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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200화 (200/488)

200화

루시우스와의 짧고 굵었던 우정에 대한 호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게다가 이 일을 이엘은 모를 텐데, 그녀가 알게 되면 후에 찾아올 파장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엘에겐 이카르와 일라이저 모두 좋은 존재로 남아 있는 지금이, 그와 결별하기 가장 좋은 적기라고 판단했다.

“또 할 말 있나?”

“네? 아, 그게…….”

“뭔데, 또.”

“음, 아닙니다. 그게 전부예요.”

앤디가 머쓱하게 웃으며 목을 긁적였다.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안 그래도 복잡하실 텐데.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앤디는 며칠 전에 있었던 전쟁을 떠올렸다. 그는 일라이저를 성 밖에 피신시켜 놓고 기사단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뱀의 영지로 들어갔다. 이엘이 폭파시킨 왕성은 반 이상이 날아가 형체를 알아보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담이 큰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여길 날려 버릴 줄이야. 내심 감탄하고 있던 차였다.

혹시 모를 위험성을 위해 곳곳을 살피던 그의 눈앞에 별안간 독수리가 나타나 허공을 푹 찍고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뱀의 은신이 천천히 벗겨져 모습이 드러났다. 혀를 차며 공간을 벗어나려는 앤디의 눈길이 뱀의 사체에 닿았다.

정확히는 뱀이 들고 있던 종잇조각에.

‘뭐야. 아직도 남아 있었어?’

불에 그을려 조각만 남은 종이 뭉텅이를 놈의 꼬리에서 빼냈다. 중요한 자료는 아닌 듯했고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들만 닥치는 대로 챙긴 것 같은데……. 이엘은 뱀의 성에 남은 자료는 되도록 다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앤디는 그걸 태울 생각으로 허리를 숙였는데.

‘어……?’

「늑대의 기름.」

‘우리 기름이 왜……. 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앤디는 흐트러진 종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푸른 종이를 집어 들었다.

「늑대의 기름, 타이곤의 갈기, ……의 눈알은 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마땅한…… 위험한…… 이기에 이는 극소수의…….」

알아볼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제국은 워낙 방대한 실험을 했고,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연구도 수두룩했다. 이종족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건 공공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늑대나 타이곤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앤디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가 갖고 갔어? 주드의 기름.’

제 질문에 아연한 낯이던 이엘이 떠올랐다. 충격과 자책감이 어려 있던 얼굴이, 설마 이것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차라리…… 그래, 차라리 장례 용도로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편이 앤디에겐 위로가 된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장례 용도로 주드의 기름을…….

아니. 그럴 애가 아니다. 장례 용도가 얼마나 끔찍한 악습인 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설령 그만큼 소중한 이가 있다고 해도, 자신이 아는 이엘은 그깟 장례 때문에 소중한 주드의 기름을 빼 갔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애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을 갖고 있지도 않아. 모두 죽었잖아. 그 애 곁에 남은 사람 중 소중한 이는 오드밖에 없을 텐데…….

앤디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한 오드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저를 빤히 쳐다보는 노아를 향해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다녀오십시오.”

명치 쪽이 갑갑해져 숨이 벅찼다.

*

“피시? 거기서 뭐 해?”

“들어가도 돼?”

“물론. 들어와.”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며 이엘이 피시를 향해 웃어 주었다. 열린 문을 붙잡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피시는 그녀의 허락에 쪼르르 달려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들어오지. 아니면 노크라도 하든지.”

“방해하기 싫었어.”

순둥순둥한 눈동자를 데록 굴리며 피시가 말갛게 웃었다. 그 순수한 웃음을 보고 있으니 마치 웃음이 전이라도 된 양 이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방해라니. 오히려 내가 객식구인걸.”

“엘은 객식구가 아냐. 나의 왕이야.”

“글쎄. 지금은 그런 대우가……,”

“엘은 나를 사랑해?”

“뭐?”

물을 마시던 이엘은 입 밖으로 뿜을 뻔한 것을 삼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뜸 그런 걸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사랑받을 수 있어?”

“피시.”

“나는…… 나는 엘이 좋아…….”

기어들어 갈 것처럼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귓불이 잔뜩 붉어진 채로 아랫입술을 꾹 깨문 피시는 용기를 내 이엘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폐하가 좋아.”

“…….”

“그래서 폐하가, 엘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호감의 정도를 따지자면 피시는 높은 수치에 든다. 다만 그가 바라는 감정이 아닌 게 문제였다.

“인간에게 사랑받는 법은 모르겠어.”

안 그래도 늘 피시만 보면 안쓰러웠는데, 오늘따라 그의 말이 그를 더 가엾게 만들었다. 어느새 피시는 이엘의 손끝을 조심스레 움켜쥐며 잘게 떨고 있었다.

“인간은 우리가…… 냄새나고, 무식하다고 싫어했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피시.”

“응. 맞아. 근데 나를 사랑해 준 인간은 없었어. 심지어 나는 동족에게도 멸시를 받았는걸. 엘, 나는…… 나는 언제나 약체였어. 그래서 조이가 지켜 주지 않으면 나는 늘 괴롭힘을 당했어.”

“…….”

“나는 무서워. 아침에 눈을 뜨면 엘이 날 버릴까 봐, 날 버리고 떠날까 봐 그게 무서워.”

여전히 소년처럼 여린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잔뜩 젖어 간다. 이엘은 피시에게 잡힌 제 손을 내려보다가, 그 손을 마주 잡아 주며 웃었다.

“약속해. 네게 말하지 않고 떠나진 않을게.”

“그 얘기는…… 언젠가 날 떠난다는 거야? 응? 날 버릴 거야?”

“버리다니. 그런 거 아니야. 우린 동맹이야.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어.”

“동맹 아니야.”

“…….”

“우린 같은 종족이야. 나는 네 백성이고, 너는 내 왕이야. 그렇게 선 긋지 마. 싫어. 나는…… 나는 폐하가 사라지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패티스의 간계로 피시는 한껏 약해진 상태였다. 불안 증세를 보이며 다리까지 덜덜 떠는 피시의 모습에 이엘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피시. 잠깐 이리로 올래?”

“응. 응…….”

마치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이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체취를 맡으며 피시는 달달 떨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헤어지기 싫다. 또 헤어지기 싫어……. 영원히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 엘. 엘. 폐하. 엘. 날 버리지 마. 나는 네가 죽을 만큼 좋아. 네가 날 떠나면 죽어 버릴지도 몰라.

가지 마. 응? 가지 마…….

피시의 웅얼거림은 이엘의 품 안에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

“더 가까이 가고 싶어.”

“그건 위험해서 안 돼.”

하이에나가 이엘의 옷 끝을 물고 뒤로 당겼다. 이엘은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눈가를 찌푸렸다.

“우리도 저 안에 뭐가 사는지 모르는걸. 갑자기 튀어나와서 공격하면 어떡해. 나는 엘을 잃고 싶지 않아.”

“알겠어, 피시. 가까이 가지 않을게.”

울적한 피시의 목소리에 서둘러 그를 달랬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피시는 이엘을 절벽에서 최대한 떨어뜨리려고 끊임없이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엘은 피시가 말하는 곳까지 물러선 뒤에야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를 마음 놓고 보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그곳에 오게 될 줄이야. 푸른색이라고만 명명되어 있던 것과는 다르게, 바다는 갖가지 색을 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특정한 단어로 형용하기엔 무리일 정도로.

“저기 얕은 곳은 엘의 눈동자를 닮았어.”

“내 눈동자가 저런 색이야?”

“더 예뻐.”

하이에나는 스스럼없이 표현하며 이엘의 다리에 얼굴을 치댔다. 이엘은 피시의 애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다. 바다와 맞닿은 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테지만, 공격성을 띠지 않는 바다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그동안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던 이엘에게는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였다.

너른 잔디밭에서 풍기는 풀 냄새가 좋아, 이엘은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이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뱀의 영지에서는 늘 먹구름과 비구름으로 덮인 잿빛 하늘만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환하고 쾌청했다.

“옆에 누워도 돼?”

“응, 괜찮아.”

제 허락을 일일이 구하는 피시가 귀여워 또 엷게 웃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던 하이에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로도 붉어진 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피시는 홍조를 단 채 이엘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있잖아, 엘.”

“응.”

“여기 어때? 우리 영지, 그러니까 네 영지 말이야. 마음에 들어?”

“응, 아름다워.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은 처음이야.”

“다행이야. 네 마음에 들어서.”

가장 비옥하고 가장 넓고 가장 아름다운 곳임에도, 그저 바다가 맞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그 위험한 바다로부터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제국을 지켜 주고 있었음에도. 단물만 빼먹고 버려지는 게 일상이었지만, 피시는 이엘에게만큼은 인정받고 싶었다. 자신이 사는 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래서 네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살기를 바라면서.

“엘. 내일은 뭐 할까? 폭포를 보러 다녀올까? 영지 밖으로 나가면 아름다운 폭포도 있어. 정말 아름다워. 같이 갈까?”

“미안해, 피시. 내일은 할 일이 있어.”

“무슨 일? 내일은 일이 없다고 패티가 말해 줬는데.”

“개인적인 일이야.”

“무슨 일인데?”

“아마 노아 님께서 오실 것 같아.”

“…….”

“연락을 받았는데, 내일쯤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스완은 한시라도 빨리 데리러 가고 싶다는 노아의 말을 대신 전해 주었다. 서두르지 말라는 이엘의 말에도 노아는 이곳으로 오고 싶어 일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며, 스완은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그 남자가 좋아?”

피시는 이엘의 관심이 제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게 싫었다. 다시 시선을 제게 주도록,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 남자 생각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피시.”

“질투 나.”

“…….”

“나는…… 나도 이제 성체가 됐어. 나도 그 남자만큼 컸는데……. 왜 엘은 날 봐 주지 않아?”

분리불안이라도 생긴 것처럼 하루 종일 제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피시는 더 불안해 보였다. 어쩌면 자신이 여기로 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는 가장 평안해야 할 자신의 영지에서 가장 불안해 보였으니까.

“나…… 나 엘이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응? 나 정말 무서워……. 폐하가 없는 세상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제발 나를 버리고 가지 마. 응? 엘.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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