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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94화 (194/488)
  • 194화

    툭. 그녀의 손아귀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와 로빈의 발끝에 닿은 것은 테르의 잘린 목이었다.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겁에 질려서 스스로 죽어 버리더라고.”

    “…….”

    “당신처럼 나도 내 손으로 죽이려고 했는데. 아깝게 됐네요.”

    파멸.

    순간 뱀들의 머릿속을 파고든 것은 그 단어였다. 파멸……. 저건 파멸이다. 파멸의 씨앗이 우리에게 굴러 들어왔어. 왕의 총기를 어지럽히고 우리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박살 낸 인간 여자.

    저건 생명의 씨앗이 아니라 파멸의 씨앗이었다.

    “어쩌지? 이제 다 사라졌네.”

    잔뜩 깔린 흙과 돌덩이 앞에서 이엘이 웃었다.

    “그래서 한곳에 모아 놓는다는 건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야. 공격당하면 전부 끝나 버리거든.”

    덕분에 이쪽은 수고로움을 덜었다. 만일 제국처럼 연구실을 여러 지역에 분산시켰더라면 일일이 파괴하는 것도 일이었을 테니. 편리함과 은밀함을 도모하고자 했다면 보안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말거나.

    뚜벅. 뚜벅. 로빈이 멈춰 선 거리를 대신해 이엘이 좁혀 왔다.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핏덩이가 로빈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엘이 들고 있는 검은 도미닉의 검이었다.

    저걸 노렸군. 자신마저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이러려고 내 영지로 들어왔나?”

    “들어온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데려온 거잖아.”

    “그래서 목표를 완수한 것에 희열이라도 느껴?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이게 복수거리나 돼?”

    로빈의 뒤에서 커다란 뱀 두 마리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천장이 제법 높았음에도 우논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낮았다. 게다가 위협을 주기 위해 부러 몸을 키운 탓에 넓은 복도가 겨우 뱀 두 마리로 꽉 들어찼다.

    “난 네가 내 손 안에만 있으면 이깟 연구실은 필요 없어.”

    로빈이 싸늘한 조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이엘이 검을 고쳐 쥐기도 전에 로빈의 오른쪽에 있던 회갈색 뱀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우드드득― 뱀이 지나가는 곳마다 먼지가 일며 땅이 갈라졌고, 천장에선 벽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단숨에 다가온 뱀이 입을 쩌억 벌려 이엘을 삼키려 했다.

    캬아악―! 듣기 싫은 울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이엘은 뒤에서 저를 잡아당기는 힘을 무시하고 검을 바로 세웠다.

    검을 쥘 때마다 떨리던 손이 지금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이엘은 유폐되다시피 갇힌 로빈의 성 안에서 마냥 허송세월을 보낸 게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밤이면 잠을 줄여 가며 간신히 잡은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수백 번씩 허공을 갈랐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들고 가볍게 발돋움을 한 채 뛰어올랐다. 우논의 몸집에 비해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인간인 그녀에겐 상당히 넓은 복도였다. 이엘은 작은 체구를 살려, 달려드는 뱀의 머리를 빠르게 피해 몸통 쪽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아악!”

    이날을 위해 입에 맞지도 않는 식사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스트레스로 살은 계속 빠졌지만 몸에 필요한 열량은 매일매일 잊지 않고 섭취했다. 하여 가볍고 민첩하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이엘은 피를 토하며 계속해서 달려드는 뱀의 턱을 가볍게 베고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긴 검을 놈의 몸에 찔러 넣고, 그걸 발판 삼아 긴 몸을 타고 올랐다. 연이은 공격에 피를 토하면서도 뱀은 좀처럼 기세를 죽이지 않고 되레 더욱 날뛰기만 했다. 펄쩍펄쩍 꾸물거리는 뱀의 몸 위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줄기차게 올라가, 결국 놈의 머리를 밟고 섰다.

    이엘은 뱀이 제 머리를 천장에 박으려 움직이려는 찰나를 노려 품에서 단검 두 개를 꺼내 뱀의 눈에 빠르게 꽂아 넣었다.

    쿵! 이엘은 뒤집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뱀의 머리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사체의 몸에서 검을 회수하며 로빈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딱히 희열을 느끼진 않는데.”

    “나타니엘. 네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 네 뒤는 꽉 막힌 공간인데도? 내가 널 봐주고 있단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건가?”

    “아니. 나는 지금 죽을 각오로 여기 서 있는 거야.”

    “…….”

    “네 손에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죽을 마음은 없거든. 이엘이 웃으며 피 묻은 검을 고쳐 쥐었다.

    “로빈. 죽을 때까지 내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거야?”

    “…….”

    “저런. 딱하네. 나는 뱀 따위에게 눈길을 줄 만한 여유가 없는데.”

    그녀의 조소에 화가 난 것은 우논과 테르들이었다. 캬악! 쇳소리를 뱉으며 모습을 드러내려는 그들을 물리고, 회색 뱀이 천천히 기어 왔다. 리플이었다. 그는 노련하게 움직이더니 입을 벌려 그녀를 향해 독을 뿜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백금빛 무언가가 흡수하듯 독기를 죄 빨아들였다. 정확히는 빨아들인 게 아니라 공기의 흐름을 바꿔 분산시킨 것이지만. 당황한 뱀들의 눈앞에서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르르릉. 목을 갉아먹을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리플이 다가가려던 몸짓을 늦췄다. 조금 전에 보았던 백금빛 털을 가진 것이 이엘의 등 뒤에서 저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음영만 보였는데도 우람한 위압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뱀들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간만에 포식을 했더니 살 것 같군.”

    입에 피를 잔뜩 묻히고 나타난 재규어를 보고 아연실색하는 건 당연했다.

    “저, 저게 어떻게……!”

    “젠장!”

    은신해 있던 뱀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질렀다. 리플은 차분하게 왕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폐하. 재규어는 저희의 힘으론 무리입니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 궁수대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니. 저건 전쟁에 특화된 종족이다.”

    “…….”

    “특히 방어에는 인간들도 맥을 못 췄어.”

    로빈은 의외로 차분하게 답하며 물끄러미 재규어를 응시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저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2차 전쟁 때 저것들이 살아 있는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끌어들였으리라. 그랬다면 더 많은 인간들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로빈은 밀려드는 아쉬움에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어 이엘과 이카르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편 이엘의 뒤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카르는 은신으로 인해 보이지도 않는 뱀들을 향해 입맛을 다셨다. 뱀의 영지로 들어온 뒤로 배가 고프면 테르들을 야금야금 사냥했으나, 테르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적어도 우논 몇 마리는 채워야 배가 부를 것 같았다.

    “저것부터 먹어도 되나?”

    이카르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것은 회색 뱀이었다. 그의 말에 리플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자 이엘은 웃음이 터졌다. 눈앞에 잔상처럼 주드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제 말리지 않을 테니 이카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동안 오래 참긴 했다. 이카르는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제 명령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테니 괴로웠겠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카르는 몸을 최대한 작게 줄였다. 인간보다 더 작아져 시야에서 사라지자 뱀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란을 피웠다.

    꾸에에엑! 비명을 내지르며 텅 빈 공간에서 살덩이 여러 개가 튕겨져 나왔다. 리플이 아니라 은신해 있던 다른 우논이었다. 우드득. 와드드득. 뼈째 씹어 먹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에 질린 뱀들이 대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리플이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질러 대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고함을 치려 할 때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반복적으로 울려 대는 사이렌 소리에 뱀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비상시, 그것도 침입자가 있을 때만 돌아가는 경보음에 로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까지도 잠잠히 상황을 지켜보던 로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군.”

    흙투성이인 그녀의 맨발엔 노란 알갱이가 바스러져 있었다.

    “만족할 만한 승리는 아니지만.”

    즉각 들려온 이엘의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로빈은 리플의 안내를 받으며 이엘을 향해 중얼거렸다.

    “추격전은 안 끝났어. 다음에 잡으면 이렇게 멍청히 놔주진 않을 것이다.”

    “다음엔 내가 당신을 잡으러 올게.”

    “…….”

    “내 눈에 띄지 않게 잘 도망치길 바라.”

    어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봐. 이엘의 웃음소리와 함께 대지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천장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반절밖에 남아 있지 않던 성 전체에 균열이 생겼다. 이카르는 다 채우지 못한 배를 아쉬워하며 이엘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제 등에 태웠다.

    뱀들은 공포에서 벗어나 서둘러 왕의 엄호를 맡았다.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다. 이건 분명……. 로빈을 둘러싼 뱀 수십 마리가 천장을 파며 통로를 뚫으려 했지만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보다 먼저 땅이 부서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뱅뱅 돌며 입을 벌리고 내려오는 것은 독수리였다. 뚫린 하늘을 까맣게 채울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독수리 떼가 영지를 습격했다. 독수리의 눈앞에 뱀의 은신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몰아치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독을 쏟아부었으나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이었다.

    *

    “크아아악!”

    거대한 뱀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고꾸라졌다. 일라이저는 검을 손에 고쳐 쥐며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뱀들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암호를 알아내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그사이 왕성에서 일어난 일을 일라이저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이 되어 창문으로 찾아갈 때면, 황녀는 언제나 고개를 흔들며 괜찮다고 말했다. 이엘은 제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나를 그만큼 의지하지 못해서겠지.

    그래서 맡은 임무를 반드시 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이틀 전,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암호를 해독하고 보안을 해제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의 성공 소식을 들은 이엘은 일사천리로 일을 저질렀다.

    황녀께서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믿고 기다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하나로 일라이저는 구원받은 셈이었다.

    “어이!”

    일라이저가 끊임없이 달려드는 뱀을 베고 있는데, 높은 나무 위에서 무언가가 펄쩍 뛰어내리며 그를 불렀다. 늑대는 순식간에 나머지 뱀의 숨통을 끊어 놓은 뒤 그의 앞에 몸을 숙여 자세를 낮췄다.

    “타! 대피해야지, 너도!”

    앤디를 알아본 일라이저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늑대는 엄청난 속도로 불길을 뚫고 영지를 내달렸다. 일라이저는 그의 등 위에 매달린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꺼지지 않는 불길.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종족이 능력을 쓴 것이리라. 황녀의 말대로 새벽녘 즈음, 난데없이 솟구친 불길이 영지를 뒤덮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일라이저는 불길을 신호로 받아 암호를 해독했고, 재빨리 성 밖으로 도망쳤다. 이윽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성의 반쪽이 날아갔다.

    그 반지.

    마을에 있을 때, 이엘은 그에게 폭탄 제조를 부탁했다. 일라이저는 폭탄을 아주 작은 알갱이로 만들어 그녀의 반지에 끼웠다. 그땐 이런 용도로 쓰일 줄 몰랐지만, 알게 됐을 땐 그녀를 말리기에 너무 늦었다. 자신은 감히 황녀의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는 자였으니까.

    그럼 황녀님께서 결국 폭탄을 저곳에 던지신 것일까? 작동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벌어 주긴 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함부로 단언하긴 어렵다. 일라이저는 도망치는 와중인데도 초조함에 고개가 자꾸만 왕성으로 향했다.

    부디……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전하.

    “걱정되냐? 저쪽을 봐라.”

    앤디는 듣지 못하는 그를 배려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주었다. 일라이저는 돌연 멈춰 선 늑대를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앤디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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