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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8화 (198/488)
  • 198화

    *

    ― 괜찮아. 너는 괜찮은 거야?

    이틀 전부터 스완과 연락이 가능해졌다. 그의 안부에 이엘도 괜찮다며 화답했다. 스완은 안도하며 투정을 부렸다.

    ― 넌 정말…….

    미안해. 너까지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녀의 말에 스완이 발끈 화를 냈다.

    ― 내가 지금 내 목숨이 아까워서 이러는 줄 알아?

    아니었어?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농담에 스완은 한참이나 씨근덕거렸다. 정신이 돌아온 뒤로도 스완은 한참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레온의 우스갯소리처럼 체력도 약하고 정신력도 약해서, 되레 인간인 이엘보다 후유증이 더 길게 남았다. 그래서 이엘은 그에게 몹시 미안했다.

    ―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이엘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 스완에게 답을 해 주며 창가로 향한 그녀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아침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시원한 바람 속에 스며든 소금기가 언뜻 얼굴 곳곳에 묻는 것 같았다. 이곳, 하이에나의 영지는 대륙의 끝이며 바다와 맞닿은 곳이니까.

    ― 어떻게 살았어?

    창문을 닫으려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스완은 자신과 영혼이 묶여 있으니 모를 리가 없지.

    ― 분명 숨이 멈췄어.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거야.

    죽었던 건 아니야. 이엘의 말에 스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걱정 마, 스완. 우린 죽지 않아. 그렇게 말하곤 이엘은 서둘러 스완과의 연락을 끊었다.

    하이에나의 영지로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무료하지만, 무료하지 않은 곳이다. 평생 꿈도 꿔 보지 못했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이엘은 기분 좋게 웃으며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엘이 직접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온 것은 당연하게도 피시였다.

    “엘, 보고 싶었어.”

    “어제 봤잖아.”

    “또 꿈을 꿨어. 군주님이 사라지는 꿈.”

    “말도 없이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아직도 내 말을 못 믿어?”

    “아니. 믿어. 당연히 믿어.”

    어느새 그는 제 머리보다 하나 더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위치가 됐다. 피시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이마 위로 제 입술을 잘게 여러 번 부딪쳤다.

    “모닝 키스.”

    “피시!”

    “응, 폐하. 오늘은 어딜 갈까요?”

    “또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싫어. 화내지 마. 나한테 화내지 마. 응?”

    도무지 왕자라고 보기가……. 이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를 지나쳐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시는 언제나처럼 이엘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나 옷 갈아입을 건데.”

    “그, 그럼 뒤돌아 있을게.”

    귓불이 붉어진 그는 잽싸게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손으로 제 눈을 가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웃기고 귀여워서, 이엘은 단추를 풀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피시는 셔츠를 반쯤 벗은 이엘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 미안해.”

    “괜찮아.”

    이종족은 이런 거에 신경 쓰지 않던데. 인간과는 달리 이종족은 겉모습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걸로 아는데 별일이네. 오히려 이엘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가 여전히 뒤돌아선 피시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쏙 내밀어 그의 뺨을 콕콕 찔렀다.

    “다 입었어.”

    “아……! 저, 정말 미안해, 군주님…….”

    “군주님이란 말은 좀 그만해, 피시. 지금은 그런 소리 들을 필요 없어.”

    “…….”

    “그럼 정무를 보러 나갈까?”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이엘이 가볍게 몸을 풀더니, 피시를 뒤로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피시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해, 결국 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우와, 군주님이다.”

    “폐하, 안녕하세요!”

    방을 나와 집무실로 향하려는 그녀의 앞에 어린아이들 여럿이 올망졸망 모여 반겼다. 밤톨처럼 작고 귀여운 우논들을 보며 이엘이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냥 편하게 불러 줄래?”

    “하지만 왕이시잖아요.”

    “맞아요. 아버지께서 예의를 지키라고 하셨는걸요.”

    왕의 존재 유무만으로 종족의 강함이 달라진다. 그간 다른 종족에 왕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하이에나는 21년이 다 되도록 왕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설령 종족이 다른 존재라 할지라도 일단 암컷이 왕으로 존재만 한다면, 하이에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원래 결속이 뛰어난 종족이니까.

    그게 패티스가 온갖 노력을 다하며 저를 끌어들인 이유겠지. 이곳에 오고 나서야 그의 행동에 조금은 납득이 갔다.

    “폐하. 간밤은 평안하셨습니까?”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패티스가 나타났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며 벽에 밀착하듯 자리를 비켜 주었다. 와, 왕자님이시다……! 새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여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잘 잤어요. 패티스도 좋은 밤이었나요?”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군림하신 이후로 매일이 저의 기쁨이랍니다.”

    패티스는 싱긋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이엘을 일단 영지로 데려오면 어떻게 해서든 왕의 자리에 앉혀 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본래 황족이었으니 높은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아직 때가 아니며, 자신은 하이에나만의 왕이 될 마음이 없다고 했다.

    생각보다 야망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단순한 욕심 때문은 아닌 듯했다. 뭐가 됐든 좋았다. 종족의 결속을 다질 수만 있다면, 허울뿐인 존재라 할지라도 왕의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으면 된다.

    “폐하. 집무실에 함께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래요.”

    이엘은 여전히 벽에 바짝 붙어서 긴장을 하는 아이들에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렴.”

    “네, 폐하!”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논들을 보니, 영지에 두고 온 새끼 늑대들이 생각났다. 지금쯤이면 또 얼마나 성장했을지. 주드가 살아 있을 땐 저렇게 곧잘 어울려 다녔는데. 고작 몇 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에겐 오래된 추억처럼 흐릿하게 남아 있다.

    주드가 죽고 제 삶이 녹록지 않아져서일까. 예전처럼 순수하게 웃으며 뛰노는 시간은 바라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시간은 이렇게 빠른데, 아무는 속도는 여전히 더디기만 했다.

    “엘.”

    어느새 뒤따라온 피시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말을 붙였다. 이엘은 괜찮다며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일이 고돼서 그러지? 줄여 달라고 할까? 응?”

    “고되기는. 큰일도 아닌데, 뭘.”

    “형님.”

    뒤따라오던 패티스가 걸음을 멈추자 이엘과 피시도 덩달아 멈추고 뒤로 돌았다. 그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피시를 싸늘하게 쳐다봤다.

    “군주께 말씀을 높이도록 하십시오.”

    “…….”

    “형님이 하대를 할 분이 아닙니다.”

    이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사했는데도 하이에나들은 자신을 왕 취급했다. 이엘은 패티스의 노성에 혹 피시의 기가 죽었을까,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예상외로 피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도 알아.”

    “…….”

    “하지만 엘이 원치 않잖아. 나는 그녀의 말만 들어.”

    “…….”

    “내 왕은 엘이야. 패티, 네가 아니라.”

    패티스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마냥 흐리기만 했던 형의 눈동자에 욕심이 조금 담겨 있었기 때문에. ……알겠습니다. 그가 만족을 눌러 삼키고 그렇게 말하자 피시는 이엘의 옷 끝을 잡아당기며 그와 거리를 조금 벌렸다.

    “왜 그래, 피시?”

    “패티는 널 이용할지도 몰라.”

    “그런 건 나도 알아.”

    “그에게 넘어가지 마.”

    “패티스는 네 동생이잖아. 고작 남일 뿐인 내게 그렇게 말해 줘도 되는 거야?”

    장난기 묻은 얼굴로 피시를 쳐다봤다. 그러나 피시는 낯설게 느껴질 만큼 진지했다.

    “남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알겠어. 조심할게.”

    “내겐 왕이 더 중요하니까.”

    “…….”

    “힘들면 일하지 마. 엘이 빈둥댄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을 마친 피시는 이엘을 집무실 앞에 데려다주고는 그녀의 뺨 위에 길게 입술을 눌렀다가 떨어졌다.

    “작별 키스.”

    끝나면 모시러 올게요, 폐하.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은 여전히 소년처럼 해사했다.

    *

    “언제까지 여기 머물 생각이야? 빨리 네 종족이 있는 곳으로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나야말로 나타니엘이 이 냄새나는 곳을 나가자고 하길 기다리는 중이다.”

    재규어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들판 위에 앞발을 포개고 엎드렸다. 패티스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엘이 바쁜 틈을 타, 놈을 영지에서 추방시킬 계획만 짜고 있었는데…….

    “이카르!”

    “응.”

    저 멀리 훈련을 하고 있던 이엘의 부름에 재규어는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대답했다. 이렇듯 그녀가 잠시도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니, 원. 이카르의 목을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패티스는,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이엘을 발견하곤 예의 미소를 지었다.

    “폐하. 여기 타월입니다.”

    “아, 패티스. 고마워요.”

    “수련은 고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좋았어요, 오히려.”

    그녀의 등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하이에나는 곧장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흐르는 땀을 타월로 닦아 내는 이엘과는 달리, 하트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직 무뎌.”

    “더 정진해야겠군요.”

    냉혹한 하트의 평가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뒤로 이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총과 검을 쥐는 훈련에 매달렸다. 로빈의 성에서 홀로 훈련을 했다지만 대련 상대 없이, 그것도 모두의 눈을 피해 잠깐씩 하는 훈련에는 한계가 있었다.

    본래 하이에나와 인간의 합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특히 몸짓이 가볍고 날랜 인간일수록 하이에나가 그의 날개가 되어 줄 테니. 그래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하트가 그녀의 훈련을 돕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의지가 아니라 피시의 강요였지만.

    “엘!”

    쪼르르 내달려 온 피시가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 대신 땀을 닦아 주었다.

    “덥지? 씻고 와. 내가 맛있는 과일을 준비해 놓을게.”

    “고마워, 피시. 타월 줘. 내가 할 수 있어, 그 정도는.”

    “시종을 따로 붙이지 않잖아. 내가 하게 해 줘. 응? 엘, 응?”

    다른 종족의 영지에선 기함할 일이다. 왕자가 직접 시중을 들고 있다니. 이엘은 과할 정도로 저를 대접하는 하이에나에게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그러나 피시만은 막지 못했다.

    “알겠어. 고마워, 피시.”

    막무가내인 셋째 왕자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패티스와 하트의 눈치를 봤다. 보통 이 정도로 이종족이 치대는 걸 보면 그의 종족들은 반발하며 눈살을 찌푸릴 텐데. 그러나 패티스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고 하트는 무감했다.

    패티스야 원체 속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유일하게 그녀를 왕으로 대우하지 않는 하트마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놔.”

    그 자리에서 홀로 못마땅해하던 이카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피시의 손에서 타월을 홱 뺏어 갔다. 그는 투박한 손으로 이엘의 얼굴을 닦아 주더니 야외 테이블 위에 타월을 휙 집어 던지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성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목욕 시중은 내가 들어 줄게, 그럼.”

    “이카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이엘이 소리를 내지르자, 이카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시중 같은 거 필요 없다는 말에 이카르는 씨익 웃더니 고개를 뒤로 돌려 피시를 힐끔 보았다.

    “그럼. 나의 나타니엘은 무엇이든 혼자 잘하니까.”

    그러니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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