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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6화 (196/488)
  • 196화

    “비켜.”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이카르가 으르렁거리며 위협했다. 그러나 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카르를 무시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이엘을 향해 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정중히 일으켜 세워 주었다.

    “같이 갈 거지?”

    “어떻게 하이에나가 여길…….”

    “네가 늑대를 통해 와 달라고 했잖아.”

    “…….”

    “나는 네 목소리를 듣고 온 거야.”

    그래서 이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이엘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하이에나에게 원군을 요청한 적이 없다. 앤디에게도 말했지만 피시의 맹목적인 구애가 그의 종족에게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작전에선 배제 대상이었다.

    그런데 늑대를 통해서 왔다면……. 노아가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뜻은 결국.

    “알겠어요.”

    “나타니엘!”

    “괜찮아요. 당분간만 의탁하고 돌아갈 거니까.”

    하이에나의 영지가 내게 안전할 거란 소리겠지. 이엘은 시선을 들어 여전히 전투가 한창인 곳을 응시했다. 뱀들은 만만한 종족이 아니었다. 이쪽 역시 오랜 시간을 준비했던 전쟁이므로 하루 만에 끝나지도 않을 터였다. 늑대는 이번 일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엘과 함께 영지로 돌아갈 순 없다. 그러니 안정이 될 때까지 하이에나에게 의탁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으리라.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군주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한쪽으로 내린 패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엘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를 따라 하이에나들이 모두 일어나 정렬했다. 가히 절경이었다. 엄청난 수의 군대가 흐트러짐 없이 대열에 맞춰 이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거대한 대군이 전쟁이 아닌 그녀의 호위를 위해 차출된 것이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시네요. 군주라니 그게 무슨……,”

    “유일한 암컷이시잖습니까.”

    “…….”

    “이미 온 땅에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물론 이엘은 그걸 노리고 뱀의 영지로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잠깐의 침묵이 오갔다. 그러나 곧 패티스가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마치 왕의 눈을 함부로 마주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니 저희의 군주시지요.”

    “그럼 제가 황족이라는 것도 아시겠네요?”

    “예.”

    “그런데도 당신들의 군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이에나가 인간을, 그것도 황족을 얼마나 혐오하는지는 이미 숱하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들에게 여자는 예외였다고 해도, 그게 황족에게까지 통하진 않는다. 모든 원흉인 황족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군주님.”

    “…….”

    “물론 당신께서 황녀이기에 저희의 원수이신 것은 맞습니다만.”

    패티스는 내려뜨리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려 이엘과 마주했다. 쌍둥이인 피시와 매우 닮았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맑은 눈동자를 가진 피시랑은 달리, 야심으로 물든 그의 갈색 눈동자엔 진득한 소망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습니다.”

    마치,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당신은 암컷이시니까요.”

    “…….”

    “신분을 뛰어넘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성별이지요.”

    “당신들도 내게서 아이를 보고 싶어서요?”

    “오, 저런. 아닙니다. 저희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패티스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희는 그저 당신이 ‘여자’이기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단지 여자라서요?”

    “예. 설령 당신께서 아이를 갖지 않으신다고 하셔도 저희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

    “그저 당신께선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저희의 왕으로 군림해 주시면 됩니다.”

    새끼 따위나 바라는 하등한 종족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듯이 웃었다. 그의 눈에 비친 욕망은 뱀들에게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거짓이 아니다. 지독한 집착이지만 그건 로빈의 것과는 다른, 단순히 암컷을 향한 맹목적인 굴종이었다.

    “그때까지 당신을 위협하는 것들은, 저희가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

    “저희를 그렇게 사용하십시오, 군주님.”

    본래 하이에나는 암컷이 수컷보다 능력도 뛰어나고 생활력도 강한 모계사회를 이루는 종족이다. 암컷이라면 약체라 할지라도 수컷보다 서열이 높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세계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엘은 하이에나가 아니었고, 심지어 그들이 혐오하는 인간이었다. 패티스의 말처럼 그녀가 ‘그만한 가치를 갖는 성별’이기는 했으나 이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오헬. 의심하지 않아도 돼.”

    줄곧 그녀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시가 입을 열었다. 하트나 패티스처럼 완연한 성년의 모습이 되었지만, 피시는 여전히 이엘의 앞에서 순진하게 굴었다. 그는 이엘의 손끝을 조심스레 움켜쥐며 둥그런 눈동자로 그녀를 설득했다.

    “네가 위험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피시 님.”

    “우리에게 와 줄 거지?”

    그의 애달픈 목소리에 이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에도 싸움이 끝날 때까진 조용히 빠져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선 스라소니처럼 무턱대고 쳐들어오는 놈들과 협상하는 게 어려울 테니. 결국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안 돼, 나타니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카르가 이엘의 앞을 가로막고 화를 냈다.

    “이제 겨우 늑대에게서 벗어났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하이에나? 거길 네 발로 들어가겠다고?!”

    “이카르. 늑대는 적군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하이에나도 적군이 아니죠.”

    “뭐?”

    “죄송해요. 당신을 속였어요.”

    “…….”

    “당신의 힘이 필요해서 늑대와의 관계를 속였어요.”

    남자는 미간이 갈라져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엘은 깊은 한숨을 쉬며 그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저는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왜…….”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왜!”

    “신께서.”

    “…….”

    “저를 살려 두신 이유가 있을 거예요.”

    하하. 하하하……. 이카르는 기가 찬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보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신께 감사했다.”

    “…….”

    “신께서 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 내게,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없는 내게. 너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

    “이카르.”

    “그런데 넌 왜 나완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려고 해.”

    “…….”

    “내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했잖아.”

    이젠 리카르디스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나타니엘 그 자체가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을 속였어도, 설득해서 데리고 가면 될 일이다. 이카르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버릴 자신이 없었다.

    “저는 오빠의 그림자로 살았어요.”

    “…….”

    “그렇게 살다가 전쟁 이후엔 땅속에서 살았어요. 모두의 눈을 피해.”

    이엘의 말에 이카르는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그도 잘 알고 있다. 이엘은 배 속에서부터 순탄치 못한 삶이 예정돼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리카르디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카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평생을 숨어 살았어요.”

    “나타니엘.”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

    “물론 위험하죠. 제겐 숨 쉬는 매 순간순간이 위협 그 자체예요. 그래서 당신이 걱정하고 염려하는 게 뭔지 잘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요.

    “저는 빛을 보고 싶어요.”

    “…….”

    “단 하루를 살아도, 빛을 보고 흙을 밟으면서 살고 싶어요. 새장이 아니라, 동굴이 아니라. 허름한 집이라 할지라도 땅 위에서 살고 싶어요.”

    이카르 자신도 도망만 치며 살았다. 제아무리 최상위 포식자 계층이라 할지라도 무리 없이 홀로 살아가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 늘 도망만 쳤다. 어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살았다.

    “그래서 나랑 살자고 했잖아. 새장이나 동굴로 가자는 게 아냐. 그냥……,”

    “그것도 숨어 사는 거잖아요.”

    “…….”

    “저는, 제 이름을 죽을 때까지 숨기면서 살아야 하나요?”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제 이름은 특별했고, 이름 그 자체가 자신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숨겨야 했다. 별것 아닌 이름마저도 숨긴다면, 대체 내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건데.

    이 이름. 이온에게 가지 못해 내게 온 이 이름. 나를 사랑했다던 어머니의 이름이 붙은 내 이름. 불완전한 이름이지만, 내게 온 이상 완벽한 나의 이름이며 나의 신분이다.

    “저는 황제가 될 겁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 내가 있을 곳과 내 이름을 되찾겠다.

    “늑대들의 종용으로 황위에 오르겠다는 게 아닙니다.”

    “나타니엘.”

    “내 이름을 걸고, 내가 스스로 오를 겁니다.”

    그녀의 결연한 의지에 하이에나들은 반색했다. 물론 자신들만의 군주가 되면 더없이 좋겠으나, 그게 아니어도 좋다. 황제. 그렇게 싫어하던 지위였지만 여자가, 암컷이 황제가 된다면……. 아, 상상만 해도 황홀하구나. 하이에나들은 기꺼이 황제를 따를 것이다.

    “그 자리는 제 것입니다.”

    “…….”

    “되찾는 것뿐입니다.”

    이카르는 침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 것’이라고……. 소름이 끼치는군.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녀가 그렇게 정했다. 되찾겠다고.

    그럼 내게 선택지는 사라지는 셈이군. 그는 씁쓸함에 얕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카르.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해요. 솔직히 당신과는 깊게 엮일 마음이 없었어요. 이용당했다고 생각해도, 저는 변명할 여지가 없어요. 사실이니까.”

    “…….”

    “그래서 고마워요. 여기까지 따라와 줘서. 당신의 도움과 위로 덕분에 큰 고비를 넘겼어요. 이제 더 이상 속이지 않을 테니……,”

    “웃기는군.”

    그는 보폭 한 걸음으로 이엘과의 사이를 좁혔다.

    “실컷 이용했으니, 이제는 버리겠다?”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죄송해요.”

    “네 어머니는 되도록 네가 황위에서 멀어지길 바랐다.”

    “…….”

    “허울만 좋은 지위니까.”

    이카르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고,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삐딱한 시선으로 하트와 피시, 그리고 패티스를 노려보았다.

    “난 네 옆에서 떨어질 마음 없어, 나타니엘.”

    “…….”

    “그러니까 너희 영지에 나도 들어가야겠다, 하이에나.”

    패티스의 눈썹이 위로 틀어졌다. 그는 이엘을 바라보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군주님. 재규어는 위험합니다.”

    “웃기군. 그걸 하이에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군주님은 우리 힘으로 충분히 지켜 드릴 수 있으니 너는 이쯤에서 늑대에게 돌아가도록 해라.”

    “내 말 못 들었나? 난 늑대와 손을 잡은 게 아니다.”

    “…….”

    “난 나타니엘을 선택한 거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됐군. 패티스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이엘만 챙겨서 제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이에나의 목표는 오로지 그녀였다. 이깟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동맹 종족임에도 상관없었다.

    결국 패티스는 제 옆에 서 있는 피시를 어깨로 툭 쳤다. 형님이 좀 가서 말해. 그의 작은 목소리에 피시는 멈칫하다가 이엘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저것도 데리고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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