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금방 씻고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줘, 피시.”
“나도 같이……,”
“형님. 저희는 잠깐 이야기를 나누죠.”
패티스가 옷 끝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엘은 여전히 저만 쳐다보는 피시를 향해 손 인사를 해 주고는 이카르와 함께 왕성으로 사라졌다.
“난 너랑 할 말 없어, 패티.”
“서두르지 마. 네가 조급하게 굴면 군주께서 네게 금방 질리실 테니까.”
“질려? 엘이? 나한테……?”
“그래. 수컷이라면 모름지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암컷이 원하지 않으면 입 다물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고.”
“…….”
“패티스. 말이 지나쳐.”
풀이 죽은 피시를 대신해 하트가 고조 없는 톤으로 말했다. 자신이 피시를 구박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처음으로 그를 대신해 나서 주는 하트를 보며, 패티스는 흥미가 생겼다.
“이것 참, 신기하네. 너까지 감정을 내비칠 줄이야.”
“…….”
“아무튼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군주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너도 봤지?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강해지고 있어.”
결속력이 좋은 종족이었으나 후계자가 죽고 암컷이 모조리 사라지면서 집단은 와해됐다. 2차 전쟁 때는 복수심이라는 이름 아래 억지로 모였기는 하나, 그들을 통솔할 리더가 없어 허울뿐인 종족이라며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지 이엘이 영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이에나는 모든 능력치를 끌어 올리고 하나가 됐다. 모이면 모일수록 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테니,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게 마냥 꿈은 아니겠지.
“피시. 잘 들어.”
“…….”
“그녀는 널 마음에 두고 있어.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말이야.”
“나는…….”
“너는 군주가 좋지? 이성으로.”
“…….”
“그럼 쟁취해야지.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사랑받는지.”
하지만 그건 인간에게 통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는 피시를 바라보며 패티스는 크게 웃었다.
“순종적인 수컷을 싫어하는 암컷은 없어.”
“나는…….”
“네 그 약해 빠진 정신 상태와 제어도 못 하는 폭주 능력만 어떻게든 감춰.”
“…….”
“그 모습에 군주께서 네게 질리실 수도 있으니.”
다소 심하게 퍼붓는 폭언에 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피시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제 동생을 쳐다봤다.
“패티스. 그럼 내가 엘을 좋아해도 반대하지 않을 거란 소리야?”
“네가 좋을 대로 해석해.”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제 어리석은 형님께서 인간과 사랑 놀음을 하든 말든. 그런 건 자신과 하등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피시.”
“…….”
“그래서 우릴 버리지 않도록.”
“버려? 엘이? 버린다고? 왜?! 싫어. 싫어, 그런 건…….”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형님이 잘하셔야죠.”
하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두 동생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패티스가 피시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면 딱히 나설 마음은 없었다. 여전히 약해 빠진 인간 여자를 왕위에 올린 것은 못마땅하지만, 패티스의 말처럼 그게 갖다준 이득도 있긴 하니까.
하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곤 패티스는 싱긋 웃으며 피시의 어깨를 다독였다.
“모르는구나. 그녀는 언제든 우릴 버릴 수 있어.”
“왜…….”
“글쎄. 그분 곁에 머무는 수컷이 워낙 많아서?”
“…….”
“너도 봤지? 계속 어슬렁거리는 그 재규어.”
이카르를 떠올리며 피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언제나 자신과 이엘 사이를 방해하는 놈이 제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늑대며 독수리며. 아, 우리 왕께선 어찌나 인기가 많으신지.”
“그럼 어떡해? 엘이 나를 버리면……,”
“그러니까 형님이 그녀의 마음에 드셔야죠.”
“…….”
“또 모르잖아요? 군주께서 형님을 사랑하기라도 하신다면.”
“…….”
“영원히 형님 곁에 계실지도.”
뭐, 나머지 수컷 놈들은 내게 맡기시고. 그 말과 함께 패티스는 빙그레 웃으며 얼이 빠진 피시를 뒤로하고 여유롭게 성을 향해 걸었다.
*
“오드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됐다고 합니다.”
“그래.”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던 노아는 쭈뼛쭈뼛 서 있는 앤디를 쳐다봤다.
“더 할 말 있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겠어. 다 나가.”
전쟁은 당연히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실상 속도전이었다. 뱀의 동맹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연합군은 빠르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노아는 멸족시킬 마음이 없었기에 일정 부분에서 퇴진해 돌아왔다.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뱀들은 저희 영지를 수습하느라 연합군을 뒤쫓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다.
그 뒤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수습도 이 정도면 충분히 끝났다. 하이에나의 영지에 머물고 있는 이엘을 데려올 시간이 됐다는 의미였다. 노아는 오드의 이동 능력으로 하이에나의 영지에 다녀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다소 피곤하긴 했지만 곧 그녀를 볼 생각에 피로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런 노아의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앤디는 그동안 차일피일 미뤄 왔다. 수심으로 물든 앤디를 바라보며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뭔 일 있었나?”
“일라이저…… 말인데요.”
일라이저는 앤디의 도움으로 탈출한 뒤 지금까지 늑대의 영지에서 머물고 있었다. 원래 살던 마을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그는 전쟁의 충격 때문인지 의욕을 잃은 채 내어준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일라이저가 왜?”
“루스 경의 아들은 맞는 것 같습니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뭘. 할 말이 그거냐?”
“폐하. 기억하십니까? 약 30여 년 전에 있었던 재규어 토벌 말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
민감한 이야기에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2기사단이 병력을 모두 끌고 재규어를 토벌하러 갔던 것은 늑대들에게 부끄러운 상처로 남아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2기사단이 은밀히 처리한 탓에 늑대들은 아무것도 몰랐다고는 하나, 이후에 토벌전 언급을 꺼리며 묵인한 것 자체가 그들에겐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특히 노아는 사랑하는 친구를 잃을 수 없어 모르는 척 행동했다. 표면적인 이유였던 역모를 운운하며 모르는 척 덮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재규어가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음에도……. 한숨을 집어삼키는 왕을 쳐다보며 앤디가 주저 끝에 입을 열었다.
“그때 제 2기사단이 재규어를 토벌하러 떠났고 그 결과, 일부는 실험체로 사로잡혔고 대다수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
“그 틈에 살아남은 직계는 소백작, 그러니까 이카르가 유일하고요.”
“…….”
“이카르는 그때 복수를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고 종족을 잃었다. 1차 전쟁이 있기도 전에 재규어는 종족의 상당수가 사라진 것이다. 당시 성장도 마치지 못한 어린 우논이었을지라도 그 기억을 잊었을 리 없지. 그러니 복수를 계획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이종족들은 만일 재규어가 남아 있다면, 2차 전쟁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결국 살아 있는 개체는 없다는 소리지. 소문대로 멸종한 종족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2차 전쟁 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루시우스 러셀의 목을 친 것은 르네 님이십니다. 러셀 경은 황녀였던 오헬을 호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루시우스 러셀의 가족은 화를 피해 도망을 쳤을 겁니다. 호위하는 기사 하나 없이요. 당시 러셀 가문은 무슨 이유인지 사병을 따로 두지 않고 모두 황실기사단으로 차출된 상태였습니다.”
“앤디.”
“무방비하게 도망치던 러셀 후작의 식솔을 죽인 게 이카르였던 것 같습니다.”
“…….”
“정확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일라이저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모양입니다. 그는 이카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워졌다. 일라이저와 르네의 관계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재규어까지 엮여 있다니.
“러셀 가문은 황실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가문이었죠. 마찬가지로 일라이저도 오헬에게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카르와 함께 탈출하던 오헬을 보곤 충격을 받아 줄곧 저 상태입니다.”
“재규어에게 복수심을 갖고 있었단 소리야?”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정도 선에서 일라이저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르네의 눈에 띄지 않게 인간들과 함께 사는 편이 그에겐 가장 좋겠지. 물론 이카르를 향한 복수심 또한 가라앉혀야 한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일라이저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모든 건 루시우스로 귀결된다. 그가 원인이자 결과였다.
“내가 알던 사람 중에 가장 신념이 올곧았는데.”
“…….”
“지나고 보니 그가 모든 걸 망쳤어.”
가장 좋아하고 사랑했던 친우였다. 황실에 맹목적인 귀족이었음에도 그는 이종족과 어울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신념이 곧은 남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루시우스도 결국 인간이었다.
한 종족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고, 자신을 좋아하던 여자를 직접 처형하기까지 했다. 낱낱이 밝혀지는 루시우스의 과거에, 노아는 결국 그의 죽음을 묵인하는 것으로 답했다.
“폐하. 어떻게 할까요?”
“영지에서 내보내.”
“하지만……,”
“그 정도 아픔은 누구나 안고 살아. 우리 중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자가 있나?”
“…….”
“독수리의 복수로부터 지켜 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이후에 놈이 이카르와 대치하든, 르네의 눈에 띄든. 그건 일라이저의 선택이고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