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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7화 (197/488)
  • 197화

    “네. 안 되나요?”

    순수하게 궁금함을 담아 묻는 말에 피시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녀의 온기가 제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피시는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조건 돼.”

    “…….”

    “대신 영지로 갈 땐 내 등에 타는 거야. 응? 그렇게 해 줄 거지? 나랑 갈 거지?”

    젠장, 저 멍청이가. 패티스는 꼬리를 살랑거리는 제 형님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포기했다. 빌어먹을 재규어까지 데리고 가게 생겼네. 도중에 떨어뜨리든가 해야지.

    “패티스.”

    “……예, 군주님.”

    “이카르와 함께 갈게요.”

    “물론입니다. 군주께서 원하신다면.”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못마땅한 내색은 할 수 없었다.

    *

    “르네 님!”

    “후작? 그대가 여기까진 무슨 일인가?”

    진두지휘하고 있던 르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엔리케였다. 원래대로라면 병사들을 이끄는 건 엔리케의 몫이었겠지만, 그는 지금 왕을 대신해 영지를 맡아야 했다. 그렇게 영지를 지키고 있어야 할 후작의 갑작스런 등장에, 르네는 일단 지휘하던 것을 다른 우논에게 맡기고 엔리케와 함께 진영을 벗어났다.

    “영지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것은 아닙니다. 영지는 경비 단계를 높였으니 앞으로도 이상 없을 겁니다.”

    “그럼 그대가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우선 이것을 받으십시오.”

    엔리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르네의 앞에 은밀히 내밀었다. 르네는 빛에 반짝이는 그것을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브로치였으나 정밀히 세공된 문양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걸 왜 후작이 갖고 있지?”

    “몇 주 전에 영지를 통과한 인간이 있습니다.”

    “…….”

    “늑대의 공작과 함께 제게 허가를 받았고, 오헬과 관련한 일이었기에 의심하지 않고 영지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엔리케의 말을 들으며 르네는 반짝이는 브로치를 쳐다봤다. 낯설지 않은 문양. 그는 이 문양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무래도 러셀가의 대가 끊기지 않은 모양입니다.”

    “얼굴을 보았나?”

    “미련하여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이 브로치를 줍고 나서야 러셀 후작이 떠올랐습니다.”

    “…….”

    “폐하.”

    “알겠다. 우선 후작은 돌아가서 영지 수호에 힘쓰도록.”

    “예. 알겠습니다.”

    엔리케는 왕께 약식 인사를 마치고 빠른 속도로 영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쾅쾅! 연이어 터지는 폭음에 귀가 따가웠다. 일순 21년 전에 들었던 폭음과 겹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르네는 제 손에 쥐여진 브로치를 세게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가문의 씨가 여태 살아 있었다니. 루시우스 러셀. 그를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괴로웠다.

    “…….”

    하지만 르네는 곧 깊은 한숨과 함께 브로치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원망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이제 와 원한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다고 릴리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루시우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지만, 그에 대한 원한을 그의 가문 사람에게 풀 마음은 없었다. 그래 봤자 모든 원흉은 선황이다. 그런 식이라면 선황의 자식도 죽여야 한다.

    그리고 빌어먹을 선황의 자식은, 그에겐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귀중한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까.

    “다녀오십시오.”

    “…….”

    “하이에나의 영지에 오헬이 임시로 지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투의 지휘를 맡고 있던 우논 하나가 르네에게 말했다. 그는 르네와 함께 이곳에서 긴 시간 이엘을 지켜봤던 우논들 중 하나였다. 자신의 왕께서 그녀를 얼마나 염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우실 겁니다.”

    “전투가 우선이다.”

    “폐하. 저는 사실 인간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이곳에서 오헬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알던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이 혐오하던 황족의 모습은 아니었다.

    “폐하. 저희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찾은 삶으로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

    “다녀오십시오. 이곳은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르네는 대답 없이 순식간에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를 이탈했다. 그는 날개를 크게 움직여 방향을 잡았다. 저 멀리 하이에나 한 무리가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게 보였다. 그곳을 향해 빠르게 활강하자, 그를 발견한 하이에나가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르네 님?”

    가장 앞에서 피시의 등에 타고 있던 이엘이 르네를 발견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니 르네는 그동안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무리가 완전히 멈추고 이엘은 피시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르네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젠 하다 하다 독수리까지.”

    이카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짧게 찼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패티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카르를 쏘아봤다.

    정작 르네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의 눈엔, 그의 귀엔 오롯이 그녀 하나뿐이었다. 이엘은 피로 얼룩지고 재가 묻어 온통 엉망이었지만, 제 눈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늘 위에서 몇 달을 애가 타도록 지켜만 봤다. 노아든 레온이든, 그들은 이엘과 만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를 지켜야 했으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이엘의 앞으로 다가간 르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다.”

    “르네 님.”

    민망함에 움찔하던 이엘은 제 몸을 감싼 르네의 손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머뭇거리던 손을 들어 그를 토닥거렸다. 그러곤 부러 웃음을 섞은 농담을 했다.

    “르네 님은 하늘에서 다 지켜보셨던 거 아니에요?”

    “다 봤지.”

    “그런데 무슨……,”

    “네가 스스로 자해하는 것도.”

    “…….”

    “네게 로빈이 한 짓도.”

    분명 자신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하늘을 수호했던 건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순발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바보처럼 하늘만 뱅뱅 도는 일이었기에.

    “다른 놈들이 널 안는 모습도 멍청하게 다 지켜봤지.”

    머쓱해진 이엘이 슬그머니 손을 내리려 하자 르네가 그녀의 팔을 빠르게 잡아, 다시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밀착하다시피 가까워진 간격에 이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확 들이켜 멈췄다.

    “하지만 역시 멀리서 보는 것보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는 게 좋군.”

    “…….”

    “네 앞에선 내 눈알도 쓸모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르네는 그제야 벅찬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차분히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얇은 네글리제는 반 이상이 찢어졌고, 얼굴과 머리카락엔 핏덩이가 덕지덕지 엉켜 있다. 그의 시선이 민망해진 이엘은 빠르게 르네의 품에서 벗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빗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꾀죄죄했네요. 민망하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르네 님은 여전히 근사해요.”

    “네 눈엔 내가 근사한가?”

    놀리듯 대꾸하는 그의 물음에 이엘이 입을 딱 닫았다. 어쩐지 낯부끄러워서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르네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게만 근사하면 됐지.”

    “그게 아니고……,”

    “내게도 넌 변함없이 아름다워.”

    “…….”

    “오히려 더 멋있어 보이는 게. 나보다 낫군.”

    그는 계속해서 드문 웃음을 보여 주며 이엘의 머리카락에서 핏덩이를 떼어 주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에 이엘은 할 말을 잃고 죄 없는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나타니엘.”

    “네.”

    “너를 믿길 잘했다.”

    “…….”

    “내 눈엔 여전히 네가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 님.”

    “내겐 여전히 넌 빛이야.”

    그의 말에 되레 울컥한 것은 이엘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믿어 달라고 몇 번을 외쳤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금의 불안함은 안고 있었겠지. 자신조차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

    그러니 지금 르네가 하는 모든 말들이 그녀에겐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는 건 당연했다.

    “황녀. 그대 덕분에 다시 인간을 믿을 수 있게 됐다.”

    “…….”

    “그대라면, 당신이라면. 새로운 제국에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심이었다. 이엘의 이마 위에 제 이마를 가볍게 얹어, 그녀에게만 들릴 듯이 작게 속삭였다.

    “머지않아 당신의 나라에, 내가 함께할 것입니다.”

    “르네 님.”

    “나는 당신께 모든 걸 걸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그 한마디와 함께 르네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충성의 맹세였으나 약간의 사사로운 애정도 함께 담겼다.

    가볍게 받을 수만은 없는 입맞춤에 이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홧홧하게 느껴질 정도로 뜨겁기만 했다. 열이 전이라도 된 양 얼굴 곳곳이 붉어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 르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아쉽게 떨어졌다. 마음 같아선 함께 돌아가고 싶었으나 지금으로선 하이에나에게 맡기는 편이 안전했다.

    “그녀를 잘 부탁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능구렁이 같은 패티스가 대충 대답하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이엘 역시 르네와 눈빛으로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피시의 등에 올라탔다.

    르네는 계속 자신을 쏘아보고 있던 셋째 왕자를 쳐다봤다. 미쳤다는 건 전부 거짓이었나? 세잔티노 때만 하더라도 어딘가 이상해 보였지만 지금의 피시는 완연한 성체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눈빛에 예리하게 날이 서 있어, 그 누구보다 위협적이었다.

    설마 나타니엘이 곁에 있어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하이에나 떼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그의 말은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꼭 돌아오길.”

    점이 되어 사라진 그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르네는 다시 독수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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