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5화 (195/488)

195화

“어…….”

“그래, 오헬이다. 살아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 어째서…….”

“뭐?”

“위험, 위험합니다!”

버럭 소리를 지른 일라이저가 앤디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앤디는 경악에 찬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저건 또 왜 저래?! 일라이저는 이엘이 보인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빠른 앤디가 뒤에서 냅다 달려와 일라이저를 붙잡아 세웠다.

“야! 위험하잖아, 미쳤냐?! 지금 뭘 하는 거야!”

“위, 위험합니다! 황녀님이…… 위험해요!”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쟤 잘 도망치고 있잖아. 안 보이냐?”

“재규어잖습니까!”

울분에 찬 일라이저의 얼굴은 단순히 공포에 질려서 혼란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서늘할 정도로 차갑게 굳은 얼굴 위에 소름 끼치는 살기가 어려져 있었다. 앤디도 그 모습에 놀라 뒤로 한 발짝 주춤하며 물러섰다.

“저 자식은, 제가 죽일 겁니다.”

앤디는 고개를 뻣뻣하게 돌려 이엘이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그녀를 지칭하는 말은 당연히 아닐 테고…….

재규어? 지금 재규어를 두고 한 소리인가?

“일라이저. 진정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앤디가 크게 입을 벌리며 그와 의사소통을 했다. 앤디는 일라이저를 잘 모르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적어도 그가 봐 왔던 단정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포효하는 모습이 흡사 이종족을 보는 것 같았다.

“일라이저. 우선은……,”

“당신은 같은 이종족이기에, 저를, 막으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저놈은 우리 편이야. 오헬을 데리고 도망치는 중이라고! 오헬은 안전하다니까?”

“……우리…… 편……이라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라이저가 낯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왜 같은 편입니까……? 제게만 들릴 정도로 처절하게 무너진 목소리가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앤디는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단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타일렀다.

“다른 건 여길 빠져나가서 이야기하자. 일단 타. 이러다가 너랑 나랑 둘 다 죽는다고.”

“…….”

“일라이저.”

“……예. 알겠습니다.”

앤디가 늑대로 돌아와 등을 내려 주자 일라이저는 벌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올라탔다. 아직도 온몸이 사시나무라도 된 것처럼 벌벌 떨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사라져 버린 그녀의 흔적을 끊임없이 좇았다.

11년을 기다렸다. 만나면 반드시 죽이리라. 제 눈앞에서 누이들과 어머니를 죽이고 제 뒤를 따라와 집사까지 죽여 버린 그 재규어. 그가 틀림없다.

백금빛은 직계만 갖고 있을 테니 재규어 사이에서도 드물다. 게다가 얼굴 위에 길게 생긴 상흔. 매일같이 찾아오는 악몽 속에서 몇백 번 저를 울렸던 그 얼굴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왜 황녀님께서…….

“일라이저.”

앤디는 빠르게 이동하며 인간의 이름을 불렀다가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봤던 그 살기. 명백한 복수의 살기였다.

불현듯 어떤 날이 떠올랐다.

약 30년 전에 있었던 토벌전. 1차 전쟁의 전초전이 되었던 그 토벌전. 선황의 명령으로 루시우스 러셀은 신념을 꺾고 재규어 토벌전에 나섰다. 제 2기사단의 독립적인 행동이었기에 1기사단이었던 늑대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뒤늦게 알았지만 그를 탓하지 못했다. 재규어에겐 역모라는 죄목이 씌워져 있었으니까.

그때라도 반발하고 나섰어야 됐지만, 늘 그렇듯 이종족은 인간에게 반하지 못했다. 결국 그게 시발점이 되어 1차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끝끝내 루시우스와 노아는 척을 진 채 갈라졌다.

그러니까 만일 일라이저가 정말 루시우스의 아들이라면……. 일이 복잡하게 됐군.

토벌전에서 루시우스는 이카르의 종족을 몰살했고. 그 보복으로 2차 전쟁 때 이카르는 루시우스의 가족을 죽였다면……. 그 틈에서 살아남은 일라이저는 당연히 이카르를 향한 보복심을 갖고 살았을 수밖에. 앞뒤 상황을 모를 테니.

앤디는 빠른 걸음으로 영지를 벗어나며 착잡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

“괜찮나?”

“네. 괜찮아요.”

“이대로 달려서 영지를 빠져나갈 테니 꽉 붙잡아!”

날랜 몸짓으로 불타는 숲을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이엘은 이카르의 등에 매달린 채 건조한 시선으로 영지를 둘러보았다. 노아와 르네의 영지에서 있었던 전쟁의 참혹함이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느껴졌다. 다만 이곳은 반드시 무너져야 할 곳이었기에.

“나타니엘. 이제 넌 자유야!”

“저보다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당연한 소릴. 나는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

이카르는 호탕하게 웃으며 발에 날개라도 달린 양 한없이 가볍게 뛰었다.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작게 미소를 짓던 이엘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을 뱅뱅 돌며 교대로 활강하는 독수리들이 보였다.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고 간간히 얼음 조각이 있는 걸로 보아 늑대들도 영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승산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첫 고비는 무사히 넘긴 셈이었다.

숲을 빠져나와 늑대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곳까지 다다랐다. 이제 이 마을만 지나면 무리와 합류할 수 있게 되겠지. 이엘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달리던 이카르의 앞에 화살이 내리꽂혔다. 급하게 방향을 바꾸는 탓에 몸이 기우뚱했지만 이엘은 간신히 그의 등에 매달려 중심을 잡았다. 방향을 재빨리 바꾼 이카르의 앞에 나타난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종족이었다.

“여자다!”

“정말 암컷이야.”

“왕께서 좋아하시겠어.”

“생포해라!”

스라소니…….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났다. 분명 뱀이 접전 끝에 이겼을 텐데. 몰래 숨어 있었나? 아니. 어쩌면 뱀의 영지에 늑대의 연합군이 모여 있단 소문을 듣고 처음부터 노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합군이 언젠가 뱀과 부딪치기만을.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이카르. 그냥 달려요. 지금은 붙어 봤자 밀려요.”

“그럴 생각이었어. 널 안전한 곳에 내려 주는 게 우선이야.”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또 한 번 화살이 내리꽂혔다. 이엘은 하늘을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엔 독수리가 잘못 쐈나 싶었는데…….

“매예요. 일단은 피하는 게……,”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매 울음소리에 이엘이 귀를 틀어막았다. 곧장 공격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매들은 예상과는 달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테르의 등에 타 활을 들고 사격 준비를 하던 우논들도 황급히 본체로 변하더니 허둥지둥 대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엘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시커먼 하늘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더니 꿀렁꿀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건…… 그때 봤던 그것이다. 르네의 영지에서 도망칠 때 보았던, 매를 잡아먹던 그 푸른색 짐승. 하늘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내려온 것은 기이한 모습을 한 이종족이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종족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푸드덕거리는 매를 꿀꺽꿀꺽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스라소니들이 이엘과 이카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늘은 일단 푸른색 종족에게 맡기고. 이엘은 이카르의 등에서 뛰어내려 품에 넣어 놨던 르네의 금화살을 꺼내 들었다.

스라소니라면 근접전보다는 능력을 쓰겠지. 그렇다면 검은 불필요하다. 자신이 사용하기엔 총이 가장 편하지만, 이엘은 아직 총을 쥐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이쪽이 나을 것이다. 다만 화살 하나로는 상대하기 벅찰 테니, 스라소니들의 눈을 돌려 도망치는 걸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 안에서 화살을 돌려 잡았다.

“여자잖아.”

“뱀의 말이 사실이었어. 정말 여자가 있었다니.”

“먹고 싶어.”

“먹어 보자, 우리.”

“왕께 드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맛보자.”

“유클리드 님이 아시면 혼내실 텐데…….”

“비밀로 하면 되잖아.”

침을 줄줄 흘리며 그녀를 향해 몸을 크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놈들은 이카르가 능력을 쓰기 전에 선수 치기로 마음먹은 건지 재빨리 능력을 쓰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어느새 이엘의 발목을 옥죄듯 덮쳤다. 늪처럼 질퍽해진 땅바닥에 발이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됐지만 이엘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질척한 흙 위로 무릎이 꺾여 엎어지기 전에, 들고 있던 화살을 던졌다.

공격을 피하려던 스라소니들 중 하나가 방향을 예측한 이엘의 화살에 발목이 찍혔다. 이엘이 재빨리 화살 뒤에 묶어 놓았던 줄을 억센 힘으로 끌어당기자, 스라소니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카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쓰러진 스라소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여자를 잡아!”

스라소니들은 당황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피를 잔뜩 묻힌 이카르가 달려드는 놈들 몇을 처리했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꼼짝도 못 하는 이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엘은 온 힘을 다해 줄을 잡아당겨 화살을 회수한 뒤 다시 한 번 공격을 준비했다.

그 순간이었다.

“전원 공격 준비!”

어디선가 들려온 우렁찬 고함 소리에 이엘이 움찔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스라소니들도 당황한 듯했다. 뒤로 일 보 물러난 스라소니들은 저희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틈에 이카르는 재빨리 이엘의 곁으로 복귀해 그녀를 진흙에서 꺼내 주었다.

때마침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슴푸레 느껴지던 빛이 점차 선명해지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지가 진동하듯 울리더니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숫자였다. 간간이 커다란 개체가 몇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비슷한 크기인 걸 보니 같은 종족인 모양이었다. 이엘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정렬!”

낮지만 위엄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중앙에서 순차적으로 열을 맞춰 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이내 중간중간 껴 있던 커다란 개체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젠장, 도망쳐!”

이엘보다 스라소니들이 먼저 그것들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도망치기엔 늦었다. 이미 땅이 우저적 갈라지기 시작했으니까.

명령을 제일 먼저 이행한 건 곰이었다. 단 네 마리만 합류하였으나 그 능력은 어마어마했다. 곰이 각자의 위치에서 앞발을 땅에 내리꽂으니 단단하던 땅이 크게 흔들리며 갈라진 것이다. 쩌억. 쩌저적. 갈라지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도망치던 스라소니가 있던 땅까지 금세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놓치지 않았다.

“전원 공격!!”

하트의 커다란 목소리를 따라 하이에나들이 일제히 눈을 썼다. 동시에 갈라졌던 땅 조각이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스라소니들은 조각난 땅덩어리와 함께 하늘 위로 떠올랐다. 놈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하이에나의 눈을 피하는 건 쉽지 않았다. 능력을 썼던 놈들은 되레 질척한 흙에 발이 묶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

스라소니를 태운 흙더미가 무서운 속도로 하늘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갔다. 갖고 놀다시피 스라소니를 하늘에서 굴리던 하이에나들은, 하트의 손짓 하나에 하늘 위에 둥둥 떠올랐던 땅 조각들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후두둑 떨어지다 못해 짓이기듯 서로 처박혀, 스라소니들은 형체도 없이 전부 으깨져 죽어 버렸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이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왕이시여.”

아직 어안이 벙벙한 이엘의 앞을 이카르가 이를 갈며 가로막았다. 그러나 패티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덧그리며 이엘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했다. 넷째 왕자의 행동에, 뒤에 있던 하이에나들 역시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무슨…….”

“오헬!”

이엘은 제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카르에게 괜찮다며 그를 뒤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엎드린 하이에나들 틈에서 커다란 하이에나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건지 하이에나는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는 단숨에 뛰어 이엘에게 달려들었다.

뒤로 풀썩 넘어간 이엘의 위에 올라탄 하이에나가 그녀의 얼굴 곳곳을 핥았다. 마치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한없이 애정을 표현한 하이에나는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부름에 응답하러 왔어.”

“아…….”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갈 거라고 했잖아.”

키나 몸이 전보다 훨씬 컸다. 그때 그가 말했던 것처럼, 피시는 더 이상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늘 쓰고 있던 안경이 없으니 그의 맑은 눈동자가 더 잘 보였다. 전보다 짙은 색을 띠는 눈동자에 제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이내 회백색의 머리카락이 이엘의 목덜미를 비비적거리며 파고들었다.

“나의 왕. 이날을 기다렸어요. 나와 함께 가요, 우리의 영지로. 응?”

그는 이제 완전한 성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