린애밖에 안 되는 거야…….
피시는 절망했다. 그토록 갈망하여 성장을 했는데도 왜 나는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 걸까? 우리는 약하고 순한 수컷일수록 암컷의 눈에 띄는데, 혹시 내가 성장을 했기에 엘이 싫어하는 걸까? 내 힘이 점점 강해지니까? 그렇다면 그 늑대 왕은? 그는 완전한 수컷이었는데, 왜…….
싫어. 버려지는 건 이제 싫어.
“피시. 울지 마. 응?”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
“정말…… 정말 죽을지도 몰라…….”
서럽게 울던 피시는 잔디밭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하이에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절벽 끝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피시의 돌발 행동에 이엘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피시! 뭐, 뭐 하는 거야! 돌아와!!”
……안 돼. 그의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간과했다. 이엘이 그의 뒤를 따라 미친 듯이 쫓아갔지만 하이에나의 속도를 인간이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계속해서 거리가 벌어져, 마침내 피시는 절벽 끝에 다다른 상태였다.
“피시! 안 돼!! 돌아와! 안 돼, 제발!”
돌 부스러기가 발끝에서 공중으로 흐트러졌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그대로 떨어져 바다에 처박히겠지. 죽으면…… 엘을 다신 볼 수 없을 텐데. 그의 머뭇거림이 이엘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다. 빠르게 달려온 이엘은 피시를 끌어안듯 뒤로 당겼다.
“안 돼, 피시! 뭐 하는 거야!”
“…….”
“피시. 진정해. 일단 내 말 좀 들어, 응?”
“무서워.”
“…….”
“네가 없는 세상은 정말…… 무서워, 엘. 나, 나 어떡해? 나 이제 정말 어떡해……?”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잃는 아픔은 조이나로 족하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공포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이 죽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패, 패티의 말처럼 미쳤나 봐. 내가, 내가 정말 미쳐 가나 봐…… 나 어떡해? 나는 무서워…….”
“괜찮아. 그냥 마음이 아픈 거야. 미친 게 아니야, 피시.”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불안에 떠는 피시를 달래 겨우 성으로 돌아왔다. 그를 패티스에게 인계하면서도 이엘은 피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리어 자신에게 불안이 옮겨진 것처럼 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걱정됐다.
*
밤이 늦도록 이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램프에 불을 밝히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았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많이 약하신 것뿐입니다.’
‘치료를……,’
‘폐하께서 치료하고 계시잖습니까?’
‘…….’
‘폐하께서 계시면 증세가 많이 완화되니까요.’
패티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완화는커녕 악화가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도 그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저게 완화된 겁니다. 전에는 더 심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내게 의지할 수는 없어요.’
‘왜입니까?’
‘왜라니……,’
‘폐하께선 황위에 오르시기로 하셨잖습니까. 피시는 폐하의 백성이니, 폐하께서 곁에 계셔 주시면 됩니다.’
‘…….’
‘그게 아니면 단지 인간만을 위한 황제가 되시려는 건가요?’
눈웃음을 치며 교활하게 웃는 얼굴에서 언뜻 뱀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엘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자신의 무례함을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실례했습니다. 불충한 저의 실언을, 자비로이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요. 쓸데없는 신경전은 그만하죠.’
‘예, 폐하. 자비를 베푸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손한 인사를 보면 거짓은 아닌 모습이었다. 패티스는 빙긋 웃으며 자신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이엘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형님을 버리지만 않으시면, 형님께서 악화될 일은 없을 거라는 의미였습니다.’
‘버리다니. 피시 앞에서 그런 용어를 쓰지 마세요.’
‘시정하겠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피시의 곁에 머물 수 없습니다. 당신 말대로 황위에 오르기 위한 포석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없어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
‘폐하께서 필요하신 것들을 저희가 지원하고 마련하겠습니다.’
그의 눈은 언제나처럼 진실됐다. 비록 속내를 좀체 알 수 없는 남자였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
‘늑대도 하는 것을 저희가 못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패티스. 당신도 내가 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폐하, 저희는 감히 폐하의 길을 막을 수 없답니다.’
그렇게 태어난걸요. 호를 그리며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수려한 얼굴과 잘 어울렸다. 가만히 패티스의 얼굴을 쳐다보던 이엘은 짧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고민 좀 할게요.’
‘예, 폐하.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이엘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었다. 정을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건 이젠 허울뿐인 다짐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피시는 불우한 제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트라우마에 잠식된 모습을 볼 때마다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면 당분간…….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피시를 데리고 가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이곳에 조금 더 머무는 편이 좋을까. 혼자 갈등을 빚고 있을 무렵이었다.
― 오헬. 오헬, 자?
머릿속을 파고든 건 스완의 생각이었다. 때마침 깨 있었다는 그녀의 대꾸에 스완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쏟아부었다.
― 이쪽에 문제가 생겼어. 데리러 가는 건 시일이 걸릴 것 같아.
깜짝 놀란 그녀를 진정시키며 스완은 대충의 상황만을 전해 주었다.
―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늑대의 왕에게 일이 생겨서. 위험한 일은 아니야. 다른 종족이 협상을 청했대. 네가 여기 있으면 위험할지도 몰라서, 당분간은 거기 머무는 게 좋다고 하더라.
스완은 어물거리며 서둘러 연락을 끊어 버렸다. 정말 그게 전부라면 다행이겠지만……. 이유 모를 불안함에 이엘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탁자에 올려 두었던 로브를 걸쳐 입고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하얗게 쏟아지는 달빛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고정됐다.
“……미르?”
커다란 구름 사이로 꾸물거리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그녀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왔던 것처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구름 속에 숨었다.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이엘은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뛰쳐나왔다.
“미르!”
“…….”
“미르, 너 맞지?”
괴이한 형상을 한 물체가 구름 속에서 얼굴만을 드러냈다.
“미르. 너…….”
“나의 엘.”
마치 벼락을 동반하는 듯한 울림이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에 이엘이 흠칫 놀라자, 용은 다시 제 얼굴을 구름 안으로 숨겼다. 이엘은 발코니 난간을 붙잡으며 밀로가 도망치지 못하게 소리를 질렀다.
“미르! 가지 마!”
“…….”
“괜찮아. 말했잖아, 나는 네가 인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괴상한 형체였다. 그러나 이엘은 개의치 않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가까이 와, 응?”
어서. 응? 그녀의 다정한 채근에 용은 다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은은한 푸른색 눈동자를 보니 이제야 밀로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날 보러 온 거야?”
“응.”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잖아.”
“난 항상 여기 있었어.”
“…….”
“네가 독수리의 영지에 있을 때도, 인간들과 있을 때도, 뱀의 영지에 있을 때도.”
독수리의 영지로 가려는 자신에게 제대로 된 배웅 인사도 해 주지 않아 서운했었는데…….
“나는 늘 너만 보고 있었어, 나의 엘.”
“…….”
“물론, 그래도 보고 싶었던 건 똑같지만.”
용이 웃자 하늘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개구진 웃음이 오랜만이라, 이엘은 바보처럼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
“전쟁을 하자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늑대의 왕은 싸늘하게 일갈하며 턱을 괴고 저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속으로 뜨끔한 스라소니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여자를 달라고?”
“왕이시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자는 말씀을 드린 것이랍니다.”
“저거 완전 또라이들 아냐? 진짜 뒤지고 싶나 본데.”
헙!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게 너무 황당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안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앤디는 제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안드로마저 제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라소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