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언제라도 벼락이 떨어질 것처럼 음습한 공기가 맴돌았다. 보통 때였다면 이런 날일수록 더 예민하고 철저하게 경계를 지켰겠지만, 두 달 가까이 이런 날이 지속되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게 화근이었다.
“서쪽 숲에 불이 났습니다!”
“동쪽 광장에도 불이 났습니다!”
성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비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땅이 축축했을 텐데도 어디선가 피어오른 불씨가 영지 전역을 태워 먹고 있었다. 수도 설비가 좋은 곳이었음에도 진압은 쉽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대체 어디서 불이 난 거야?”
“경비가 소홀했던 탓입니다. 잠을 깨워 드려 죄송합니다.”
도미닉은 품에 이엘을 안아 올린 채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몸이 좋지 않다며 일찌감치 침실에 들어가 자고 있던 황녀를 깨운 것은 재를 뒤집어쓴 성의 시종들이었다. 로빈은 화재 현장에 나가 있었고 대신 명령을 받은 리플의 지시하에 신속하게 대피를 마쳤다.
“모포를 덮고 계십시오.”
리플이 두꺼운 모포를 건넸다. 이엘은 시종들이 이끄는 대로 화로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불길이 번지지 않은 곳이 없어, 사용하지 않는 창고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케케묵은 냄새와 먼지가 자욱한 곳에 이엘을 데려온 것에 시종들은 곤란했던 건지, 서둘러 청소부터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염소젖을 데워 이엘에게 건네자, 그녀는 그걸 먹고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잠이 잘도 오는 여자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리플은 창고 밖으로 나가 우논들과 테르를 각각의 위치에 배치시켰다.
좀처럼 잡히지 않던 불길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피해는 꽤 입었지만 중요한 것들은 모두 대피하고 보관했으니 큰일은 아니었다. 이 정도 불길은 과거엔 자주 있던 일이기도 했고.
리플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쳐다보며 끊임없이 지시했다. 왕께서 돌아오셨을 때 이곳엔 문제가 없어야 한다.
“폐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로빈이 돌아왔다. 재가 묻은 머리를 털어 내며 창고로 걸어오는 왕을 향해 뱀들이 절했다. 로빈은 미간을 좁히며 손을 저어 인사를 거절했다.
“됐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폐하. 왕성에 보안 시스템을 가동시켰고, 황녀는 이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불이 성까지 번지진 않아서 다행이군.”
“경비를 소홀히 한 제 잘못입니다.”
“그에 관한 처벌은 나중에 하겠다. 연구실과 그녀만 안전하면 돼. 나타니엘은?”
“안쪽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제부터 피곤하다며 일찍 자더니 이런 소란 속에서도 눈을 붙일 정도로 몸이 고되었나? 그게 아니라 마음이 많이 약해진 탓이겠지. 노아와의 만남 이후로 밤마다 훌쩍이는 소리를 로빈도 들었다. 그 지경이 된 건 오롯이 제 탓임에도, 그녀의 울음소리에 괴로운 건 도리어 자기 자신이었다. 늑대 새끼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아까워, 자신이 죄 핥아 먹고 싶었다.
로빈은 미간을 좁힌 채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창고 안은 아무리 데워도 추울 테니 서둘러 따뜻한 곳으로 그녀를 옮겨야 한다. 그는 모여든 뱀들을 지나쳐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타니엘은?”
“아가씨께선 화로 쪽에 계십니다.”
“화로? 어디 화로.”
“저쪽 화로에…….”
시종들은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디에 있다고?”
“…….”
“내 눈이 이상한 건가?”
“…….”
“아니면 너희가 죽고 싶어 명을 재촉하는 건가?”
두툼한 모포들이 수북하게 쌓인 곳엔 온기가 없었다.
“리플.”
“……예, 폐하.”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돌아선 로빈의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손에 든 검으로 우논들을 죄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억눌러 참고 있는 듯했다. 리플은 오랜만에 보는 왕의 노여움에 숨을 멈췄다.
“난리 통에 그녀를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도미닉 경이……,”
“그럼 그녀가 도미닉과 사랑의 도피라도 갔다는 말이냐?”
우논들은 일제히 바닥에 납죽 엎드려 몸을 떨었다. 왕께서 도미닉과 황녀의 관계로 심기가 어지럽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아서 그를 처리했어야 했는데……. 금방이라도 목숨을 앗아 갈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짓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퍼어엉―! 퍼엉―! 퍼억―!
연이어 들린 폭음에 로빈의 눈이 왕성으로 돌아갔다. 번쩍. 섬광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빛이 꺼지는 순간, 뱀들은 숨을 멈췄다. 누군가 공간을 자르기라도 한 것처럼, 성의 반쪽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넓은 성이 날아가는 걸 뱀들은 무력하게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오랜 시간 자신들이 공을 들였던 연구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로빈의 귀에 여자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
“도미닉 경입니다.”
“죽었나?”
“기절한 듯합니다.”
왕성으로 가는 길목에 장정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진흙에 얼굴을 처박고 기절한 것은 이엘과 함께 있었다던 도미닉이었다. 그는 기사단에서도 활약이 뛰어날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볍게 처리했다고? 로빈은 싸늘한 표정으로 리플을 향해 고갯짓으로 그를 치웠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불이 난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우연? 아니. 우연이라기엔 과할 정도로 타이밍이 좋다. 줄곧 침실에 머물렀으니 그녀가 불을 지른 건 아닐 테고.
“……나자르.”
“예?”
“오드를 당장 데려와!”
로빈의 날 선 목소리에 병사의 일부가 방향을 틀었다. 욕을 뇌까리며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그는 제 손에 들린 검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무너져 내린 성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성이었으나 위용이 대단했고 제국이 있던 시절에도 소문이 자자했던 영지의 성이었다. 이종족 본연의 것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것을 자연스럽게 흡수한 아름다운 영지로 유명했다. 가꾸고 또 가꿔서 부족함이 없던 곳이었는데…….
감히, 네가 감히 이딴 짓을 해?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데.
“폐하. 밖으로 나온 흔적은 없습니다.”
“궁수대는 이곳에 남아서 발사 준비를 해라.”
“예!”
“생포하기만 하면 된다.”
“…….”
“필요하다면 다리 한 짝을 잘라 내도 좋아. 숨만 쉬면 돼.”
병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잡았다. 로빈은 궁수대를 남겨 두고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성 안으로 진입했다. 흙더미가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뱀들은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우논들은 깊고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기가 막혀서 숨도 잘 못 쉬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이곳을 만들었는데 이토록 쉽게 주저앉다니. 아무리 왕께서 연구를 포기하셨다고는 하나,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시금 가동할 수 있도록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는데…….
로빈은 제 턱을 쓸며 미간을 좁혔다. 보안은 철저했다. 연구실이 있는 지하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졌고 이엘은 이곳에 올 때마다 늘 눈을 가리고 왔으니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게다가 입구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단순한 잠금장치였으나 패턴이 복잡해서 쉽게 익힐 수 없는 형태였다.
그렇게 간신히 들어와야 보안 시스템을 끌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수로? 이엘을 놓친 건 기껏해야 한두 시간 정도겠지.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내에 이곳까지 달려와 폭파를 시켰다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조력자…….
나자르? 그렇다면 영지에 번진 불길은 뭐지? 나자르가 이동 능력을 쓸 수 있다고는 해도 동시다발적으로 성력을 펼칠 수는 없을 텐데. 오드는 이곳에 온 뒤로 시들시들 앓기 시작했으니 그만한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조력자가 있었다는 건가?
“윽.”
앞장서던 우논 하나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거렸다. 희뿌연 먼지로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뒤따라오던 뱀들도 행렬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
“주, 죽었습니다……!”
선혈이 낭자했다. 살덩이가 바닥에 조각조각 퍼져 있는 것을 본 뱀들은 일제히 인상을 구겼다. 저렇게 참담하게 동족이 살해당한 적이 있었나? 분노가 차올라 흥분하는 병사들을 무르고, 로빈은 허리를 굽혀 살덩이를 주웠다.
이건 먹힌 흔적이다. 인간인 그녀가 한 게 아냐.
“폐하. 위험……!”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남자보다 높은 음을 가진 목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로빈은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뱀들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은신으로 숫자를 가린 병사들을 뒤로하고, 로빈은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법 귀여운 짓을 벌였군.”
“그래요?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아예 박살을 낼 걸 그랬네.”
먼지가 가라앉고 어둠 속에서 인영이 조금씩 드러났다. 언뜻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얼굴엔 피를 잔뜩 묻히고 긴 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졌다.